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86
“허허허. 자세 좀 푸시오. 편하게 계셔도 되오.”
그제야 송천광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주 육남춘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송 장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이고오. 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관주님이야말로 강녕하셨지요?”
“허허, 예. 송 장주님도 좋아 보이시는군요.”
대강의 안부 인사가 끝나자 관필만이 빙그레 웃으며 송천광에게 말했다.
“유겸이를 키워낸 훌륭한 부친이 누구신지 내내 궁금했는데 오늘에야 이렇게 뵙게 되는구려.”
“모,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시, 실상은 저 아이가 알아서 잘 큰 것이라 칭찬 듣기가 민망하기도 합니다.”
“허허, 장주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시구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어디에서든 당당하게 자랑하셔도 되오. 이번에 유겸이는 그 정도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고, 큰 공을 세웠소. 나도 유겸이를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맹주님께서도 유겸이를 매우 대견스러워하고 계시오.”
그 말에 송천광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아이고! 아이고오!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이런 아들을 두셨으니 장주께서도 얼마나 든든하시겠소.”
“사실······, 다 큰 아들 녀석인데도 제게는 아직까지 어리게만 느껴지는지라, 막상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항상 염려하게 됩니다.”
“허허허,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관필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송 장주와 더불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예정된 일정이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소. 만나서 반가웠소.”
“아이고,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십시오. 저야말로 지맹주님을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허헛. 아쉽긴 하나 오늘 이렇듯 첫 대면을 했으니 앞으로도 종종 인사 나눌 일이 생기겠지요.”
“다시 뵙게 되면 제게는 더 큰 영광일 겁니다. 그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송천광이 굽실거리며 관필만에게 대꾸하자 이번에는 육남춘이 말했다.
“나도 지맹주님과 같이 가봐야 해서 오늘은 송 장주께 차 한잔 대접하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송구하지만 다음에 봬야 할 듯하군요.”
“아이고, 관주님께서 송구하시다니요. 불쑥 찾아온 건 제 쪽이잖습니까. 어서 가보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곧 관필만과 육남춘이 뒤돌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송천광은 두 사람의 등에 대고 계속해서 굽실거렸다.
이쯤이면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도 계속.
“아! 유겸아, 이거.”
도예주가 내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겉봉에 내 이름이 작게 적혀 있다.
아까 전음으로 말했던 포상금일 것이다.
내가 봉투를 받아서 개봉부를 조심스럽게 뜯기 시작했을 때쯤 송천광이 도예주에게 물었다.
“도 여협, 저게 무엇이오?”
“맹에서 나온, 해적 퇴치 건에 대한 포상금입니다.”
“오호, 포상금이라? 고생한 데 대한 용돈 개념인 모양이구려?”
“용돈 수준이 아닐 겁니다. 사안 자체가 워낙 큰 사안이었던 데다가 해적들의 창고에서 압수한 재화도 많았습니다. 거기에 황실과 관부에서도 해적 퇴치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고자 무림맹에 매우 큰 포상금을 내리셨습니다.”
“호오, 황실과 관부에서까지······.”
송천광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궁금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도 여협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궁금해지는구나. 아비가 좀 봐도 되겠느냐?”
“그러십시오.”
내가 흔쾌히 봉투를 내밀자 송천광이 봉투를 받더니 전표를 꺼내어 확인했다.
송천광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같이 확인한 이청오 또한 크게 놀라는 중이다.
강서의 도읍인 남창에서도 집 한 채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금액이다 보니 저렇듯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렇게 큰 금액일 줄은······!”
송천광이 놀라며 그렇게 말하자 도예주가 대꾸했다.
“포상금은 전투 공훈 서열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데, 유겸이의 경우에는 그 전공 서열이 매우 높습니다. 방금 동부지맹주께서 괜히 유겸이의 공로를 추켜세우신 게 아닙니다. 이번 해적들과의 전쟁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유겸이가 그 정도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도예주의 말을 들은 송천광과 이청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전표를 바라봤다.
곧 송천광이 전표를 봉투에 넣더니 내게 건네며 말했다.
“잘 보관하고 있거라.”
이 정도면 내 의도대로 된 것 같다.
앞으로 일을 진행하다 보면 내가 보유하고 있는 재산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 핑계를 댈 게 필요한데, 나는 통합 잠룡대전 당시에 벌었던 돈과 지금의 돈을 투자해서 재산을 불렸다는 식으로 둘러댈 생각이다.
적은 돈을 굴려서 불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나, 이처럼 큰돈을 굴려서 불리는 건 덜 어렵다. 이 돈을 굴리는 와중에 운 좋게 대박 건수가 있었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거지.
잠시 후, 또 다른 한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제갈수광이었다.
“아이고! 제갈 교관님! 안녕하십니까!”
송천광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제갈수광이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송 장주님. 말씀 나누기 전에 일단 사죄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기동타격조의 활동이 끝난 후에 유겸이가 며칠이라도 집에 들를 수 있도록 조치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교관으로서 송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말을 마친 제갈수광이 송천광을 향해 깊숙이 묵례했다.
송천광이 양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아이고, 아이고! 자세 펴십시오, 교관님! 안전상의 이유로 그리하셨다는 건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제갈수광이 천천히 상체를 펴더니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교관님이 그러실 만했으니 그러셨겠지요. 당연히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교관님이 우리 유겸이한테 어떤 분이신데.”
송천광이 연신 굽실거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송천광은 내 무공 실력이 상승하기까지 제갈수광의 공로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과거에 내가 핑계를 그런 식으로 댔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제갈수광에 대한 송천광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저런 반응인 것이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모처럼 방문하셨으니 시간 되시면 접객당에서 식사하고 가시지요. 마침 장주님과 가족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습니다.”
“아이고, 하실 말씀도 있으시다니 응당 그리해야지요.”
그러자 도예주가 송천광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가족들의 식사 자리이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송 장주님.”
“만나서 반가웠소, 도 여협. 살펴 가시고 또 봅시다.”
“예.”
곧 가족 모두가 제갈수광과 함께 접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나는 도예주와 인사한 후에 금방 쫓아가겠다고 하고는 잠시 남았다.
“가시는 거예요?”
“당장은 아냐. 일단은 이거, 이쪽 잠룡관에 있는 기동타격조원들 모두에게 직접 전달해야 해서.”
도예주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몇 개의 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나한테 건넸던 포상금 봉투와 같은 봉투들이었다.
“액수들이 커서 내가 당사자들에게 직접 전달한 후에 보고해야 하거든.”
“아하.”
“이거 다 전달할 때까지는 천천히 동부지맹 잠룡관 구경이나 할까 해. 보아하니 제갈 교관님한테 전달하려면 최소한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제갈수광이 우리 가족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인지라, 나는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 그리고 당분간은 강서에 머물 생각이야. 그 기간 동안 한두 번 더 보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어서 가봐. 가족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았어요, 누나. 그럼 다음에 봐요.”
“응, 다음에 봐, 유겸아.”
도예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멀어진 가족들 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가면서 보니 가족들은 하나둘씩 접객당의 식당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한데 진양옥만이 식당으로 들어서지 않은 채 문밖에 남는 모습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진양옥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자 그녀가 말했다.
“갑작스럽게 위험한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 많이 했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고생이 얼마나 많았니······.”
“염려 끼쳐서 송구합니다.”
내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하자 진양옥도 미소를 보였다.
오늘의 진양옥은 그전의 수수한 차림에 비해서는 조금 더 꾸미고 나온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그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우아해 보인다.
아무래도 잠룡관에 딸을 보러 오는 자리이다 보니, 남들의 시선도 어느 정도는 의식해서 나름 차려입고, 치장도 하고 온 모양이다.
진양옥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이러지 마시고 들어가서 같이 식사하시죠.”
그러자 진양옥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뭐어?”
본인이 감히 저 안에서 겸상을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반응이다. 예상했던 대로다.
안심시키기 위해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 잠룡관에서 저와 누이는 제법 유명합니다. 이 접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웬만해서는 저와 누이를 알 겁니다. 이렇듯 가족이 다 같이 식사하는데 누이의 어머니만 밖에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양옥을 향해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저와 누이가 각각 다른 소실 태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실제 이런 광경이 목격되어 소문으로 퍼지는 것과 아닌 것에는 차이가 있는 법입니다.”
진양옥이 약간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괜히 송천광, 송유백, 송유상 등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아닌지가 염려되는 모양이다.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눈도 있고 교관님도 계신 자리입니다. 다들 이런 자리에서 집안 망신을 자초하고 싶지 않을 테니, 당장 이 자리에서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이 자리 이후의 일이라면 작은 어머님이 알아서 감당하셔야죠. 딸을 위해서.”
내가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진양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 작은 어머님이라니······.”
송가장의 아들들 중 누군가한테서 저런 표현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라는 거겠지.
“틀린 호칭은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긴 하겠지만······.”
곧 진양옥이 한 차례 크게 호흡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딸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폐만 더해줄 수는 없지. 가자꾸나.”
나중에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텐데도 결국은 나선 것이다. 딸을 위해서.
보아하니 눈동자가 또렷하여 결기가 느껴지고 있다.
각오를 다질 때의 송유하도 딱 저런 눈동자가 되는데, 역시나 모녀지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진양옥에게 차후의 일은 알아서 감당하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으나, 혹시라도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알아서 조치할 것이다.
진양옥과 같이 들어와서 보니 예상대로 송유하는 긴 탁자의 끝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진양옥을 송유하의 앞자리에 앉혀준 후, 나는 건너편으로 와서 송유하의 왼쪽에 앉았다. 진양옥에게서는 대각선 자리다.
내 왼쪽 옆에는 제갈수광이 앉아 있고 그 옆으로 송유상과 송유백이 앉아 있다.
송천광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와 진양옥을 두어 차례 번갈아 바라보았고, 이청오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청오의 경우에는 이미 내 의도를 알아챈 모양이다.
송유백과 송유상이 가장 놀란 표정이었는데,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로 두 놈을 한 차례씩 그윽하게 바라봐줬다.
놈들에게 눈치라는 게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내 눈은 웃지 않았다는 걸.
고로 이것이 일종의 으름장이라는 걸.
잠시 후, 송천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의미이며 수긍의 의미이기도 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송유하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송유하를 향해 빙그레 웃어줬다.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마움이 가득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