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37
“아까 깨어났더니 단목지 소저가 옆에 있더라. 즉시 의원님을 부르겠다는 걸 말리고 지난밤에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부터 물어봤어. 그리고 대강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지.”
도예주가 안타까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원 경비 무사들 두 분이 희생당하셨고, 몇 분은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어. 게다가 너희들도 이래저래 많이들 다쳤다지. 그 와중에 내 상처도 돌보고, 도망치는 과정에서도 다친 나를 이송하기까지 했고······.”
도예주가 참담한 심정을 참으려는 듯 잠시 호홉을 골랐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단목 소저는 내 기분을 생각해서 에둘러 말했지만 전체적으로 들어 보니 그림이 빤히 그려지더라. 평화로웠을 장원이 나 때문에 쑥대밭이 되었고,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죽을 위기를 겪으며 다친 거지. 나 때문에.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나 때문에······ 그렇게······.”
목이 메는 모양인지, 도예주는 그 후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길초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과오입니다. 제가 더 주의하며 행동했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조장님을 어서 치료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혹시 모를 추종술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도예주가 누운 채로 고개를 젓더니 잠시 길초량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길초량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내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 둘 사이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길초량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송 형에게는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조장님을 업고 이곳에 나타난 일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송 형이 워낙 예리해서 그런 부분을 쉽게 넘어가는 성격도 아닙니다. 중간에 잠시 깨어나셨던 조장님도 송 형이라면 괜찮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여······.”
도예주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추종술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는 이유 따위로 어떻게 초량이 너를 탓할 수 있겠니. 애초에 너도 갑작스럽게 우리 조 때문에 아까의 일에 엮이게 된 것인데.”
길초량의 얼굴에도, 도예주의 얼굴에도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잠시 후 도예주가 호흡을 고르더니 길초량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있었던 우리 조원들 두 명은······.”
구령산맥의 산지에서 길초량이 도예주를 업고 도주할 때, 도예주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고 했다.
그래서 묻고 있는 모양인데, 이미 비극적인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기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은 해야 하기에 억지로 묻고 있는 느낌이다.
동료이자 책임자니까.
길초량이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예주가 눈을 감았다.
표정을 보니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그 괴로움을 어떻게든 참아내려는 기색이다.
도예주는 그 상태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위로가 들려와도 스스로를 책망할 수밖에 없는 시간.
도예주에게는 힘든 시간일 것이다.
같은 바닥에서 일해 본 입장이라 저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도예주는 불과 몇 개월 전에도 동갑도에서 몇 명의 부하들을 잃었었다. 당시의 슬픔이 어느 정도 가실 만한 시점에서 또다시 부하들을 잃은 것이다.
무슨 정예가 이리도 잘 죽는가 싶을 텐데, 나 또한 길지 않았던 흑풍대 생활 동안 적잖은 수의 동료들을 떠나보낸 바 있다.
정예가 맡는 임무는 그만큼 위험도가 높으며, 막상 실제로 투입되어서 보면 지휘부의 예측보다 훨씬 더 고난도인 경우가 적지 않다.
침울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분위기를 좀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러면 차라리 자연스럽게 임무에 관련해서 묻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중상을 입었었죠. 누가 봐도 전력 외로 분류될 정도의 중상이었죠. 그렇듯 당분간은 위협이 되지 않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추종술을 펼쳐가며 끝까지 누나를 쫓았어요. 그 후에는 누나와 길 형이 장원으로 피신한 것을 알고 강력한 전력을 파견하여 장원을 공격해오기까지 했죠.”
편안한 표정으로 그 말을 꺼내자 도예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침울했던 기색이 약간은 가시고 눈동자에 궁금해하는 빛이 담기고 있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놈들은 그 장원에 저와 우리 일행들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군요. 즉, 우리라는 전력의 존재를 몰랐음을 감안했을 때, 놈들의 입장에서는 그 장원을 완전히 몰살시키고도 남을 전력을 투입했던 거죠. 단 한 명의 도주자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도예주를 향해 바로 말을 이었다.
“결국 우리로 인해 놈들의 장원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나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곧장 일행들을 이끌고 도주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결국 어마어마한 고수들까지 보내어 우리를 추격했죠. 그 모든 과정을 겪다 보니 놈들의 목적을 모를 수가 없겠더군요. 어떻게든 누나를 제거하고, 누나와 접선한 모든 이들을 제거한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의문이 남죠. 놈들은 왜 그렇듯 누나를 기어이 제거하고 싶었던 걸까? 왜 그랬을까요, 누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물었지만 도예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대꾸를 바라고 물은 것도 아니었다.
답은 정해져 있다.
당연하게도, 도예주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혈교 놈들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종류의 정보였을 것이다.
도예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뭘 본 거예요?”
역시나 도예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도예주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유겸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개인적으로는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하지만 이건 당분간 극비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야.”
매우 중요한 정보인 눈치다.
예상했던 답변이라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다.
한번 찔러 보긴 해야지.
어제 길초량에게 묵룡조냐고 툭 던져 보고 기색을 살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그런 식으로 툭 던져보는 거다.
“혈교의 생체 실험 시설이나 강시 제조 시설 따위에 대한 정보라도 캐낸 거예요? 그런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장소랄지.”
혈교에 연관된 일들 중에서 중요도가 높은 정보라면 역시 이 분야가 빠질 수 없겠지.
질문을 던지고는 도예주의 기색을 집중해서 살폈는데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신룡대의 조장이라고는 해도 백룡은 나이가 상당히 어린 편이다. 그래서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전혀 걸려들지 않은 것이다.
역시 백룡은 백룡이다.
아무나 신룡대 조장 노릇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어쨌거나 내가 언급한 쪽의 정보가 아니면 혈교 세력의 거점 등에 관한 정보일 수도 있고, 혈교 세력 내 핵심 인물에 관한 정보일 수도 있다.
배반과 음모에 관련된 정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백도나 관부의 주요 인사가 혈교 쪽과 연관되어 있다는 식의 정보들 말이다.
결국 알아낸 건 없지만, 그래도 침울했던 분위기는 많이 전환되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나를 바라보던 도예주가 길초량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혹시 무림맹 남창지부 쪽의 상황에 대한 소식은 알고 있니? 역시나 내가 예상하고 있는 대로니?”
“그렇게 들었습니다.”
길초량의 대꾸에 도예주가 혼자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누나는 남창지부가 당할 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던데, 그걸 어떻게 알았던 거예요?”
“유겸이가 방금 전에 말했던 부분과 연관이 있어.”
“예? 제가 말했던 부분이라면······, 생체 실험? 강시 제조?”
“둘 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자 도예주가 말했다.
“일전에 너는 남창 흑도방들의 수상한 동태를 추적하다가 구령산맥 초입의 산지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쳤었지?”
“그랬었죠.”
“너라면 이번에 그 장원에서 합숙하던 중에도 흑도의 동태를 조사를 하러 나갔었겠지. 조사해 봤더니 어땠어?”
“다들 사라졌던데요.”
내가 대꾸하자 도예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때도 얘기 나눴지만 흑도인들은 혈교인들을 통해 무공을 배우고 있었지. 이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흑도인들이 익힌 무공은 귀갑공류의 무공이었어.”
귀갑공이란 피부를 단단하게 하여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키는 종류의 무공을 일컫는다.
이름도 많고 종류도 많은데, 대부분은 내공과 외공의 조화를 통한 최대한의 방어력 상승을 꾀한다.
과거에는 귀갑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왕왕 존재했으나, 근래에는 익히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익히기가 까다롭다는 단점과, 익힌 후에도 귀갑공 시전 시에 움직임이 다소 느려진다는 단점 때문이다.
게다가 귀갑공류의 무공들은 태생적인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기도 하다. 어찌되었건 귀갑공의 효과를 보려면 몸으로 날붙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위험성이다. 가뜩이나 무인이 휘두르는 날붙이에는 공력까지 주입되어 있으니 위험성도 더 크다.
그 위험성을 안고 굳이 귀갑공을 익히느니, 애초에 회피가 우수한 무공을 익히거나, 무기를 통한 방어식을 강화하는 편이 낫다는 게 요즘의 인식이다.
그런 추세에서 귀갑공이라니.
도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혈교에서 흑도에 전수한 귀갑공은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귀갑공에 비해 효율을 크게 개선시킨 귀갑공인 모양이야.”
하긴 무학이 전체적으로 발전했으니 귀갑공도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을 수 있다.
게다가 그 혈교 놈들이라면 귀갑공의 효율 증대를 위해 무공 안에 비정상적인 요소도 서슴없이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다소의 부작용 따위를 신경 쓰는 놈들이 아니다.
도예주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귀갑공에, 오랜 세월의 생체 실험을 통해 터득한 강시공의 단단함마저 더해진다면 어떨까?”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길초량도 놀란 표정이다.
귀갑공 얘기까지만 들었을 때에는 나름 경계할 요소라는 생각 정도만 들었었다.
아무리 혈교 측에서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킨 귀갑공이라 해도, 흑도 놈들이 단기간에 익힌 수준의 귀갑공이라면 그리 까다롭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상태에서 강시공이 일정 부분이라도 더해진다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도예주가 말했다.
“혈교에서 어제 남창지부를 공격하면서 앞세웠던 이들이 바로 그 흑도인들이었을 거야. 혈교의 귀갑공을 익히고 강시공마저 적용된 상태였겠지. 그 흑도인들이 전열에서 단단하게 밀고 들어가는 가운데, 그들의 사이사이에 혈교의 고수들이 끼어 있었을 테고.”
길초량과 나는 더 크게 놀라야 했다.
무림맹의 본맹쯤 되면 전력 구성에서 가장 많은 인원수를 차지하는 주 전력이 일류고수들이다.
그러나 지맹이나 지부는 사정이 다르다.
지맹이나 지부에서 인원 구성이 가장 많은 주 전력 편제는 이류의 중반에서 일류의 초반 사이에 있는 이들이다.
당연하게도 아직 일류에 오르지 못한 무인들이 훨씬 더 많다. 잠룡관으로 따지면 병반과 정반 수준의 무인들이 대다수라고 할까.
그런 무인들이 귀갑공을 익히고 강시술이 적용된 흑도 놈들을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 정도 경지에서는 아무리 검기를 일으켜서 찔러도 피부를 뚫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면 일류 중에서도 정예들이나 그 위의 절정고수들이 막아줘야 할 텐데, 혈교 쪽에서 그 부분에 대한 대비도 없이 무림맹의 지부쯤 되는 곳을 쳐들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도예주의 말마따나 중간중간에 충분한 고수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우리가 놀란 눈으로 도예주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확인해 봐도 아마 내 말이 맞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