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28
나는 방금 전에 갑작스러운 공력의 격돌에서 완전히 밀렸다.
부리부리의 경지가 매우 높기 때문인데, 그로 인한 결과는 심각한 내상이었다.
얼굴을 펴고 싶어도 펼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뿐만 아니라 당장은 기운을 제대로 운용하기도 어려운 몸 상태다. 가뜩이나 방어식을 펼치기 위해 공력을 끌어 모았던 터라 남은 공력도 거의 없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마침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상태이기에 나는 일부러 다시금 땅바닥에 쓰러졌다.
입가로 흘러내린 핏줄기도 일부러 닦지 않았다.
부리부리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다. 나는 내상을 크게 입었으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제대로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다.
그렇듯 얼굴을 찡그리고 드러누운 채로 회회심공의 구결을 읊었다. 통각을 잠력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잠력이 어느 정도 모이면, 나는 누운 자세 이대로 눈치껏 회회심공을 운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구결을 읊어서 쌓은 잠력을 공력으로 변환도 시킬 겸, 회회심공의 치유 효과도 좀 받을 겸 해서다.
내 회회심공은 천섬무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운기 속도가 빨라진 상태다. 게다가 회회심공 자체의 성취도 상승하여 운기조식을 할 때의 기운 순환도 더 은밀해졌다.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러는 와중에 백의 사내와 부리부리의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사실 방금 전에 나는 백의 사내가 매우 가까워진 후에야 그의 접근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리부리와의 대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데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놈에게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부리부리의 마무리까지 피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리부리도 아까 흠칫하는 모습을 보니 백의 사내의 접근을 늦게 알아채서 약간이나마 놀란 모양이다.
놈도 잠시나마 나로 인해 위기에 처했었고, 이후에는 나를 마무리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우리 둘 다 백의 사내의 접근을 이렇게까지 늦게 알아챘다는 건, 백의 사내가 그만큼 고수라는 뜻이다.
부리부리에게 맞서는 백의 사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는 도중에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의 사내의 기운 때문이었다.
그는 포연월과 거의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즉, 저 백의 사내는 포연월과 같은 심법을 익힌 것이다.
확실하다.
아니나 다를까, 백의 사내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도 포연월과 상당 부분 유사했다.
고고함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바로 그 느낌이다.
같은 무공으로 보이는 움직임도 있고 다른 무공으로 보이는 움직임도 있는데, 특유의 신묘한 느낌 자체는 거의 비슷했다.
싸우는 모습을 보니 실전 경험도 충분한 느낌이라, 포연월이 앞으로 잘 성장하면 저런 무인이 되겠구나 싶기도 하다.
저 사내와 포연월이 익힌 심법은 별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두 사람이 익힌 심법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거슬림이 없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공 경지도 잘 드러나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기운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부리부리와 내가 더더욱 그의 접근을 늦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면 백의 사내는 포연월과 무슨 관계일까.
사내는 부리부리와 마주 보고 싸우는 중이라 내 위치에서는 주로 등 쪽이 보이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옆얼굴 정도는 얼핏얼핏 확인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나이는 서른 살 이쪽저쪽쯤인 듯하다.
청수한 느낌의 미남인데 면구를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나는 포연월의 맨얼굴도 알고 있다.
인조면구 속 그녀는 재기발랄한 인상의 미소녀다.
저 백의 청년도 미남이긴 하나, 아무리 봐도 포연월과 닮은 용모는 아닌 것 같다.
가족 관계 같지는 않으니 가문이 아니라 사문 쪽으로 엮인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는 얼추 열댓 살쯤이다.
하면 사부일까? 아니면 사형일까?
젊은 사부가 존재할 수도 있으니 사제 간일 수도 있다.
또한 나이 차이가 많은 사형제 간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백의 사내의 무기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쭉 지켜보니 그는 기본적으로 경지 자체가 나보다 높고 전체적인 전투력 또한 나보다 높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부리부리에 비해서는 약했다.
이건 사실 부리부리 쪽이 너무 강한 것이다.
게다가 백의 사내에게도 부리부리의 호수구는 매우 까다로운 모양이다.
호수구가 의식되는지 섣불리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일반적인 검보다 더 긴 검을 쓰는 부리부리 쪽이 기본적으로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백의 사내 쪽이 조금씩 밀리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사실, 특유의 신묘한 무공이 아니었더라면 백의 사내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밀렸을 것이다.
그나마도 익힌 무공이 워낙 훌륭한 덕분에 부리부리와의 경지 격차가 상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빗방울은 한 줄기씩 떨어지다 말다 하더니 어느 시점부터는 점점 빗줄기도 빼곡해지고 빗방울의 굵기도 굵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빗줄기가 더 거세지던 어느 순간, 먼 하늘에서 벼락으로 인한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르릉-
잠시 후 또다시 벼락 빛이 보이고 우렛소리가 들렸는데, 방금 전에 비해 거리가 약간 더 가까웠다.
그즈음의 나는 체내에 잠력을 제법 쌓은 상태였는데, 비가 쏟아지고 벼락과 우레가 치는 지금의 날씨가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이대로 회회심공을 운기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부리부리는 그렇지 않아도 내가 누워서 운기조식을 취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텐데, 이 정도의 비와 벼락과 우레라면 내 운기는 더더욱 감춰질 수 있다.
축 늘어진 척 누워서 스르르 눈을 감은 채 비를 맞으며 운기에 들어갔다.
내가 누워 있는 이곳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다. 그런 만큼 살이 떨린다.
날씨가 도와주고 있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기하다가 부리부리에게 걸릴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운기 도중에 공격을 받으면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이미 입은 내상이 훨씬 더 심해질 테고, 나아가서는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회회심공이 안정적인 심법이기에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낮기는 하나, 가능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금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도박적이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상을 크게 입었으며 공력도 바닥인 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어차피 미래가 없다.
회회심공을 빠르게 운기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얻어맞으며 잠력을 쌓는 형태의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축기 효율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통각을 통한 체내의 잠력을 공력으로 변환시키는 건 매우 오랜만이다.
한데 뭔가 이상하다.
운기가 진행되며 잠력이 공력으로 변환되는 동안, 내 주변의 기운이 서서히 내 몸으로 흡수되는 느낌이 든 것이다.
전생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한데 꾸준히 운기를 하며 살펴본 결과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잠력 외의 기운들이 공력으로 더해지며 단전에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회심공의 운기 속도도 평소보다 더 빨랐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했다.
놀라운 경험이었기에, 나는 운기 도중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한 차례의 운기조식은 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운기를 하는 내내, 혹시라도 부리부리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주변의 기운이 같이 흡수되고 있었던 탓이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부리부리의 기운이 움직이는 모양새 자체가 딱히 내 쪽을 의식하는 느낌은 없었다.
기운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흡수된 덕분인지, 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단전에 공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쌓여 있다.
회회심공의 성취가 낮았을 때는 한 번의 운기조식을 통해 잠력을 공력으로 변환시키는 효율도 낮았었다.
한데 지금은 성취가 늘어서인지 확실히 달랐다.
한 번의 운기조식이었을 뿐임에도 변환된 양이 이 할은 족히 되는 것 같다.
잠력이 내공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기운들이 같이 흡수된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슬며시 눈을 뜬 채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백의 사내는 여전히 열세에 있긴 하나 그럼에도 잘 버텨주는 중이다.
역시나 저 신묘한 무공 덕분인데, 한동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이기도 하다.
내 체내에는 아직 공력으로 변환되지 않은 잠력이 적잖이 남아 있다. 한 번 정도만 더 운기조식을 취하면 공력도 거의 사 할 가까이 채워질 것이다.
방금 전의 운기조식 덕에 내상으로 인한 고통도 많이 누그러졌으니, 한 차례 운기를 취하면 그 상태도 더 나아질 것이다. 어차피 회복된 공력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내상이 조금이라도 더 치유되어 있는 편이 낫기도 하다.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친 순간 지체하지 않고 두 번째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두 번째의 운기조식도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체내의 잠력이 변환되면서 주변의 기운이 서서히 내 몸속으로 흡수되는 느낌이었고, 진기가 경로를 타고 흐르는 속도도 빨랐다.
그러다가 운기조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쯤, 체내의 잠력이 모두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운기조식의 상황도 달라졌다.
주변의 기운이 서서히 내 몸속으로 흡수되는 느낌도 사라졌고, 진기가 흐르는 속도도 평소의 속도로 돌아왔다.
아까의 신기한 현상은 통각으로 인해 쌓였던 잠력의 영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운기조식을 취하는 중에도 백의 사내의 기운이 눈에 띄게 밀리고 있음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눈을 뜨고 확인해 보니 백의 사내의 움직임은 확실히 처음 같지 않았다.
호흡도 거칠고 지쳐 보인다.
체력이고 공력이고 많이 소모된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백의 사내는 내가 부리부리를 상대로 버텼던 시간의 두 배 이상을 버텼다.
부리부리와 같은 강자를 상대로 그 정도로 오래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신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저대로라면 자칫 백의 사내도 위험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은 백의 사내가 한 차례 호흡을 고른 상태에서 둘이 같이 합공을 펼치는 게 최상이다.
가능하면 잠시나마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추게 하고자, 부리부리가 보란 듯이 일부러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리부리도 내가 입었던 내상이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이런 내 모습이 상당히 의외일 것이다.
매우 의외라고 여겨지면 그가 잠시나마 싸움을 멈추고 간격을 벌릴까 하여 이렇게 한 것이다.
의외고 뭐고 부리부리가 곧장 나한테로 달려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경우에는 백의 사내와 함께 곧바로 합공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부리부리가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였다. 곧장 백의 사내를 향해 검을 한 차례 맹렬하게 휘두르더니 간격을 벌린 것이다.
부리부리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허! 일어섰다고······?”
빗소리가 제법 시끄러운데도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어조다.
내 예상대로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설령 일어설 힘이 있다고 해도 그냥 누워 있을 일이지, 뭐 하러 일어났나? 어차피 일어나 봐야 명만 단축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니 가만히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건가? 아니면······.”
잠시 말을 멈췄던 부리부리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곧장 말을 이었다.
“설마······, 지금이라도 둘이서 합공을 펼치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