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35
길초량의 기운에서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기색이 느껴지긴 했었다.
뱁새눈이와 뚱뚱이를 상대하고 있던 일행들과 다시 마주쳤을 때부터였다. 이후에 이차 접선 지점으로 달려오는 도중에도 계속 그 느낌을 받았었다.
아까 내가 느꼈던 그 미묘한 기색과 지금 길초량이 절정에 오른 것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선실의 복도에 기대어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복도 구석 쪽의 선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목강이었다.
지난밤은 힘겨운 밤이었기에 지금은 다들 곯아떨어져 있는 상태다. 한데 그는 벌써 깼나 보다.
하긴, 절정에 오른 날이니 그는 설령 잠을 안 잤다고 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인에게 있어 그 정도로 기쁜 날이 바로 절정에 오른 날이다.
나 또한 전생에 절정을 한 번 겪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으로 다시 절정에 올랐던 날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나를 발견한 단목강이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있었구려.”
나도 작은 목소리로 대꾸해줬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우리 절정고수 단목 조장님이 아니십니까?”
“하하······ 그러지 마시오. 민망하오.”
실제로도 민망함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에게 말했다.
“배에 오르자마자 치료받고 뭐 하고 하느라 제대로 축하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말 고맙소. 송 공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룹시다. 지금은······.”
단목강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고개가 향한 방향은 당연하게도 자연지기가 모여들고 있는 방향이었다.
“또 한 사람의 절정고수가 탄생하고 있는 중요한 순간인 것 같으니.”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단목강이 모를 리 없다. 불과 몇 시진 전에 같은 현상을 겪었던 사람이 바로 그다.
단목강은 저 현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조용히 기다릴 듯한 눈치다. 절정에 오르고 나서 밖으로 나온 길초량에게 바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은 모양이다.
가장 친한 친우가 절정에 오르는 순간이어서 그런지 나 또한 배고픔을 잠시 잊었다.
기다렸다가 축하 인사를 건네며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 될 것 같다.
약간의 시간이 후, 또 한 사람이 우리가 서 있는 복도 쪽으로 다가왔다.
장우혜였다.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한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길초량 선배님에게 모여드는 이 기운, 그거 맞죠? 아까 조장님한테서도 일어났던 바로 그 현상······.”
장우혜도 이 기운을 느끼고 찾아온 모양이다.
이 기운은 사실 아무나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기운은 아니다.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겠으나, 일류 수준에서는 기감이 좋은 이들이 매우 집중하고 있는 상태에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다.
일류 무인이 자고 있는 상황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한 기운은 아닌 만큼, 아마 장우혜도 깨어서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단목강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장우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 기운을 두 번이나 느끼게 될 줄은······.”
표정을 보니 부러운 모양이다.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반 각 정도 기다렸을 무렵, 길초량에게로 향하던 자연지기의 흐름이 멈췄다.
길초량의 기운도 더 이상 운용되고 있지 않다.
잠시 후 길초량이 머물고 있는 선실의 문이 열리더니 그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미미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우리도 길초량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가 위로 올라가자고 손짓하자 길초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갑판 위로 올라와 식당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친 상태였고,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우리 일행들이 어제 늦게야 잠들어서 그렇지, 평상적으로는 아침 식사 시간이 살짝 지난 시점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서 보니 교자와 고기볶음 등 맛있는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적당히 챙겨서 구석 쪽의 탁자에 가서 앉았다.
내가 음식을 제법 많이 챙긴 걸 보고 단목강이 말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려. 소식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챙기다니.”
“실은 제가 지난밤에 잠을 안 잤습니다. 내상을 다스리느라 운기에 빠져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이후에 자려고 누웠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잠이 안 오더군요. 그래서 나왔다가 아까의 상황을 접했던 겁니다.”
내 말에 단목강이 살짝 놀란 듯 대꾸했다.
“송 공자도 그랬소? 실은 나도 안 잤소. 운기조식에 취해 있었다고 할까. 세 차례 정도만 운기를 취한 후에 자려고 했는데, 묘하게도 축기가 평소보다 잘되는 느낌이지 뭐요. 그래서 계속하다 보니 이렇게······.”
저 기분을 알고 있다.
무슨 말인지도 당연히 이해한다.
절정의 초반부에는 느낌만 저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축기가 잘되는 기간이다. 한동안 저 현상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우혜가 내게 말했다.
“실은 저도 못 잤어요.”
내 예상대로 자고 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장 매는 왜 못 잤어?”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더라구요. 아까 조장님이 싸우다가 절정에 오르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거예요. 당시의 조장님은 무공의 위력이 점점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반응 속도를 비롯한 모든 움직임이 계속 빨라지는 모습이셨어요. 일류의 수준과 절정의 수준이 극명하게 눈으로 비교된 경이로운 광경이었죠.”
그러자 단목강이 나를 보며 약간의 부연을 보탰다.
“아, 아까 나와 소충광 공자, 장 소저가 월아산을 쓰던 뚱뚱한 자를 상대로 같이 싸웠었소.”
하면 길초량과 우문직과 포연월이 뱁새눈이를 상대했다는 뜻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우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무인인데 절정에 오르자마자 저렇게 많은 게 변하는 거구나 하며 많이 놀랐어요. 그게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던 모양이에요. 그 광경을 계속 떠올리다 보니 조장님이 너무 부러워지면서, 저도 더 빨리 절정에 오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들기 시작했어요.”
장우혜가 바로 말을 이었다.
“무공을 익힌 이후로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열망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든 적이 없었어요.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운기조식을 취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시간이 많이 흘렀던 모양이에요. 그러던 중에 방금의 그 기운을 느끼고는 황급히 나와 봤던 거구요.”
요약하면 아직 꽃봉오리 상태의 천재가 방금 꽃봉오리가 터진 천재를 보고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 강렬한 자극 때문에 잠이 안 올 정도였다니, 장우혜는 역시 욕심이 있는 아이다. 좋은 의미의 욕심이다.
장우혜의 말이 끝나자 우리의 고개는 동시에 길초량 쪽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딴청을 부리듯 말했다.
“들어보니 밤새운 사람들만 모였구려. 나도 실은 잠을 안 잤던지라.”
하여간에 이런 순간에도 능청스러운 모습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절정에 오른 걸 진심으로 축하하오.”
그러자 장우혜와 단목강도 즉시 길초량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정말 축하드려요, 길초량 선배님.”
“축하드리오, 길 공자.”
길초량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송 형, 장 소저. 정말 고맙소. 조장님도 고맙습니다. 사실 조장님도 아직 축하받아야 할 입장이시긴 한데.”
단목강이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군요. 길 형과 조장님이 거의 동시에 절정에 오른 날이니.”
단목강은 스물두 살이고 길초량은 스물세 살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저 두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나이에 절정에 오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기동타격조 시절의 경험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당시에 우리가 겪었던 실전 경험들은 횟수도 횟수지만 질적으로도 매우 치열하고 수준이 높았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최정예라는 기동타격조 안에서도 정예 조원들이었다.
참고로 당시에 추소륵도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입장이었으니 그쪽도 아마 절정 진입이 오래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사를 하며 세 사람에게 내가 없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떤 과정으로 절정에 올랐는지가 궁금한데, 그러려면 전체적인 상황을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뱁새눈이와 뚱뚱이를 상대하던 여섯 명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과, 이후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도중에 길초량이 백무혼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다.
“아, 그 상태를 백무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나중에 여쭤보려고 했었거든요.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던지라.”
“나도 신기했소. 분명히 내 힘으로 내가 싸우고 있는 게 맞는데도, 알 수 없는 다른 힘이 나를 굳건히 지탱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소.”
장우혜와 단목강이 각각 그런 식의 소회를 밝혔다.
하여간 백도에는 천마신교의 입장에서 상대하기에 골치 아픈 요소들이 이래저래 많이도 숨겨져 있구나 싶다.
참고로 백무혼은 의와 협을 바탕으로 하는 고매한 희생정신으로 인해 발동되는 힘이라고 하는데, 뿌리가 깊고 기반이 탄탄한 백도의 무공일수록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즉, 나와는 상관없는 힘인 셈이다.
그쪽에서 있었던 전투 얘기가 대강 마무리되자 길초량이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해 싸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우리가 그 두 고수들을 상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었소.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소. 두 번째 생이 주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단목강과 장우혜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길초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데다가 지금은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밝히자면, 조장님이 순수한 힘으로 절정에 오른 것과 달리 나는 약발로 오른 것이오. 약간 억지로 올랐다고 할까.”
“엥? 약발? 뭐 영약이라도 드셨소?”
내가 즉시 묻자 길초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소. 내 경우에는 영약을 복용한 덕에 절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오.”
내가 궁금해하는 건 과정이다. 그렇기에 길초량의 저 말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히 말해줄 수 있소?”
“항상 지니고 다니던 영약이 있었소. 전투 중에 복용하는 종류의 특수한 영약이오. 내가 지니고 다니긴 했으나 내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공동의 재산이었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복용이 허락되는 물건이었는데, 어제가 그런 상황이었기에 복용했던 것이오. 솔직히 그걸 복용했다고 해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초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영약은 공력이 바닥인 상태에서 순식간에 공력을 다시 채워주는 효과가 있소. 복용 후 일정 시간 동안 무공의 위력이 조금 더 강해지기도 하오. 때문에 그걸 복용해서라도 그들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싶었던 것이오.”
길초량이 바로 말을 이었다.
“말했듯 특수한 형태의 영약인지라,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영약의 기운이 체내에 많이 쌓여 있었소. 그래서 배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치료만 마치고 곧장 운기조식을 반복했던 것이오. 그 약 기운이 녹아들며 이렇게 된 것이고.”
그제야 대강의 과정이 이해가 되었다.
단목강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약발이라는 식으로 그 성취를 굳이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우리 나이에 영약이나 기연의 도움이 전혀 없이 어찌 이 경지에 오를 수 있겠소? 나 또한 근래에는 영약이 없어서 못 복용했을 뿐, 어렸을 때는 여러 차례 복용해 봤소.”
장우혜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길초량이 두 사람에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는 단목강이 입을 열었다.
“내 경우에는 장원에 쳐들어왔던 적들을 상대할 때부터 기분이 조금 묘했소. 아시다시피 우리의 마지막 실전은 기동타격조 시절이었잖소. 한데 그때에 비해 몸이 훨씬 가볍고, 공력 또한 착착 감기며 즉각 반응해 주는 느낌이었소. 시야도 더 잘 보이는 것 같았고, 주변도 훨씬 더 잘 인지되었고.”
단목강이 바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백무혼 상태에 접어든 때부터였을 것이오. 지금의 나를 속박하고 있는 그 무언가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소. 그러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소. 그래서 몸부림을 쳤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세계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오. 솔직히 나조차도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르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얼떨떨하고.”
저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미소를 띤 채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단목강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이렇게 된 건 송 공자 덕분이오. 그래서 송 공자에게 특히 고마워하고 있소.”
“하하, 조장님 스스로 열심히 하신 결과지, 그게 무슨······.”
“아니. 확실하오. 나는 어느 시점부터 무공을 대하는 개념이 바뀌며 시야가 넓게 열렸는데, 그게 송 공자 때문이었소. 내가 만약 송 공자를 모르고 살았다면 이 어린 나이에 절정? 꿈도 못 꿨을 일이오. 아무리 빨랐어도 앞으로 오륙 년 후에나 절정에 올랐겠지.”
단목강은 또렷한 눈동자에 진중한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저렇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민망함 가득한 미소만 지어 주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고, 그 후에는 곧장 각자의 선실로 돌아갔다.
네 명 모두 밤을 새웠기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침상에 누웠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든든했다.
혈교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당인데, 다행스럽게도 길초량과 단목강이 이 시점에 절정에 오른 것이다. 두 사람은 실전 역량도 넘치기에 충분히 믿을 만한 이들이다.
두 사람 외의 다른 일행들도 지난밤의 일을 겪으며 많은 것들을 느꼈을 테니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해봄 직하다.
내 잠룡관 생활은 이제 반 학기 남았는데, 그 기간 동안만큼은 주변 인물들의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금 더 힘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