내 안에 마교있다 185
도예주는 입고 있는 옷만 다르지, 동갑도 쪽에서 봤던 외모 그대로였다.
저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당시에 같이 임무를 펼쳤던 인원들도 다들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나만 따로 보러 온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 시선이 본인에게 향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는 나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이고 있다.
나도 미소를 보인 채로 그녀를 향해 살짝 묵례를 해 보였다.
잠시 후, 나는 급격하게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연무장 외곽의 멀리로, 내게는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와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바로 송천광이었다.
아닛! 진짯! 왜 또 온 거냐곡······!
기동타격조에 대한 표창장 수여식이 있다는 걸 어디선가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이해는 된다.
어쨌거나 송천광의 입장에서는 자식인 나를 전쟁에 내보낸 상황이었다. 당연히 걱정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이라 할 수 있는 송가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송천광의 입장에서는 내가 잠룡관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텐데, 그 와중에 표창장 수여식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전해 듣고 온 것이다.
내가 송천광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세상의 이치대로 생각하면 이건 내가 심했던 것이긴 하다.
송천광의 뒤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관 이청오와 송유하의 모친인 진양옥이었다.
가족의 어른들이 모습을 드러낸 마당이라 동난향도 왔는지 살펴봤으나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하긴 뭐, 그 아줌마가 내가 표창장 받는 걸 보러 올 사람은 아니지.
세 사람은 호흡을 고르는 와중에도 놀란 표정이었다.
놀란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현재 단상에 서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관주 육남춘이 아니라 동부지맹주 관필만이기 때문이다.
지맹주는 부맹주급이다.
잠룡관주와는 무게감부터 다르다.
내가 그런 존재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있으니 저토록 놀라고 있는 것이다.
어? 그런데 잠깐······!
도예주가 송천광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
송유겸의 얼굴도 송천광과 적잖이 닮았기에, 신룡대의 백룡 정도 되는 인물의 눈썰미라면 충분히 알아봤을 법하다. 신룡대의 정보를 토대로 알아봤을 수도 있고.
곧, 도예주가 송천광에게 말을 거는가 싶더니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이후에 도예주는 이청오, 진양옥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부터 도예주와 송천광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부디 송천광이 도예주를 얕잡아보고 무례하지 않기를, 그리고 말조심하기를 바랄 뿐이다.
* * *
갑자기 여인이 다가오자 송천광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여인이다.
그녀가 정중하게 포권하더니 엷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만 대인께서는 혹시 유겸이의······.”
그녀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아는 걸 보니 지인인 모양이다. 이곳 잠룡관의 교관이거나 관계자인가 싶기도 하다.
“유겸이의 아비이오만, 무슨 일이시오?”
그렇게 대꾸해주자 여인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대인을 보니 유겸이의 얼굴이 떠오르기에 혹시나 해서 여쭈었던 건데, 역시나 유겸이의 부친이셨군요. 광풍현 송가장의 장주님이신.”
“허허, 이 송 아무개를 알아봐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오. 보아하니 내 아들의 지인이신 모양인데, 귀하께서는 뉘신지?”
“저는 도예주라 합니다. 본맹 소속으로 이런저런 잡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호, 본맹에서 오신 도 여협이셨구려. 반갑소. 한데 우리 유겸이와는 어떻게 알고 지내는 관계이신지?”
“아, 유겸이와는 이번에 해적들과의 전투에 한 차례 같이 참여했던 적이 있습니다.”
약간은 의외였다.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 여인인데 해적들과의 전투에까지 참여했다니.
“오! 그랬구려. 우리 아들의 전우셨구려.”
“예. 그러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청오와 진양옥도 도예주라는 여인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유겸이의 전우셨구려. 반갑소. 나는 송가장의 총관인 이청오라 하오.”
“송가장에서 장주님을 모시고 있는 진양옥이라 해요.”
도예주라는 여인이 두 사람을 향해서도 공손히 예를 취해 보였다.
이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흉악한 자들과 싸우느라 고생이 많으셨겠구려. 그 과정에서 우리 아들이 폐나 끼치지 않았을지······.”
“폐는커녕 유겸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유겸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유겸이는 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허허허. 그렇구려. 허허허.”
어색함 가득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들이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라고는 하나 아직은 어린 잠룡관도일 뿐이다.
한데 나름 본맹에서 근무한다는 인물이 실전에서 잠룡관도에게 도움을 받는 수준이라니.
이 도예주라는 여인이 제대로 된 무인은 아니라는 뜻이며, 별 볼 일 없는 인사일 가능성도 높다는 뜻이다.
‘하긴 뭐, 본인의 입으로도 잡무를 담당하고 있다고는 했지.’
애초에 무공 실력이 빼어났으면 잡무를 담당하고 있을 리도 없다.
‘녀석, 이왕 목숨을 구해줄 것이면 좀 더 대단한 사람들을 구해줬으면 좀 좋아? 하필 구해도 이런 어중이떠중이를 구했나 보군. 에잉, 쯧쯧.’
구한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이라는 의미다. 이왕이면.
도예주라는 여인에게 물었다.
“본맹에서 일하는 바쁜 분께서 표창장 수여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그 먼 길을 일부러 오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동부지맹이나 이곳 잠룡관에 업무차 오신 것이오?”
“아, 네. 말씀드렸듯 제가 잡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실은 표창장과 공로패를 전해주러 온 겁니다. 소중히 다루면서 인편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는 물품들이니까요.”
“아하. 하긴 그렇겠구려.”
도예주라는 여인이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저 멀리 단상 쪽을 일견한 후 말했다.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유겸이는 잠룡관도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정말 훌륭하고 대단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든든하시겠습니다.”
“허헛! 허허허헛! 뭘 또 대단씩이나.”
“오늘 이렇듯 장주님을 뵙고 보니 유겸이가 누굴 닮아서 그렇게 의젓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허허허허헛! 녀석이 의젓하기는 뭘. 허헛! 아직 어린 청년에 불과할 뿐이오. 허허헛!”
도예주라는 여인이 비록 대단한 무인은 아닐지라도, 표정이나 말투가 사근사근하고 성격도 참 좋아 보였다. 사회생활 할 줄은 아는구나 싶다.
하긴 뭐, 대단한 인사가 아니더라도 나름 무림맹의 본맹에서 일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이라도 두루두루 관계를 터놔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허헛!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도 여협. 모쪼록 앞으로도 우리 아들과 좋은 관계로 잘 지내주시길 바라겠소. 아울러 나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장주님.”
“앞으로도 간혹 마주치게 되거든 인사 나누고 그럽시다.”
“예, 장주님. 제가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싹싹한 게 참 마음에 든다.
‘그래. 빼어난 인물은 아니더라도 이렇듯 성격이 좋으면 적당한 지인 관계로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지.’
* * *
대화를 나누는 송천광과 도예주는 나름 즐거워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단상에서는 관필만의 훈화가 끝나고 종금무의 졸업 기념 고별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내용을 들어보니 종금무의 고별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친우를 두루두루 사귀라는 점입니다. 상대방의 배경이 좋은가 나쁜가, 무공이 강한가 약한가, 상위 반인가 하위 반인가, 이런 기준들에 너무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편견을 넘으면 훨씬 더 좋은 가치들과 마주하게 된다는 깨달음을, 저는 잠룡관을 졸업할 즈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우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시기가 너무 늦다 보니 추억을 쌓을 시간도 부족하더군요. 졸업하는 시점에서 그게 가장 아쉽고 후회가 됩니다. 현명한 후배님들께서는 부디 저와 같은 과오를 범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종금무가 고별사를 마치자 박수가 쏟아졌고, 이후에는 마무리 식순이 빠르게 진행되며 모든 행사가 끝났다.
표창장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송천광 쪽으로 향했다.
도예주도 아직까지 우리 식구들 쪽에 남아 있는 상태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빠르게 다가가서 송천광에게 공손히 묵례한 후, 이청오, 진양옥, 도예주에게도 짧게 묵례해 보였다.
도예주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는데,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다.
송천광이 내게 대꾸했다.
“너 이 녀석, 몸은 멀쩡한 게야? 어디 다쳐서 불편하거나 그런 곳은 없고?”
“예, 아버지. 잔부상들 정도야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멀쩡합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위험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송천광이 염려가 담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한동안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청오와 진양옥 또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있다.
송천광이 말했다.
“한동안 단목세가에 머물렀다는 얘기는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녀석아, 잠룡관 복귀하기 전에 하루 이틀이라도 더 일찍 와서 장원에도 들렀다가 가야 할 게 아니냐.”
도예주가 곁에 있어서인지 점잖은 투로 타이르듯 말하고 있다.
“송구합니다. 응당 그리했어야 했는데 교관님을 포함한 여러 인원들과 같이 움직이는 편이 안전하겠다는 판단에······.”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송천광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약간 의외다.
이전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놈의 장원에 들르라는 타령을 어지간히도 해대더니, 이번에는 그 소리를 할 생각이 딱히 없어 보인다.
아직은 조금 더 지켜볼 문제긴 하지만.
그즈음 송유백과 송유상, 송유하가 도착했다.
모두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자 송천광이 내게 말했다.
“그거, 들고 있는 것 좀 보자.”
내가 들고 있는 건 둥글고 길쭉한 나무통 하나와 작은 목함 하나다. 길쭉한 나무통에는 표창장이 들어 있으며, 작은 목함에는 공로패가 들어 있다.
송천광에게는 목함을, 이청오에게는 나무통을 건넸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목함과 나무통을 열더니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이고! 공로패가 참으로 고급스럽구나!”
송천광이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공로패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다.
그러자 표창장을 살피던 이청오가 말했다.
“일전에 받았던 표창장보다 종이도 훨씬 더 고급스럽고, 맹주님의 친필 서명 또한 필적이 더 웅혼해졌구나······!”
두 사람이 감탄하고 있을 때 나는 빠르게 도예주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이곳에서 조장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조장님? 우리 사이에 정리한 호칭이 그게 아닐 텐데?]
[두,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전음은 어차피 우리 둘만 나누는 대화일 텐데?]
[누, 누나······.]
[그냥 누나?]
[예주······ 누나.]
도예주의 얼굴에 그제야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담겼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어인 일이세요?]
[휴가야. 큰 임무를 마친 덕에 장기 휴가지. 마침 동부지맹 잠룡관에 저 표창장과 공로패를 전해야 한다기에 내가 자원했어.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이래저래 강서 땅도 둘러볼 겸, 유겸이 네 얼굴도 볼 겸 해서.]
고개를 끄덕인 후에 물었다.
[한데 아버지와는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아버지가 즐거워하시는 것 같던데.]
[그냥 유겸이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인사나 나눈 정도였는데, 특별한 건 없었어. 네 칭찬을 많이 해드렸더니 좋아하신 거고.]
[아······.]
[참! 포상금 관련해서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해적 퇴치와 증운생 처치 건에 대한 포상금이거든.]
[아, 네.]
[지금 내가 전표로 갖고 있어. 천하전장의 전표인데 액수가 상당히 커. 그거 가족들 앞에서 줄까, 아니면 나중에 몰래 줄까?]
잠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일단, 내가 받은 포상금을 송천광이 탐낼 리는 없다.
게다가 나는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이다.
송천광이 거처를 얻어주겠다고는 했으나, 이 정도 재력쯤은 모든 가족들 앞에서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송가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덜 나올 것이다.
어차피 저 포상금 아니어도 나는 훨씬 더 많은 돈이 있으니 합법적인 저 돈 정도는 밝혀져도 상관없다.
[가족들 앞에서 주셔도 될 것 같네요.]
내 대꾸에 도예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예주와 그런 대화들을 나누고 있을 때쯤, 뒤쪽에서 두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누군지 알 것 같다.
동부지맹주 관필만과 관주 육남춘이다.
송천광도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확인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여전히 놀라 있는 송천광을 향해 관필만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귀하께서 유겸이의 부친이셨구려. 광풍현 송가장의 송 장주시라고 들었소. 반갑소.”
송천광이 깊숙이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지지지, 지맹주님을 뵈옵니다. 소소, 송천광이라 합니다.”
아아······! 지나치게 저자세다.
이해는 한다. 인맥 지상주의자인 송천광이 동부지맹주를 직접 대면한 자리다. 당연히 엄청나게 긴장이 될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 말은 좀 적당히 더듬으시란 말입니다.
없어 보여도 너무 없어 보이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