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90
“아니, 이게 누구시란 말이오!”
“유겸이 형······!”
정우립과 정세건이 그렇게 외치며 내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사정상 이런 식으로, 이런 모습으로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정우립을 향해 짧게 묵례해 보였다.
정우립이 양손으로 얼른 내 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소! 이게 대체 얼마 만이오, 송 공자······!”
“유겸이 혀엉!”
정세건은 아예 내 한쪽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여덟 달 만에 보는 정세건이다.
“오호! 세건이 너, 키 컸네?”
사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직 쑥쑥 크기 직전의 나이라, 컸다는 느낌 정도만 있다. 그래도 자라나는 소년이니 좋게 말해주자. 오랜만에 보는 자리이기도 하고.
정세건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래요? 내가 생각할 때는 별로 안 큰 것 같은데······.”
“너는 네 모습을 계속 보니까 모르지. 나는 오랜만에 보니까 금방 아는 거고.”
정세건이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녀석이 귀여워서 한쪽 볼을 살짝 꼬집어주며 다시 말했다.
“짜식, 그리고 더 잘생겨졌어.”
정세건이 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었고, 나는 녀석의 윗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우립이 노안에 미소를 띤 채로 내게 물었다.
“밖에서 공사 진행 상황은 좀 보셨소?”
“아닙니다. 이 옆에서 월담한 후에 바로 여기로 온 겁니다. 지금쯤이면 장주님과 세건이가 이곳에서 수련하고 있을 시간일 테니.”
“그렇구려. 하긴 뭐, 공사 진행 상황이야 천천히 봐도 될 것이고. 어쨌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는 더더욱 많소.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서.”
“맞아요! 유겸이 형이 우승했다는 얘기 듣고 할아버지랑 저랑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내가 민망함을 담아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정우립이 말했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사랑채의 객실로 갑시다. 그 모습으로 오셨으니 집에는 그냥 내 귀한 지인이라고 하겠소. 호칭은 그냥 ‘이 선생’이라고 합시다.”
“하하, 알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확인? 무엇을 말이오?”
“장주님과 세건이의 기도가 상당히 변했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특히 세건이의 기도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간 성취가 많이 상승했다는 뜻이겠지요.”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정우립이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어······. 그걸 이렇듯 단번에 알아보실 줄이야. 역시 송 공자시구려.”
“마침 수련장에 있는 김에 세건이의 현재 성취를 좀 봐 두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가 도움을 줄 만한 부분이 있는지도 미리 생각해둘 수 있을 테니까요.”
정우립이 반색하며 대꾸했다.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데가······!”
나는 곧바로 정세건에게 말했다.
“자, 그럼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차례 펼쳐 볼까?”
“네, 형!”
이윽고 정세건을 통해 청풍창뢰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수정해 줬던 형태였다.
참고로 내가 수정해 준 청풍창뢰식은 초반 삼식, 중반 삼식, 후반 삼식의 총 아홉 단계로 나뉜다.
지금은 초반 단계가 펼쳐지는 중이다.
초반 단계는 간결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잔잔한 수면을 보는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져야 한다.
한데 묵직하고 든든한 안정감이 제대로 전해지고 있다.
기대 이상이다.
그 와중에도 초식 시연은 계속 이어져, 어느덧 초반의 마지막 단계인 삼 단계로 진입했다.
이 부분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점점 너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중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실제로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게 잘 진행되고 있다.
그간 정세건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렇듯 삼 단계가 진행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릉-
난데없이 미세한 우렛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수정해준 청풍창뢰식의 우렛소리는 원래 중반의 오 단계에서 육 단계로 넘어갈 즈음에 났었다.
한데 초반의 삼 단계에서 중반의 사 단계로 넘어가는 도중에도 미세하게나마 우렛소리가 난 것이다.
마지막에 창을 찔러가던 정세건이 팔을 살짝 비틀었던 게 원인인 듯했다.
일단은 잠자코 중반 단계를 점검했다.
꾸준히 유지되던 중반부의 강한 기세는 오 단계에서 육 단계로 넘어갈 즈음에 절정의 강맹함을 쏟아내야 한다.
아까 초반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우렛소리가 들렸으니, 잠시 후에도 확실한 우렛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윽고.
쿠르르릉!
역시나 우렛소리가 들렸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소리가 훨씬 컸다.
이번에도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마저 다음 단계들을 점검했다.
육 단계에서부터 쾌속해진 청풍창뢰식은 후반 단계인 칠 단계부터 부드러움의 묘리를 담기 시작한다.
그렇듯 ‘쾌’의 묘리와 ‘유’의 묘리가 조화를 이루는 덕분에, 청풍창뢰식의 후반부는 ‘강’이 절제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위력 자체는 더욱 맹렬해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 정세건은 후반부의 묘리를 기가 막히게 잘 살려내고 있는 중이다.
창의 기세가 팔방을 섬세하게 수놓는 와중에도 고고한 기상이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고 있다.
멋지다.
정세건의 성취가 그 기상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상승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릉- 우르릉- 쿠릉!
군데군데마다 작은 우렛소리들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는 이유는.
이윽고 정세건이 초식 시전을 모두 마치고는 똑바로 섰다.
“허······!”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서 나온 헛웃음이다.
방금 전에 정세건은 내 기대치를 완전히 뛰어넘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짝짝짝짝짝!
대견스러운 마음에 박수가 절로 터져 나왔다.
“우와! 세건이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놀라며 묻자 정세건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실은 유겸이 형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됐었어요. 그래서 더 집중하려고 마음을 먹고 펼치긴 했는데,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몰입이······. 어쨌든 근래 펼쳤던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요.”
본인도 좀 얼떨떨하다는 표정이다.
고개를 돌려 정우립에게 물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장주님! 성취가 늘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정우립이 노안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게 다 송 공자 덕분이오.”
“그, 그런 말씀 듣자고 드린 말씀이 아니라······.”
“허허. 송 공자를 일부러 추켜세우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오. 저 아이는 작년 가을에 송 공자가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완전히 수련에 빠져들었소. 자기도 꼭 송 공자처럼 되고 싶다면서······. 게다가 수련뿐만 아니라, 그때부터는 무공서와 일반서를 가리지 않고 서책도 열심히 읽더구려.”
그러자 정세건이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유겸이 형은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엄청 똑똑하잖아요. 그래서······.”
정우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송 공자가 손봐줬던 청파심공 말이오. 장기간 꾸준히 운기하다 보니 그제야 축기 효율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게 체감이 되더구려. 놀라울 정도였소. 결국 저 아이가 저렇듯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뀐 심법 덕분이오. 그래서 이게 다 송 공자 덕분이라고 하는 것이오.”
물론 작년 여름에 매우 열심히 청파심공을 수정해 주긴 했었다. 한데 그게 그렇게까지 좋은 심법이 되었다고 하니, 솔직히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물었다.
“혹여 영약 같은 걸 복용시켰다거나······.”
“허허. 우리 형편에 그런 걸 어떻게 구해서 먹이겠소?”
“다른 괜찮은 약재 같은 걸 달여 먹였다거나······.”
“허허허! 약 같은 거 따로 쓴 적 없소. 음식도 비슷했소. 달라진 건 무공뿐이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정우립이 말했다.
“재미있구려. 본인이 그 대단한 일을 해놓고도 본인이 믿지 못하는 기색이라니.”
“당시에 심혈을 기울이기는 했습니다만, 솔직히 저로서도 그 정도 효율까지는 예상치 못했던지라······.”
“내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소. 청파심공은 송 공자 덕분에 최상급 심법이 되었음을.”
“하하······, 어찌 되었든 잘된 일입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돈이 궁해졌을 경우에, 이 재능만 살려도 충분히 호의호식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세건에게 물었다.
“중간에 보니 살짝 변형된 부분이 서너 군데 있던데.”
“맞아요. 제가 창을 휘두르기에 더 편한 형태로 미세하게 바꿔봤어요. 할아버지에게 여쭤보면서······.”
그러자 정우립이 말했다.
“큰 틀과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부적인 부분이었소. 저 아이 스스로 그편이 더 편하다고 하기에 그 정도는 상관없겠다 싶어서 허락한 것이고.”
이에 나는 정세건에게 말했다.
“잘했어. 내가 보기에도 그게 너한테 더 잘 맞는 것 같고.”
정세건의 표정이 환해졌다.
“잊지 마, 세건아. 초식이라는 건 하나의 기준일 뿐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야.”
“네!”
“단, 초식을 변형시킬 때는 섣부르게 접근해서는 안 돼. 안목, 숙련도, 무학 지식 등을 충분히 갖춘 후에 시도하는 거야. 물론 네가 했던 것처럼 몸에 맞게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정도는 괜찮아.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정세건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정우립을 따라 사랑채의 객실로 이동했다.
객실의 탁자에 마주 앉자마자 정우립이 말했다.
“내, 송 공자한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았소. 일단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한 얘기부터 좀 들어봅시다.”
정우립의 그 말을 시작으로 두 조손은 한동안 통합 잠룡대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물었다.
나는 두 사람이 궁금해하는 부분들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대답해줬다.
이미 오래 지난 일이긴 하나, 정세건의 마음속에는 내 우승이 매우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동경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통합 잠룡대전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정우립이 씩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번 해적들과의 전쟁에서 송 공자가 매우 큰 활약을 펼쳤다는 소문도 여기저기에서 들리더이다.”
“헛, 그 소문까지······.”
“허허. 포양호는 장강을 오가는 배들이 쉬어가는 곳인 만큼 정보 유통도 빠른 편이라오. 게다가 나는 오랫동안 포양호에 터를 잡고 있는 무가의 가주로서, 나름대로 지역의 큰 어른 대접을 받는 사람이오. 마실 나가면 여기저기에서 괜찮은 정보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고 할까.”
생각보다 소문을 빨리 접했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송 공자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이 늙은이가 속으로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르실 거요. 어쨌거나 그 이야기도 듣고 싶구려.”
결국 나는 절강과 복건에서 해적들과 사파인들을 상대로 싸웠던 일들에 대해서도 들려줘야 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정우립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송 공자께서 이렇듯 찾아온 용무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었구려. 너무도 반가웠던 데다가 송 공자한테서 직접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많았다 보니······. 허허헛.”
“하하, 급한 용무 같은 게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사실 오늘 제가 이렇듯 찾아뵌 이유는······.”
이후에 나는 독립에 대한 이야기와, 가문에서 마련해 준다는 거처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아버지께서 이왕이면 집터도 큰 곳으로 잡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내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덧붙이자 정우립이 말했다.
“내가 부친이라도 송 공자 같은 차남이 분가한다고 하면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을 것이오. 부모의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잘 보여 놓고 싶은 자식은 있는 법이오. 가뜩이나 송가장은 오랜 세월 동안 광풍현의 유지였던 만큼 재산도 많을 텐데, 송 공자 같은 자식을 위해 널찍한 집 정도야 뭐.”
“어쨌거나 그 이유로 찾아뵌 겁니다. 정가장도 있으니 집터도 이쪽 마을에 구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겠지요. 이 인근의 사정은 장주님이 잘 아실 테니 관련된 정보를 좀 구하고자······.”
내 말에 정우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법 널찍한 대지가 급매로 나왔었소. 한데 송 공자에게 알리고 싶어도 알릴 방법이 없었소. 마침 송 공자가 해적들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시기였던지라······.”
“앗, 아아······.”
이건 너무 아쉽다.
아쉬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정우립이 씩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후후,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늙은이가 일단 매입해뒀소.”
그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