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27
부리부리 사내가 비밀 거점의 위치를 순순히 밝힌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는 밝혀져도 상관이 없는 사안이기 때문일 것이며, 나를 무조건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놈이 내게 물었다.
“한데 내 궁금증은 안 풀어줄 건가? 나는 제법 친절하게 네 궁금증을 풀어준 것 같은데.”
“아까 보니 질문하는 도중에 귀하가 알아서 답을 말하더구려. 엄청난 기연이 있었소. 이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이 되기까지 그 경우 외에 무슨 다른 방도가 있었겠소.”
죽어서 아수라님의 곁으로 갔어야 할 서무욱의 혼이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송유겸의 육신에 깃들었다. 그 사실 자체가 엄청난 기연이다.
“그래서 무슨 종류의 기연인지가 궁금하다는 거잖나.”
그 말에 내가 잠자코 있자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원래 누군가가 어떻게 강해졌는지 따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너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단한 경우라서 궁금했던 것뿐이지. 당사자인 네가 죽으면 그 궁금증을 풀기가 어려울 테니까.”
이제는 딱히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기색이다.
분위기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양손에 들고 있는 각기 다른 병장기들을 고쳐 쥐었다.
금방 죽여주겠노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저런 태도를 보일 만하다.
부리부리는 그 정도로 높은 경지의 고수다.
게다가 그는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내가 빠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방심하고 있지도 않다.
어려운 상대다.
비룡검의 검병을 꽉 쥐며 천천히 한 차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상념들이 뇌리를 채운다.
일행들의 안위가 걱정이 된다.
그쪽으로 간 뚱뚱이와 뱁새눈이 때문이다.
두 놈을 막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지금은 내가 어찌해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눈앞의 부리부리 때문이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경지의 상대인 만큼, 내 안위조차 불투명한 상황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다.
친우들이 어떻게든 극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 생각을 하며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을 즈음, 부리부리의 신형이 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카강! 캉! 채재쟁! 챙!
부리부리와 나는 웬만한 무인들은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맹렬하게 얽혔다.
둘 다 빠르다 보니 짧은 순간에도 몇 합 정도가 순식간에 오갔다.
나는 싸우는 내내 천섬무를 평균 상 단계 수준으로 꾸준히 유지했다. 부리부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얽히기 시작한 지도 벌써 반 각 가까이 흐른 시점이다.
최상 단계의 속도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부리부리는 내 최고 속도에도 어느 정도 대응을 할 수 있는 경지의 고수다.
그렇기에 섣부르게 최고 속도를 보여주는 대신, 기회가 왔을 때 그 한 순간을 확실하게 노릴 생각으로 아낀 것이다. 최고 속도를 보여주고도 내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괜히 그의 경각심만 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내가 노릴 만한 기회는 오지 않았다.
부리부리는 그 정도의 강자였다.
검술의 경지도 높은데, 왼손에 들고 있는 호수구를 활용하는 역량도 발군이었다.
그는 호수구를 이용하여 내 비룡검의 검로를 무난하게 막았으며, 내가 틈틈이 날리는 쇠구슬과 소비도도 어렵지 않게 쳐냈다.
가뜩이나 호수구의 손잡이 부분은 근접 방어에도 용이하다.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가까이 접근하며 승부를 걸어보기도 쉽지 않았다.
사실, 섣불리 접근하는 걸 조심하기도 했다.
그가 언제 호수구의 쇠갈고리를 이용해서 변칙적인 공격을 가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수구 활용도 활용이지만, 부리부리는 검술 경지와 내공의 경지도 매우 높았다.
무리하지 않고 그의 검을 비껴내는데도 손아귀에 전해지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
비룡수투가 없었다면 지금쯤 검을 제대로 잡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붙어 보니 그 예상보다도 더 강했다.
결국 나는 반 각 동안 무난하게 밀리기만 했다.
내가 경지에 비해 높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나, 무공 경지 자체가 이런 식으로 크게 차이가 나버리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차이를 상쇄시키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쯤 되자 내게는 문제도 생겼다.
공력 문제다.
반 각 동안이나 천섬무를 계속 상 단계 수준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얼추 삼 할도 채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건 근래 회회심공의 축기 효율이 좋아진 후로 보유 공력의 양이 많이 늘어난 덕분이다.
같은 절정의 경지라 해도 기동타격조 시절의 나였다면 이미 공력이 고갈되고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대로 무난하게 흘러가면 무난하게 당할 게 빤하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마침 부리부리의 검이 내 왼쪽 가슴께를 찔러오고 있는 상황이라, 나는 곧바로 천섬무를 최대한으로 펼치며 그의 안쪽으로 짓쳐 들었다.
머리와 어깨 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의 일이었다.
자세를 급격하게 낮추며 부리부리의 검을 죽립 위쪽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그의 정면을 향해 비룡검을 어지럽게 떨쳐내자, 검에서 발출된 다섯 줄기의 날카로운 검경(劍勁)이 놈을 향해 쾌속하게 날아갔다.
슈슈슈슈슉!
나는 평소에 검기를 경력(勁力)의 형태로 날리는 걸 꺼린다.
공력의 소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천섬무만으로도 공력의 소모가 큰데 검경까지 마구 발출하다가는 내공이 금세 거덜 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천섬무만 운용해도 충분히 빠르다 보니, 검기를 주입한 검을 이용하여 직접 상대를 찌르거나 베는 게 내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공력 관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가 없다.
일거에 몰아쳐야 한다.
검기를 다섯 가닥이나 날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리부리가 검을 황급히 회수하는 게 느껴진다.
왼손에 들고 있는 호수구의 움직임에서도 어느 정도는 놀란 기색이 엿보이고 있다.
내가 갑자기 최고 속도를 냈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가 다섯 가닥이나 되는 검기를 한꺼번에 발출해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리부리도 내가 잘 싸운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내 검술 경지가 이 정도나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내가 방금 발출한 검기들은 날아가는 속도도 하나같이 빠르다.
천섬무를 최고 속도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나는 아까부터 왼손에 빼 들고 있었던 소비도 세 자루마저 놈을 향해 즉시 털어냈다.
슈슈슛!
천섬무가 최상 단계로 운용되는 상태에서 털어낸 소비도들이다. 당연하게도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다.
소비도들을 털어 낸 후에도 나는 계속 부리부리와의 간격을 좁히며 그의 상체를 향해 비룡검을 찔러갔다.
사사사사삭-
부리부리의 발이 매우 바쁘게 보법을 밟고 있다.
찰나간에 위기를 맞은 상황임에도 대처가 나쁘지 않다.
그는 오른쪽으로 횡보를 밟으며 내가 날린 공격들의 일부를 어떻게든 흘려보냈고, 그러는 와중에도 검과 호수구를 부지런히 휘두르며 다른 공격들을 막아갔다.
카가가강! 채쟁!
내가 날린 검기들과 소비도들이 부리부리의 검과 호수구에 의해 막힌 순간, 내 비룡검의 검극은 이미 그의 왼쪽 갈비뼈 아래에 다다른 상태였다.
아무리 부리부리라고 해도 피하기에는 늦었다.
가뜩이나 이전의 공격들을 방어하느라 그의 검은 제대로 회수되지 못한 상태다.
갑자기 최고 속도로 천섬무를 펼쳤기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호수구가 있다.
호수구의 몸체도 아직 회수되지 못한 상황이기는 하나, 손잡이 부분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부리부리가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혔다.
그러면서 역시나 호수구의 손잡이를 몸 안쪽으로 급격하게 끌어당기며 비룡검을 쳐내려 했다.
예상했던 반응인 만큼, 나는 급격하게 손목을 비틀며 검로를 변경했다. 그러면서 부리부리의 왼팔 하박 쪽을 노렸다.
놈이 호수구를 들고 있는 쪽의 팔이다.
부리부리가 화들짝 놀란 게 느껴진다.
호수구를 들고 있던 팔을 급격하게 끌어당기던 속도가 있기에, 이렇게 되면 관성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도 역동작에 걸린 셈이 된다.
그가 몸통 전체를 급격하게 좌측으로 비틀었다.
왼팔을 조금이라도 더 뒤로 빼기 위함인데, 그 와중에도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내 왼쪽 어깨 쪽을 찔러오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견제를 해서라도 내가 비룡검을 회수하며 피하게 만들려는 목적일 테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피할 내가 아니다.
내 왼쪽 어깨를 좀 찔리더라도 놈이 호수구를 들고 있는 저 왼팔에 적잖은 상처를 입히면 그게 더 이득이다. 앞으로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도 그렇다.
검에 독이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이미 확신하고 있는 마당이다.
한데 비룡검의 검극이 부리부리의 왼팔 하박에 거의 닿던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의 검에서 별안간 강력한 기운이 폭사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검에 모여드는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었다. 한데 언제 저 검에 저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끌어모았더란 말인가.
검법의 오의라도 펼친 건가 싶은데, 어쨌거나 이러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는 놈의 팔뚝을 찌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경이다.
이미 피할 수 없는 간격 안에 있다.
무조건 막으며 피해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양발을 강하게 땅바닥에 박으며 기운이 폭사되는 방향을 향해 상체를 틀었다.
동시에 비룡검에 내공을 가득 주입하며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방어식을 펼쳤다.
그러면서 이를 악문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들리며 나는 그대로 강하게 튕겨졌다.
“커헙······!”
이를 악물었음에도 결국 신음을 참아내지 못한 이유는, 순간적으로 목울대를 타고 역류한 뜨뜻한 액체 때문이다.
몸이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어떻게든 허공에서 몸을 가누며 눈으로는 끝까지 놈의 움직임을 쫓았다.
온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나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순간이다. 놈이 분명히 끝장을 내기 위해 다가오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해 오고 있는 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즈음 내 몸은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몸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왼팔과 왼 다리로 땅바닥을 강하게 때리며 신형을 튕겨냈다.
푸북!
내가 방금 몸을 튕겼던 땅바닥 쪽에서 난 소리다.
부리부리가 역시나 그 순간을 노리고 두 줄기의 검기를 날렸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자세가 엉망인 상황이다.
애초에 튕겨난 힘이 너무 강력했다. 그 힘의 관성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다음 대처를 이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좌측에서 모종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적인가 싶어서 순간적으로 철렁했는데, 그 인영이 곧장 부리부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나를 쫓던 부리부리도 흠칫하더니 어쩔 수 없이 그 인영의 공격을 막아갔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나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뜨뜻한 액체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지고 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갑자기 등장한 저 인영은 대체 누굴까.
지금의 내 위치에서는 등만 보인다.
일단은 사내다.
완전히 낯선 뒷모습인 것으로 보아 내가 모르는 인물이다.
이 밤에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백의를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