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88
어른들이 떠난 후 송유백, 송유상, 송유하와 헤어져서 홀로 계반 거주 구역을 향해 걸었다.
계반 거주 구역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앞쪽에 있는 길가의 나무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내게서는 반대편의 가지에 앉아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다.
걸음을 옮기면서 보니 남자 관도 한 명이 나무 위에서 서책을 읽고 있었다.
곁눈질로 봤는데 내 위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의 옆얼굴 정도였다. 나름 준수한 용모였고, 아직은 앳된 얼굴이었다.
계반 거주 구역의 근처에서 만났으니 계반 관도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한데 낯선 얼굴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계반의 신입생이 아닐까 싶다.
만약 계반이 아닌 다른 반의 관도라 해도 잘해야 일이 년 차 관도일 것이다.
한데 느껴지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다.
적어도 실력 면에서만큼은 계반 실력이 아닌 것 같다.
경지를 정확하게 알아보려면 회회심공을 일으켜서 탐색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애매한 상황이다.
주변이 고요한 데다가 우리 둘밖에 없는 상황이니 탐색을 하다가는 들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놓고 탐색하는 건 실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일단 느껴지는 기도만으로 짐작해 봐도 최소한 정반 이상의 실력은 되지 않을까 싶다.
호기심이 일긴 했으나, 독서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근처를 조용히 지나쳤다.
한데 그가 앉아 있는 나무를 지나쳐서 대여섯 걸음을 걸었을 때쯤, 결국은 나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처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이에 나는 걸음을 멈춘 후, 천천히 신형을 돌려 나뭇가지 위쪽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읽고 있던 서책을 덮더니 나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채, 소년이 바닥에 착지하기까지의 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허공에 있는 동안에도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었으며, 착지 또한 매우 경쾌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 말했다.
“선배님의 거처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거든요. 대부분은 시간이 남아도는 계반 관도들이라서, 아마 지금도 계속 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 겁니다.”
“아, 그렇소?”
“예. 아까 표창장 수여식 때문에 선배님이 잠룡관에 복귀했다는 게 모두에게 알려졌잖습니까. 송유겸 선배님이 워낙 유명한 분이시다 보니 다들 선배님을 뵙고자 거처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겁니다. 특히나 올해 계반의 신입 관도들은 선배님 때문에 이쪽으로 들어온 이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아······.”
이제야 자세한 내막을 알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후에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소. 한데 공자는 누구······.”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년이 나를 향해 신속하고 절도 있게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송유겸 선배님! 저는 이번에 잠룡관에 입관한 계반 일 년 차 명호운이라 합니다!”
역시나 계반이었던 거다. 저 실력으로.
어쨌거나 올해 입관한 신입 관도임에도 불구하고 명호운이라는 이름은 내게 낯익은 이름이다.
올해 내 우측 거처의 명패가 바뀌었는데, 그 바뀐 명패에 적혀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오가며 봤기에 알고 있다.
“하면 내 옆 거처의······.”
“그렇습니다!”
“하하, 이웃이었구려. 반갑소, 명 공자. 송유겸이오.”
“저야말로 뵙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송 선배님!”
소년 명호운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하하, 나도 잘 부탁드리오.”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준 후,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고로 잠룡관에서는 선후배간의 위계 개념은 그다지 없소. 서로 존중하며 대하는 게 기본이라, 그렇듯 굳이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써가며 극공대할 필요까지는 없소. 그냥 선배라고 해도 되고, 아니면 공자라고 해도 되오.”
그러자 명호운이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거면 조금만 참고 적응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다른 분들은 몰라도 송 선배님을 포함한 몇 분한테는 꼭 이 호칭을 쓰고 싶어서······.”
간절히 바란다는 눈빛이다.
“하하, 알겠소.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시오.”
내 말에 명호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하, 뭘 감사까지야.”
인상도 좋고 싹싹하며 붙임성 좋아 보이는 소년이다.
명호운이 말했다.
“참고로 아까 이웃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처음에 거처 배정받은 후에 옆 거처의 명패를 확인했을 때, 진심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아하하······.”
“변경 가능 기간에 몇몇 동기들이 저한테 거처 바꾸자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돈 준다고 했는데도 안 바꿨습니다. 심지어는 엄청난 금액을 제시하는 동기들도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당연히 안 바꿨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사실인 것 같다.
허! 내 이웃 거처를 차지하겠다고 큰돈까지 제시했다니.
그즈음, 내가 왔던 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 오라버니이!”
유은무의 목소리였다.
여느 때처럼 장우혜와 함께였다.
이윽고 내 앞에 도착한 유은무가 물었다.
“가족 면회 끝나고 오는 길이에요?”
“응.”
내가 대꾸하자 장우혜가 내 앞에 있는 명호운을 보며 말했다.
“뭐야, 명싹싹, 너도 있었네?”
“아, 유 선배, 장 선배. 안녕하세요.”
장우혜에게 물었다.
“명싹싹?”
“네. 애가 싹싹하잖아요. 그래서 성에다가 싹싹을 붙여서.”
“하하, 그런 거였어? 어쨌거나 별명으로 부를 정도면 서로 친분이 상당한 모양이네?”
“아, 네. 계반의 신입들 중에서 싸가······, 아니, 예의범절을 좀 아는 후배들과는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 명싹싹도 그중 한 명인 거구요.”
중간에 굳이 교정하지 말고 성격대로 그냥 싸가지라는 말을 쓰렴.
어쨌거나 둘이서 계반의 신입 관도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더니, 그때의 대면을 통해 나름 친하게 지내는 후배들이 있는 모양이다.
장우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명호운을 보며 말했다.
“뭐, 나름 실력도 있어 보이고.”
“하하, 민망합니다. 제 실력이라고 해 봐야 장 선배와 유 선배 앞에서도 부끄러운 수준일 뿐인데.”
명호운이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자 장우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용케 우리 실력을 눈치챘단 말이지.”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렴풋이 의문을 가졌던 정도입니다. 제대로 감을 잡았던 건 친구였고요.”
“아! 맞다. 단짝인 원무뚝은 어디 가고 오늘은 혼자야?”
“신법 수련한다고 갔으니 지금쯤 뒷산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을 겁니다.”
명호운의 그 대꾸까지 들은 후에 두 소녀를 향해 물었다.
“원무뚝? 그쪽은 원씨 성을 쓰고 무뚝뚝해서 그런 별명인 건가?”
그러자 유은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요. 원래 이름은 원추엽이었을 거예요.”
“원추엽······.”
그 이름을 한 차례 되뇐 후 명호운에게 물었다.
“명 공자의 단짝이라는 것 같던데, 친한 친구요?”
명호운이 대꾸했다.
“예, 선배님.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고,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아. 그런 친구와 같이 입관한 거구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느 지역 출신이오?”
“예, 안휘에 있는 오하현이라고······, 안휘의 북동부 쪽입니다.”
“아하.”
빙그레 웃음이 나는데 속으로 삼켰다.
명호운의 친구인 원추엽이라는 신입 관도가 바로 원을태의 손자인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대화들을 종합해 보면 원추엽은 명호운에 비해서도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뭐, 원을태의 손자라면 그 정도 실력인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하, 이게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구나.
잠시 후에 명호운은 수련할 시간이라며 떠나갔다.
그러자 장우혜가 내게 물었다.
“명싹싹 쟤 말이에요. 어느 정도 실력으로 보여요? 송 오라버니라면 벌써 파악을 했을 것 같아서.”
“반 배치 심사를 제대로 쳤으면 상위 반에도 충분히 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직 면밀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제 생각도 그래요. 정반 이상은 되어 보이죠. 그런데 쟤, 시골 동네 작은 도장 출신이에요. 같은 안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름도 모르는 도장이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차에 상위 반에 갈 만한 실력인 거죠. 보통은 아니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우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쟤 친구인 원무뚝은 쟤보다 더해요. 작년에 입관할 당시의 은무 수준에 거의 필적하는 느낌이에요.”
“호오, 그 정도야?”
“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 그 정도는 충분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허어.”
이건 좀 놀랍다.
장우혜가 제법 오래 지켜보고 저렇게 말할 정도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할 테니까.
유은무는 어려서부터 선우세가의 지원을 받으며 무공을 익힌 만큼, 입관 당시부터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제대로 반 배치 심사를 치렀으면 을반에는 충분히 갈 만한 실력이었다. 친구인 장우혜가 너무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덜 돋보였던 것뿐이다.
한데 원을태의 손자가 당시의 유은무에 필적한다면, 그도 입관할 때부터 을반에 갈 만한 실력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대형 후기지수급이다.
참고로 원을태는 신룡대 부조장 출신의 탁월한 전투 기술자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더 잘 안다.
그런 원을태가 키워냈다면, 그 손자의 무공 또한 철저하게 실전에 특화되어 있을 것이다. 즉, 장우혜가 느끼고 있는 경지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더 높을 가능성이 높다.
단목세가의 술자리에서 원을태가 손자의 무공 실력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허허. 그냥저냥 흉내 정도나 내는 수준이니라.」
어이가 없다.
그런 괴물을 키워놓고 그런 소리나 했었다니.
하여튼 이래서 늙은 구렁이들의 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다니까.
장우혜가 말했다.
“더 웃기는 건, 걔는 문파나 도장 같은 데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가전 무공이래요. 무기는 구겸도던데.”
“허어.”
겉으로는 놀란 척을 해줬지만 속으로는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장우혜, 유은무, 명호운 등의 반응을 보니, 세 노인에 대한 소문은 내 소문만큼 확산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확산되기에 훨씬 더 매력적인 소재는 정체 모를 세 노고수에 대한 소문이 아니라, 통합 잠룡대전 우승자 출신의 젊은 후기지수에 대한 소문이긴 하다.
유은무가 말했다.
“앗! 송 오라버니, 우리도 가봐야겠어요. 길초량 선배한테 암기술 교습 받으러 가던 길이라서요. 오늘이 첫 교습이거든요.”
얘들도 참 대단하다.
어제 그 얘길 하더니 오늘부터 바로 시작이라니.
“어, 그래, 그래. 어서 가봐. 열심히 배우고.”
“네! 다음에 봐요!”
두 소녀가 인사를 남기더니 실내 연무장 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삼서고에 들러서 두꺼운 무공서 두 권을 대여한 후에 내 거처로 향했다.
내 거처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저 멀리로 앞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내 거처의 앞이다.
스무 명? 아니, 스물다섯 명도 넘는 것 같다.
역시나 명호운의 말대로인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이럴 줄 알고도 대놓고 왔다.
어차피 저렇듯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을 계속 피해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은 맞부딪쳐서 해결을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