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38
도예주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만났을 때 그 얘기도 했었잖아요. 당시에 흑도인들이 은밀하게 무공을 배우던 게, 이곳 강서뿐만 아니라 중원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고.”
몇 달 전 구령산맥 쪽에서 도예주와 우연히 마주쳤을 당시에 나눴던 얘기였다.
“그렇다면 설마 다른 지역의 무림맹 지부들에도 남창지부와 같은 일이······.”
내 말에 도예주가 대꾸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을 거야. 물론 이 또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아마도 지금쯤 본맹과 각 지맹의 전서망 담당들이 난리를 치르고 있지 않을까······.”
강서 지역에 남창지부와 태화지부가 있듯, 각각의 다른 지역들에도 무림맹의 지부가 최소한 한 곳 이상은 존재한다.
그런 지부들도 남창지부처럼 난리를 겪었을 테니, 다들 상황 보고를 위해 해당 지맹에 전서구를 날렸을 것이다.
사대지맹에서는 그러한 보고들이 들어오는 대로 곧장 내용을 정리하여 무림맹에 전서응을 날렸을 것이다. 상황이 추가로 파악되면 파악되는 대로, 바뀌면 바뀌는 대로 계속해서 전서를 날릴 수밖에 없다.
전체적인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으니 전서 담당자들이 정신없이 바쁠 거라는 뜻이다.
우리의 예상이 사실인지에 대해 어서 파악하고 싶으나 그건 배에서 내린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나눌 만한 이야기들을 대부분 나누고 나자 길초량이 말했다.
“조장님도 쉬셔야 하니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누나, 몸조리 잘하고 있어요. 심심하면 또 부르고.”
나도 짧게 인사말을 보태자 도예주가 말했다.
“고수들과 싸우면서 초량이와 단목 공자 등도 많이들 다쳤고, 특히 유겸이는 적잖은 내상까지 입었다고 들었어. 너무나도 미안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를 보호해 줘서 정말 고맙고······.”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려는 어조는 아니었고, 인사를 겸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다시 한번 표한 것이다.
도예주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둘 다 상태들이 나쁘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야.”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참! 이 얘기 까먹을 뻔했네? 초량이의 분위기가 불과 하루 만에 크게 달라진 거 축하해 줘야지, 하고 있었는데.”
어제 본인을 업고 도주하던 일류고수 길초량이 지금은 절정고수가 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길초량이 민망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자 도예주가 예쁜 얼굴에 장난기를 담은 채로 물었다.
“왜? 절친한 친우가 약관의 절정고수다 보니 자존심 상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참지 못하고 초량이도 그냥 절정에 올라버린 거야? 짜증 나서?”
“하하, 그, 그게······.”
길초량이 여전히 뒷머리를 긁으며 대꾸하자 도예주가 말했다.
“정말 대단들 하다. 유겸이는 말할 것도 없고, 초량이만 해도 내가 절정에 올랐던 나이보다 훨씬 빨라. 나도 무공 쪽으로는 계속 천재 소리 들으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인데······.”
당연할 것이다.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취가 빨랐으니 여인의 몸으로 저 나이에 신룡대의 조장이 되었을 테지.
“아무튼 정말 축하해, 초량아.”
“감사합니다, 조장님.”
“너희 조장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이지 한동안 식사 안 해도 배부르다고 하시겠다.”
하긴, 내가 묵룡의 입장이라도 그럴 것 같다.
“하하······.”
길초량 놈이 어색한 미소를 흘리자 도예주가 말했다.
“이렇게 된 김에 넌 그냥 신룡대에 말뚝 박아버려. 그 나이에 절정이면 충분히 저 위쪽까지 갈 수 있을 거야.”
“하핫, 거, 거기까지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라······.”
“근래 우리 조에 결원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충원 속도가 좀 더디거든. 이참에 너를 우리 조에 파견 좀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어차피 너 정도 되면 정예 조원, 부조장, 조장의 경로를 밟게 될 테지? 정예 조원 역할은 우리 조에서 하자. 응?”
“아하하······.”
“몇 년 동안만 그렇게 하자. 응? 너 부조장 달 때는 내가 원래의 조로 다시 보내줄 테니까. 참고로 우리 조에 오면 너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나한테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누나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게 무슨 대단한 특전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다. 물론 농담조다.
한데 길초량 놈이 급격하게 흥미를 보이고 있다.
이 자식, 뭐야? 내가 도예주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게 부러웠나?
“오, 그런 영광을! 하지만······ 저희 조장님이 허락을 하실지.”
“가능할지도 몰라. 그래도 그 선배가 나를 막내 조장이라며 은근히 배려해 주는 편이거든. 가뜩이나 조를 옮기라는 것도 아니고 파견인데 뭐.”
“하핫. 조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습니까. 위에서 조치하시면 그대로 따를 뿐.”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알아서 타진해 볼게. 딱 기다리고 있어.”
진짜로 할 기세다.
그 후, 우리는 인사를 마무리하고 도예주가 머물고 있는 선실을 벗어났다.
길초량은 운기조식을 취하겠다며 곧장 선실로 돌아갔다.
당분간은 틈날 때마다 운기조식을 취할 계획이라고 한다.
저 심정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절정의 초창기라 축기가 잘될 때이며, 그렇기에 운기조식하는 재미가 클 때이기도 하다. 비슷한 입장의 단목강도 지금쯤 선실에 박혀서 운기하는 재미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갑판 위의 선수 쪽으로 향했다.
나 또한 내상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치유하기 위해서는 운기조식이 필요한 입장인데, 그 전에 시원한 저녁 강바람이나 좀 쐬다가 들어갈 생각이다.
혈교에 대한 생각을 하며 모퉁이를 돌아 선수 쪽의 갑판으로 나오자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백송학이다.
배가 나아가는 전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사색에 잠겨 있는 느낌이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돌아서려는데, 그의 고개가 내 쪽으로 먼저 돌았다.
“아, 송 공자.”
“아, 백 선배님. 사색에 잠겨 계신 듯하여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색까지는 아니고, 그냥 정취를 좀 느끼고 있었을 뿐이오. 내가 이 강줄기를 타 보는 건 처음인데, 강을 거슬러가며 접하는 풍경들이 제법 운치가 있구려. 가뜩이나 이런 호화스러운 배를 타고 좋은 술까지 음미하다 보니 더 좋은 것 같고.”
내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송학이 말했다.
“바쁘지 않으면 이리 오시오. 강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하다오.”
나도 어차피 바람을 쐴 생각이었기에 그의 옆으로 향했다.
백송학이 술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상 환자시니 권하지는 않겠소.”
“예.”
내가 대꾸하자 백송학이 술병의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천천히 한 모금을 들이켰다.
술을 마실 때도 벌컥벌컥 들이켜는 사람들이 있고 천천히 음미하듯 들이켜는 사람들이 있다.
술이라는 게 일정 주량 이상 마시면 취하는 건 똑같으나, 왠지 전자는 취하고자 마시는 느낌을 주고, 후자는 마시다 보니 취하는 느낌을 준다.
사람마다 술을 어떻게 마시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닌데, 개인적으로 보기 좋은 모습은 저렇듯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모습이다. 이쪽이 술의 맛과 향 자체를 즐기는 느낌이다.
가뜩이나 백송학은 준수한 용모로 저렇게 마시니 품위도 있어 보이고 멋도 있어 보인다.
그에게 말했다.
“술 좋아하시나 봅니다.”
“음. 분위기 좋고 기분 좋을 때 적당히 마시는 걸 즐기는 편이오. 그런 때에 과음하지만 않으면 술이 때때로 약이 되기도 한다오. 그래서 약주라는 말이 있는 것이고.”
소요곡의 대사형쯤 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같은 말이라도 뭔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에게 대꾸했다.
“술고래들이 꼭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푸하하!”
백송학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술고래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많이 마시는 건 아니오.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송 공자도 한창 술 많이 마실 나이인 것 같은데.”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스스로 찾아서 마시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상황에 따라 수동적으로 마시는 편입니다.”
“아.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을 때?”
“예. 그래서 종종 마십니다. 제 주변이 술꾼들, 술고래들 천지거든요.”
백송학이 이번에도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잠시 전방을 바라보다가 백송학에게 말했다.
“연월이가 그러는데 사형제가 총 네 명이라고 하더군요. 백 선배님이 대사형이시고 연월이가 막내라고. 중간에 사형 한 분과 사자 한 분이 계시다고.”
“그렇소. 제자가 많은 것도 아니니 그냥 백 사형으로 부르라고 했는데도 사매들은 계속 대사형이라고 부르더구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그렇거니 하고 있소. 사제야 뭐, 사형이 나 하나뿐이니 그냥 사형이라고만 부르는 것이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송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원래 우리 대의 제자들은 나, 이사제, 삼사매로 끝이었소. 우리 세 명 사이에는 나이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소. 그러던 중에 한참 후에야 막내 사매가 들어오게 된 것이오. 몇 달간 외부에 출타하셨던 사부님이 예쁘장한 꼬마 소저를 대동한 채로 곡에 복귀하시더구려.”
“아.”
“포 사매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는 삼사매도 이미 십 대 중후반이었소. 우리는 이미 장성했을 때라, 다들 어린 포 사매를 매우 귀여워했소. 포 사매가 예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게 우리에게는 삶의 활력소였소.”
포연월을 향한 백송학의 애정이 남달라 보이던데, 저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성장해가는 포 사매의 모습을 보니 알겠더구려. 사부님께서 왜 그때 어린 포 사매를 굳이 데려와서 제자로 삼으셨는지. 포 사매의 자질과 오성이 우리보다 한 단계 위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백송학이 말을 이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성취가 쑥쑥 느는 포 사매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하다오. 그 때문에 우리도 더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소. 나중에 포 사매가 우리를 능가하게 된다 해도, 그때 적어도 그녀 앞에 부끄러운 사형, 사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오. 물론 그 덕분에 우리의 성취 속도가 빨라진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고.”
사형제들 간에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좋겠소.
내 사형제들은 개 같은 놈들, 아니 개만도 못한 놈들인데.
잠시 후에 백송학에게 물었다.
“백 선배님은 용무가 있어서 동부지맹으로 향하던 길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소.”
“중요한 용무입니까?”
“그렇지는 않소. 인사 차원이오.”
“음······, 제가 알기로 소요곡은 강호에 큰 환란이 닥친 경우가 아니면 강호와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연월이가 잠룡관에 입관한 것도 그렇고, 백 선배님께서 동부지맹에 인사차 들르시는 것도 그렇고, 교류의 의도가 다분히 있어 보이는데······.”
내 말에 백송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 공자의 말대로 교류 목적이오. 포 사매의 경우에는 더 넓은 세상을 제대로 경험하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잠룡관에 입관시킨 것이기도 하오. 아, 그리고 과거에 본 곡이 강호와 거의 교류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오.”
“아.”
“물론 본 곡의 선조님들이 평생 동안 내내 산속에만 계셨던 것은 아니셨소.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강호에 나가곤 하셨으니까.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제자를 구하는 목적의 방랑일 뿐이지, 강호행으로서의 의미는 아니었소. 그렇다 보니 과거의 본 곡은 강호의 주된 흐름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백 년 안에도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 강호잖소. 그렇듯 강호는 여러 사건들로 인해 급격하게 변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무학 또한 전체적으로 점점 발전해 가는데, 과거의 본 곡은 우리만이 최고라는 생각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던 것이오.”
백송학의 말이 이어졌다.
“사부님께서는 곡의 그러한 성향이 명맥의 단절을 불러왔다고 판단하셨고, 우리도 사부님의 뜻에 동의했던 것이오. 가뜩이나 현재의 본 곡은 과거처럼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오. 그런 만큼 이제는 우리도 강호와 좀 더 능동적으로 교류하며 주된 흐름에서 멀어지지 않기로 한 것이오.”
“그랬군요.”
“사부님께서는 지금쯤 본맹에 머물고 계실 것이오. 강호의 위험을 감지하고 나섰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시기상으로는 나쁘지 않게 되었구려. 마침 이렇듯 우리가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는 상황이니.”
기가 막히게 훌륭한 시점이기는 했다.
백송학이 없었더라면 지난밤에 우리 일행들 다수가 부리부리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소요곡주도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 포연월이나 백송학과 교류하며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불어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던 배는 다음 날 새벽녘에야 나루터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