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03
다음 날 새벽.
본격적인 구보 경로에 진입하기 전, 천천히 달리는 길에 송유하가 물었다.
“아, 엊저녁에 혹시 은무랑 우혜가 오라버니 거처에 찾아가지 않았나요?”
“어, 난데없이 와서는 방학 계획을 묻던데.”
“어쩌기로 하셨어요?”
눈치를 보니 내용은 다 알고 있는 모양이라, 승낙 여부만 대꾸해줬다.
“어. 뭐, 작년처럼 합숙한다기에 알았다고 했지. 청 소저가 포양호 변에 장만했다는 별장 구경도 할 겸.”
“알겠어요. 저는 오라버니가 어떻게 하실지 보고 나서 결정한다고 말해뒀거든요.”
본인도 합류하겠다는 의미다.
이후에 또다시 조용히 달리던 중에 송유하가 말했다.
“저, 그냥 이번 일 학기 말에도 승반 심사를 쳐볼까 해요.”
“오호.”
원래 송유하는 일 학기 말 승반 심사는 건너뛰고 장기적인 호흡으로 착실하게 준비해서 이 학기 말에나 승반 심사를 치겠다는 계획이었다.
작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준비했었기에 이 아이에게는 그편이 편한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갑자기 왜?”
“이번부터 승반 심사 기준이 약간 바뀌었대요. 대부분은 기존과 비슷한데 실전 수행 능력과 실전 효용성 부분에 가중치를 두고 가산점도 부여한다고 해요.”
승반 심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러나 변경 이유가 짐작이 가기는 한다.
근래 증운생과 사파 놈들 건으로 인해 여러 교훈들이 쌓인 만큼, 잠룡관 측에서도 교육 방향의 우선순위를 실전 역량 함양으로 잡은 모양이다.
“그러니 바뀐 기준에 대해 미리 한번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이번에 떨어져도 그걸 참고해서 이 학기 말의 승반 심사에 대비하기도 편할 것 같구요. 그냥 부담 없이 한 번 경험해 볼까 해요.”
“좋은 생각인 것 같네.”
이전까지의 평가 기준에서 을반 승반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일류 수준의 공력이었다.
그리고 송유하의 경우 내공 경지 면에서는 아직까지 부족한 면이 있어, 솔직히 이번 일 학기 말에 승반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송유하도 일 학기 말 승반 심사는 건너뛰고 장기적으로 볼 계획이었던 것이다.
한데, 평가 기준이 실전 쪽을 중시한다면 송유하에게는 유리해지는 면이 많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송유하가 을반으로 승반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게 내 객관적인 예상이다.
그래서 송유하도 경험을 쌓을 목적으로 심사를 치겠다고 하는 것이고.
참고로 겨울에 있을 이 학기 말 승반 심사는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
송유하의 무공 성취가 쑥쑥 느는 중이기 때문이다.
근래 내가 그녀의 수련을 꾸준히, 신경 써서 도와준 덕분이기도 하다.
심법인 고천비룡결의 성취가 올라가면서 축기 속도도 상당히 빨라진 상태이니 공력 면에서도 보완이 될 것이다.
공력 면에서는 아무래도 백년음양선과의 줄기와 잎을 달여 먹였던 게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게 직접적으로 공력을 상승시켜주기도 했지만 단전과 혈도를 튼튼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덕분에 기운이 활기차게 흐르게 되어 축기 효율이 높아졌고, 그 현상이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송유하가 노력의 화신인 이유도 크다. 오랫동안 앉아서 운기조식을 취하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는 아이인 것이다.
항상 조용히 열심히 하는 애다.
“승반 심사 전까지 집중 수련 한번 해줘?”
그래도 애가 다른 반도 아니고 을반 승반 심사를 치른다고 하니, 나름 신경을 써주고 싶은 마음에 물은 것이다.
참고로 오늘이 오월의 그믐날이라 내일부터는 유월이다.
이번 방학은 유월 열이레부터 정식으로 시작되니, 열엿새가 승반 심사 결과 발표 날이고, 보름날이 승반 심사 날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길어야 십오 일 정도만 집중적으로 도와주면 될 일이다.
얘를 위해서 그 정도야 뭐.
“아니요. 평소 실력으로 볼 생각이에요.”
역시 송유하다운 대꾸라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송유하가 바로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경험 삼아 치르는 것에 불과하잖아요.”
신경 쓰지 말라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사시 초(오전 9시) 무렵, 계반의 실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명호운에게 지시하여 조원들을 집합시키라 일렀는데, 역시나 다섯 명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조교님, 안녕하십니까!”
명호운이 먼저 내게 예를 취하자 나머지 아이들도 동시에 예를 취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응. 그래. 다들 모였군. 모두에게 공지할 사항이 있어서 모이라고 한 것이다. 여름 방학에 대한 얘기다.”
처음에는 선후배라는 개념에서 접근하며 애들에게 되도록 다정한 말투를 쓰기 위해 노력했었다. 남궁찬이 후배들을 대할 때 쓰는 말투와 비슷한 말투였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들을 상대하는 나는 단순한 선배 역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생 역할이었다. 어떻게든 잘 가르쳐 보고자, 웬만한 교관들보다 더 개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애들과 적당히 가까워지면서부터는 그냥 내키는 대로 편한 말투를 쓰며 편하게 대하고 있다.
한데 그러다 보니 제갈수광이 관도들에게 쓰는 말투와 비슷한 면이 적지 않아서 내심 놀라기도 했었다. 물론 내 경우에는 제갈수광처럼 사무적인 어조는 아니지만.
“원래 동부지맹 잠룡관의 여름 방학은 삼 주 정도다. 보통 유월 스무날쯤에 승반 심사를 치르고 다음 날에 결과가 발표되는데 그날부터가 실질적인 방학이다. 정식 방학 기간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되어 칠월 열사흘쯤까지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한데 이번 여름 방학은 기간이 열흘 늘어서 총 한 달이 될 거다.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우리 잠룡관은 비상 대비 체재 때문에 방학이 정상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었다. 강서 땅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고향에 못 갔던 관도들이 많았지. 그 보상 차원에서 이번 여름 방학이 늘어난 거다.”
“아.”
“전후로 닷새씩 늘어서, 정식 방학 기간은 유월 열이레부터 칠월 열여드레까지다. 마지막 날까지는 잠룡관에 복귀해야 한다.”
“예.”
“이번에는 방학이 긴 관계로 각자의 방학 계획에 대해 대강이나마 파악해 두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주로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보낼지 정도로 생각을 정리해서 내일 이 시간까지 알려주도록. 이상이다.”
말을 마친 후에 돌아서려는데 왕철양이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조, 조교님, 방학 계획 말씀인데······, 지금 바로 답변드려도 됩니까?”
“뭐, 그러도록.”
“어디에서······, 잠룡관에서. 누구와······, 혼자. 무엇을 하며······, 무공 수련을 하며. 이, 이상입니다.”
왕철양이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려가며 그렇게 말을 마쳤다.
하긴, 왕철양 쟤는 딱히 고향에 돌아갈 일이 없기는 하다.
어차피 본인이 살던 대장간 터를 팔고 아예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빠듯한 모양이니 굳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보다는 잠룡관에 머물 계획인 듯하다. 이곳에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삼시 세끼 꼬박꼬박 나올 테니까.
잠룡관에서 방학을 보내 본 입장이라서 잘 알고 있는데, 별로 궁상맞지도 않으며 수련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현명한 판단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심산화가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올렸다.
저렇듯 왕철양과 심산화가 나란히 서 있으면 신장 차이와 몸집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저도······.”
“그래, 산화도 말해봐.”
심산화한테만큼은 말투를 그나마 다정하게 하게 된다.
“저도 왕 공자하고 똑같은 계획이라서여.”
아······.
쟤는 멀리 하북에서 도망쳐온 애다.
고향에 가서는 안 되는 상황인 만큼, 쟤도 잠룡관에서 혼자 수련하며 보낼 모양이다.
왕철양이 얘기할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저 어려 보이는 애가 잠룡관에서 혼자 지낸다니 괜히 마음이 좋지 않다.
심산화에게 물었다.
“주변에 다른 친구들이 같이 어디 놀러 가자고 안 그래? 남창이랄지, 포양호랄지, 그 위에 여산이랄지.”
“친구······, 없는데······.”
아······.
역시나 마음이 좋지 않다.
다행히 심산화는 풀 죽거나 서글픈 표정이 아니라, 살짝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 원래 밖에 나가면 다 고생인 거야. 잠룡관에서 평소처럼 성실하게 수련하며 지내는 게 최고지. 암.”
“네에······. 헤헤······.”
쟤가 왜 웃는 건지는 모르겠다.
심산화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포연월이 손을 들었다.
“조교님, 저도 지금 바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도 왕 공자와 심 소저처럼 잠룡관에서 수련하며 보낼 계획입니다.”
“연월이도?”
“예. 딱히 고향에 돌아갈 만한 상황도 아니고, 그냥 잠룡관에서 조용히 독서하고 수련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포연월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모르나, 저 똑순이라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번에는 원추엽이 손을 들며 말했다.
“조교님, 저도 방학 내내 잠룡관에 머물 계획입니다.”
그러자 명호운도 손을 들었다.
“아, 저도 그렇습니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니들 고향은 안휘니까 다녀올 만하지 않나? 방학도 길고.”
그러자 원추엽이 대꾸했다.
“저는 가족이 이사를 계획 중인 모양이라 굳이 이번에는 올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나중에 이사 끝나면 아예 그쪽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긴, 쟤네 집은 포양호의 정가장 근처로 이사를 올 계획이다. 올가을 안에 온다고 했었다. 그러니 원추엽은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긴 하다.
이번에는 명호운이 말했다.
“추엽이가 안 간다기에 저도 그냥 이번에는 가지 않고 잠룡관에서 수련하며 보낼 계획입니다. 한창 무공 성취를 올려야 할 시기이기도 합니다. 가족에게는 안부 서신으로 인사를 대신할 생각입니다.”
쟤도 새로운 무공의 성취가 쑥쑥 상승하고 있는 터라 충분히 저럴 만하다.
어쨌거나 다들 잠룡관에 남는다고 하니 내 입장에서는 딱히 신경 쓸 게 없기도 하다.
“그래. 나도 겨울 방학 내내 잠룡관에서 독서와 수련만 하며 보낸 적이 있었는데, 충분히 지낼 만했다. 너희들도 지낼 만할 것이다. 다 같이 잠룡관에 남는 김에 서로 친분도 다지면서 지내도록.”
“예.”
“그래. 해산하지.”
말을 마친 후 실내 연무장의 입구를 나서려는데 바깥쪽이 약간 왁자지껄했다.
길초량 목소리가 나기에 일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 송 형······! 아니, 송 조교오!”
나를 발견한 길초량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하다.
“하하, 길 조교오! 오랜만이오!”
평소라면 놀리는 말을 덧붙였겠지만 참았다.
그의 뒤쪽에 계반이조원들로 짐작되는 관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초량의 체면도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
“송유겸 조교님, 안녕하십니까!”
계반이조의 대표로 보이는 녀석이 내게 인사하자 나머지 아이들도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하하, 후배님들, 반갑소.”
그즈음, 우리 조의 애들도 나오더니 길초량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인사했다.
대강의 인사들이 마무리되자 길초량이 내게 물었다.
“삼 조도 방학에 대해 공지하려고 모였던 모양이구려?”
“그렇소. 이 조도?”
“하하, 그렇소.”
“한데 그 조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조원들이 뭔가 활기차 보이는구려?”
내 물음에 길초량이 아닌 이 조원 애들 중 한 명이 대꾸했다.
“아! 저희 조는 여름 방학 때 합숙하기로 해서요!”
엥? 웬 합숙?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길초량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하하. 송 조교도 아시다시피 내가 올해 졸업반이잖소. 참고로 졸업반에게는 여름 방학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방학이오.”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어차피 졸업반은 겨울 방학 말미에 잠깐 와서 졸업식만 치르면 끝이기 때문이다. 졸업식 때 오지 않고 나중에 잠깐 와서 졸업장만 받아가는 졸업생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방학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까 궁리하다 보니 제자들과의 합숙이 떠올랐던 것이오. 집중 지도도 해주고, 친목을 다지며 추억도 쌓고. 충분히 의미 있잖소. 막상 제자들이 꺼려 하지 않을까 싶은 염려도 있었는데, 의외로 전원이 적극적으로 참가하겠다고 하는구려. 하하.”
느낌이 좋지 않다.
눈알만 살짝 돌려서 우리 조원들 쪽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애들의 눈동자에서는 부러움이 폭발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