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95
강호에서 마(魔)의 계보는 대마교, 천년마교, 암흑마교, 천마신교로 이어져 왔다.
백도인들에게는 저 모든 게 ‘마교’겠지만, 우리 같은 마도 제자들에게는 엄밀히 구분되는 명칭들이다.
과거의 마도는 매우 잔혹했다.
그리고 그 잔혹함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절은 단연 암흑마교 시절이었다.
단적으로 강시술만 예를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이전의 시기까지는 죽은 자의 신체를 쓰는 강시술만이 존재했었으나, 암흑마교 시기에는 산 자의 신체를 이용하는 생강시술까지 존재했었다. 온갖 생체 실험 등이 난무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신체를 이용하는 것조차도 황법으로 엄금하는 행위인데 생강시술까지 등장했으니, 관부에서도 그걸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결국 당시에 생강시와 강시를 앞세워서 중원을 침공했던 암흑마교는 백도와 관부의 단합된 힘에 의해 궤멸되기에 이른다.
그게 오백 년쯤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뿔뿔이 흩어졌던 암흑마교의 후예들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암흑마교 시절의 과도했던 행태들을 배척한 채, 대마교와 천년마교 시절의 강력했던 마공들을 연구,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힘을 키워가려 했다.
다른 한 무리는 암흑마교를 그대로 재건하고자 했다.
전자를 추종하는 후예들과 후자를 추종하는 후예들은 계속 갈등했는데, 결국은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전자를 추종하는 후예들은 신강 북부에 모여 새로운 마도를 열겠다는 기치를 천명했는데, 그렇게 출범한 마도가 바로 천마신교다.
후자를 추종하는 후예들은 신강 남부와 서장 북부 인근으로 모여 힘을 키웠다. 그러면서 당시의 사파에서 의술 분야에 연관이 깊던 혈의맥(血醫脈), 흑수곡(黑手谷), 백골문(白骨門) 등을 흡수했는데, 그렇게 출범한 마도가 바로 혈교다.
그게 약 사백오십 년 전의 일이다.
암묵적인 상호 불가침 관계였기에 서로 싸울 일은 없었지만, 초창기의 세는 혈교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천마신교는 마공의 연구 및 연마를 통해 힘을 키우려 했던 만큼 초반부터 세가 커지기는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
출범 후 수십 년간 빠르게 힘을 축적한 혈교는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중원 침공을 벌이게 된다.
총 두 차례였다.
혈교의 일차 중원 침공은 중원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수십 년 후에 감행했던 이차 침공 또한 중원에 매우 큰 타격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천마신교는 혈교의 행사에 일절 동조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원칙이었다.
당연했다.
혈교는 암흑마교 시절의 잔인함을 앞세워 중원을 도모했는데, 거기에 동조하거나 개입하는 건 천마신교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데 혈교의 두 번째 중원 침공이 실패로 기울어가던 시점에, 천마신교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이 혈교의 일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천마신교 내의 일부 세력이 혈교와 내통하여 중원 침공을 도왔음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후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혈교가 천마신교를 장악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했다는 사실도 드러나게 된다.
당시의 천마께서 대노하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혈교 세력은 패퇴하여 그들의 본거지 및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던 상황이었는데, 당시의 천마신교는 그런 혈교 세력을 완전히 섬멸시켜버리기에 이른다.
어차피 같은 신강이었기에 서로의 거점이나 은신처 등에 대해서도 속속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섬멸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게 삼백 년쯤 전의 일이었다.
도예주한테서 혈교에 대해 들은 탓에, 그녀와 헤어져서 잠룡관으로 복귀하는 내내 혈교 생각만 했다.
삼백 년 전에 명맥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겼는데 그들이 다시 등장하다니.
어쨌거나 혈교가 흑도를 움직이고 있다면, 이제는 흑도를 ‘흑도 따위’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여길 수도 없게 되었다.
혈교는 특유의 사악한 술법 및 잔인한 의술을 앞세워, 사람의 인체를 대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흑도에게는 더 속성이지만 더 위험성 높은 수법을 쓸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런 식이라면 신체는 급속도로 망가지게 되겠지만, 어차피 혈교의 입장에서 흑도 따위는 가볍게 이용해 먹은 후 가차 없이 버려도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렇듯 혈교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니 수많은 생각과 짐작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만났던 혈교 놈들은 해적들과의 전쟁 당시에 사파와 같이 움직였었다.
즉, 혈교가 증운생이 주도했던 사파의 일에도 깊숙이 관여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사파의 십 대 아이들에 대해서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십 대 아이들의 수가 매우 많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한데 사유 증운생이 처단됨과 동시에 십 대 아이들의 종적 또한 묘연해졌다.
한데 이렇듯 혈교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지금은 그 아이들 대부분이 혈교 쪽에 흡수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애초에 그 아이들을 키워낸 게 온전한 증운생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혈교가 증운생을 사주했던 건지도 의심스러워진다.
물론 내가 겪었던 아이들은 모두 사파의 내공을 익혔었다.
그러나 혈교가 사이한 수법으로 틀을 짜준 후, 증운생이 사파의 속성 심법을 주입시켰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삼백 년 전에 멸망했던 혈교가 하필 이 시점에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는 점도 여러모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혈교와 천마신교가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물론 정상적인 천마라면 혈교와 연계할 생각 따위를 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하필 지금의 천마는 인면수심의 쓰레기에 상또라이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 * *
삼월 초여드렛날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도예주와 헤어지고 나서 이틀 후에, 나는 잠룡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거처의 사립문을 열고 조용히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웬걸, 제갈수광이 내 거처의 마루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다.
“교, 교관님······?”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우! 우리 송유겸이이! 얼굴 보기 힘드네?”
내용만 들어서는 매우 반가워하는 느낌인데, 어조와 표정은 빈정거리는 투다.
“아하하······, 안녕하신지요.”
“초사흗날 저녁에 나갔던 것으로 되어 있던데, 이러면 오박 육일 만의 복귀인 건가?”
“아하하하, 제가 잠시 외부에 볼일이 좀 있었던지라······. 그리고 오박 육일이라고 하기보다는 엄밀하게 말하면 나흘 남짓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아주 뭐, 잠룡관 따위에 미련 같은 건 없다, 그런 느낌인 것 같네? 쫓아내려면 쫓아내시든가, 뭐 이런 느낌?”
“아하하,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저는 동부지맹의 잠룡관도인 걸 항시 뿌듯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내 말에 제갈수광이 피식 웃더니 전음으로 물었다.
[어디 갔다 왔나?]
[포양호에 다녀왔습니다.]
[포양호? 왜? 분가 후의 거처 문제로?]
[예.]
[그래서, 구했나?]
[예. 마침 정가장에 인접한 널찍한 터가 있어서 그곳으로 정했습니다. 일전에 아버지가 이왕이면 넓은 데로 구하라고 말씀하신 부분도 있어서요.]
[음, 나도 조만간 다녀와야겠군. 이왕이면 빨리 알아보고 빨리 얻어놓는 게 속 편할 테니.]
신혼집 얘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수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육성으로 말했다.
“따라와. 갈 데 있으니까.”
제갈수광은 그 길로 곧장 잠룡관을 벗어나더니, 서둘러 신법을 펼치며 나를 동부지맹 방향으로 이끌었다.
동부지맹에는 무슨 용무냐고 중간에 물었으나 그냥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라는 핀잔만 들었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동부지맹의 정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룡관의 교관 제갈수광과 관도 송유겸입니다. 지맹주전에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동부지맹의 정문 앞에서 제갈수광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정문 위사들이 즉각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이쿠! 제갈 교관님과 송유겸 공자라니······!”
“어서 오십시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송 공자도 어서 들어가게.”
뭔가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곧장 지맹주전으로 향했다.
지맹주전은 당연히 동부지맹주의 공간이다.
지맹주전 앞에서 신분을 밝히자 무인 한 명이 우리를 본관 옆의 별관으로 이끌었다.
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중년인이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두 분, 어서들 오시오. 나는 지맹주전 제삼각의 각주 양석광이오. 오늘도 안 오시려나 싶었는데 드디어 오셨구려.”
제갈수광이 곧바로 대꾸했다.
“송구합니다. 제게 약간의 사정이 있었던지라 이제야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우리가 뭔가에 늦은 모양이다.
늦은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일 텐데 제갈수광은 본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모양이고.
“그럼 올라갑시다. 얼른 두 분 것부터 처리해야 다음 순서들이 진행이 될 테니.”
“예, 가시지요.”
양석광이라는 중년인은 우리를 이 층 복도 끝에 있는 본인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구석 쪽에 쪽문이 하나 보였는데, 양석광이 우리를 이끈 곳도 바로 그 쪽문 앞이었다.
이윽고 양석광이 문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를 풀더니 직접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럼 편하게 고르고 나오십시오.”
“예, 실례하겠습니다.”
대꾸한 제갈수광이 방 안으로 들어섰고, 나도 순순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크지 않은 방에는 별다른 것 없이 사방의 벽면에 긴 탁자들이 쭉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그 탁자들의 위에는 두툼한 흰 천이 깔려 있었는데, 그 천의 위에 수십 점의 병기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딱 봐도 오십 점도 넘는 것 같다.
그제야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알 것 같았다.
“교관님, 이거 혹시······.”
“그래. 해적과의 전쟁 건과 동갑도 건에 대한 전리품 분배다. 우리 순번인 거지. 우리의 공훈 서열이 최상위의 몇 명 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는 모양이더군.”
“아.”
전리품은 전공 서열의 상위에 있는 이들에게 따로 주어지는 부상 개념이다.
“사흘 전부터 이곳에서 우리 둘을 호출했었다. 한데 네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없더군. 그래서 그냥 나한테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좀 미뤄뒀던 것이다. 이왕 순번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만큼, 둘이 같이 오면 네 녀석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
이보쇼, 이러면 내가 급감동하잖소······.
이곳에서 쓸 만한 전리품을 얻고 못 얻고를 떠나, 나를 배려해준 제갈수광이 너무도 고맙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관님.”
제갈수광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꾸했다.
“얼른 고르고 가지. 전리품 분배 담당자들도 빨리 우리 순서를 처리해야 다음 순서를 처리하러 갈 수 있을 테니.”
“예.”
제갈수광은 각각의 무기들을 나름대로 유심히 살피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지만, 나는 일단 무기들을 한 차례씩만 눈으로 훑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전체적으로 한 번 쓱 훑은 후, 그중에서 내 느낌을 사로잡은 것들 위주로 제대로 살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식으로 입구 쪽 벽면, 왼쪽 벽면, 입구 반대편 벽면 등을 차례로 지나 마지막으로 오른쪽 벽면에 도달했다.
지금까지 해왔듯 그곳에 있는 무기들도 한 차례씩만 눈으로 훑고 지나치던 중, 나는 한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 지나쳤던 무기가 내 시선을 다시금 붙잡았기 때문이다.
검이다.
검신의 길이만 따지면 한 자 남짓인 검이다.
음, 저 정도를 단검(短劍)이라고 해야 할지 소검(小劍)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치 않은데,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는 소검이다.
검신이 은은한 묵색을 띠고 있다.
물론 아주 약간의 묵빛을 머금고 있을 뿐이라, 저 정도가 크게 특별할 건 없다.
상당히 오래된 검 같은 느낌이다.
날도 반듯하고 예리하게 잘 서 있어서 쓸 만해 보이기는 한다.
한데 딱 그 정도다.
그 외에 대단한 인상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소검이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전리품들 중에서 가장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물건을 다섯 개만 꼽으라면 그 안에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저 소검이 내 시선을 다시 한번 붙잡았을까.
그리고 왜 이렇듯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내 시선을 붙잡고 있는 걸까.
착각이겠지만 녀석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감정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