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0
아까의 제갈수광은 상요지소에서 잠시만 휴식을 취한 후에 바로 출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데 이 대규모의 일행이 이곳에서 동부지맹까지 가려면 꼬박 하루 남짓은 달려야 한다. 단체로 경공을 펼칠 때는 경공이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제갈수광은 잠을 안 잔 채로 사나흘 동안이나 깨어 있는 셈이 된다.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도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시키면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급박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무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희들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제갈 교관님이 그렇게 무리하시는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장호산과 이세옥이 그런 식으로 말리자 결국 제갈수광도 두 교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점심 무렵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의 휴식 시간도 길어졌다.
제갈수광이 아예 자러 들어간 후에는 또다시 이세옥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기동타격조에서 같이 후열을 도맡았기에 전우라는 느낌도 더 강하다. 당시에 개인적인 대화들도 종종 나눴던 만큼 친밀감도 높다.
이세옥한테서 황보충, 악미조, 모용리 등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데 장우혜와 유은무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 교관님. 저는 동부지맹 잠룡관의 이 년 차인 유은무라고 합니다.”
“은무의 친구인 장우혜라고 합니다. 저도 이 년 차구요.”
“응, 안녕, 얘들아.”
이세옥이 두 소녀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자 유은무가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기동타격조에서 활동할 당시에 송 오라버니를 많이 챙겨주셨다고······.”
그 말에 이세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송 오라버니? 상당히 친한 모양이네?”
“하핫, 예. 저도 누이들이라고 부르며 지냅니다.”
이세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소녀에게 물었다.
“유겸이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일부러 인사하러 와 준 거야? 고마워라.”
“네. 인사도 드릴 겸, 용무도 말씀드릴 겸 해서요.”
“용무? 그래, 용무는 뭔데?”
이세옥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이번에는 장우혜가 대꾸했다.
“암기술 전문 교관님이시라고 들었어요. 송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다방면의 암기술에 능통하시다고······.”
“호홋. 타 지맹의 처음 보는 관도들한테서 그 얘기를 들으니 좀 쑥스럽네? 능통하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여러 종류의 암기들에 두루 숙련되어 있는 정도야. 그렇다 보니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암기들을 사용하며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거고.”
장우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실은 저희가 올해 초부터 암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송 오라버니가 잘하는 소비도술을 익히려고 했는데, 의외로 철비정술을 추천하더라구요. 이 교관님께서 여인들이 익히기에는 여러모로 철비정 쪽이 더 낫다고 하셨다면서.”
“응. 여러모로 그쪽이 더 유리한 면이 많다고 했지.”
“그래서 철비정술을 익히기 시작했고 길초량 선배님한테서 배우고 있거든요.”
“암기술마다 필요한 소질이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기본적으로는 잘 선택했다고 봐. 철비정을 다룰 줄 알면 차후에 더 큰 암기들을 다루기가 좀 더 쉽기도 하거든. 아무래도 더 큰 암기들은 철비정에 비해 무게중심을 잡기도 더 쉬우니까.”
“아하.”
두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세옥이 말을 이었다.
“교관도 훌륭하네. 초량이의 철비정술도 명품이거든. 기본기가 매우 탄탄하게 잘 잡혀 있는 데다가 실전 활용력도 좋아서.”
“네. 저희들도 감사하며 배우고 있어요. 그래도 이왕 암기술 전문 교관님을 뵙게 된 마당이니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찾아뵌 거예요.”
“와! 적극적인 아이들이네? 그래. 그러자. 점심때나 출발하게 돼서 마침 시간도 넉넉하니까.”
창고에 들러서 암기술 훈련 도구들을 챙긴 이세옥과 두 소녀가 뒷마당으로 향했다.
나도 그녀들을 따라 뒷마당으로 이동했다.
이세옥이 창고에서 챙겨온 나무 막대들을 땅바닥의 이곳저곳에 깊숙이 꽂았다. 나무 막대들의 꼭대기에는 조막만 한 목재 구체가 달려 있다. 소형 암기 수련용 훈련 도구들이다.
“너희들의 현재 실력부터 한번 확인해 볼까? 여기에서부터 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목표물을 향해 철비정을 던지는 거야. 당연히 정확성이 중요한데, 가능한 한 빠르게 이동하면서 맞추는 거야. 알았지?”
“네.”
“그래. 은무부터. 은무가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면 우혜도 알아서 시작하고.”
“네.”
곧 유은무가 출발점에 가서 서더니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소녀의 철비정 실력은 장원에서 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아직 한참 배우는 단계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도 쏠쏠하게 통했던 실력들이다.
그때 보니 철비정술에 한해서만큼은 유은무의 성취가 장우혜보다 더 높았다. 유은무는 이미 한 손으로 두 개씩의 철비정을 제법 정확하게 날릴 정도의 실력이다.
그러나 철비정의 정확도와 위력 면에서만큼은 역시 장우혜 쪽이 더 나아 보였다.
뭐라고 할까, 두 소녀는 똑같이 철비정술을 익히고 있지만 추구하는 방향성 자체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유은무의 철비정술은 견제와 엄호 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했다. 동료들과의 조직력을 중시하는 느낌이었다.
그에 반해 장우혜의 철비정술은 철저하게 살상과 타격을 우선시하는 느낌이었다. 결정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각자의 성격이 철비정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소녀의 철비정술을 살피기보다는 곁눈질로 이세옥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유은무가 달리며 철비정술을 펼치기 시작하자 이세옥의 표정에 금세 놀람이 담겼다.
그리고 그 놀람은 급속도로 커져 갔다.
이어서 장우혜가 나서자 이세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은무에 비해서 철비정술의 성취가 약간 낮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 얼굴에 다시금 큰 놀람이 담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철비정술 자체의 성취는 약간 낮은 편이나, 정확도와 은밀함과 위력 자체는 훨씬 더 뛰어나다는 점을 파악했을 것이다.
거기에 장우혜는 기본적인 속도 자체가 원체 빠른 애이기도 하다. 그 범상치 않은 속도 때문에라도 놀랄 수밖에 없다.
두 소녀가 우리 쪽으로 돌아오자 이세옥이 놀람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 철비정술 익히기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됐다면서? 그런데 어떻게 벌써 그런 실력들일 수가 있는 거야? 혹시 그 전에 기본 암기술 같은 거 따로 배운 적 있니?”
믿을 수 없다는 투다.
유은무가 대답했다.
“암기술은 어렸을 때 잠깐 기초 정도만 배우다가 도중에 그만뒀었어요. 너무 어려웠거든요. 암기를 다시 잡아 본 건 거의 십 년 만이에요.”
“저도.”
“하······!”
이세옥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여전히 놀람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더 놀란 건 두 사람의 무공 실력 때문이야. 이 년 차라면서 엄청난 실력들이던데? 둘 다 갑반인 거지?”
방금 전에 본인이 목격한 대로라면 당연히 갑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년 차에 갑반인 관도는 드물며, 그 정도면 손에 꼽히는 최우수 관도들이기도 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가 대단한 실력의 관도들임을 확인한 상황이라 더 놀란 기색이기도 하다.
유은무가 대답했다.
“아, 저희들은 계반이라서······.”
“뭐어어?”
이세옥이 목을 쭉 빼며 그렇게 대꾸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동부지맹 잠룡관의 계반은 뭐 하는 곳이야?”
그 어이없는 곳을 대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인지라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하······.”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세옥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이세옥이 두 소녀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재능과 무공 실력이 받쳐줘도 암기술을 일정 수준 이상 익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달 만에 그 정도 실력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너희들이 독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다는 증거겠지.”
역시 암기술 전문 교관다운 분석력이다.
“북부지맹, 동부지맹을 떠나서 나는 잠룡관의 교관이고 너희들은 관도야. 그리고 교관의 입장에서 너희들처럼 열심히 하는 관도들에게 기특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어디까지 발전할지가 많이 기대되기 때문이겠지.”
이세옥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도 며칠은 더 머물다가 우리 지맹으로 복귀하게 될 테니, 그 전까지는 너희들에게 특별 수업을 해줄게.”
유은무와 장우혜의 표정이 환해졌다.
“와! 감사합니닷!”
“감사합니다.”
두 소녀가 꾸벅 인사하더니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세옥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무공들을 익힌 아이들인데 저런 애들이 계반이라······. 어디 출신들일지가 궁금하네.”
알면 놀랄 만한 정체들이기는 하답니다.
잠시 후, 이세옥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총을 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쟤들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잠룡관의 계반에도 실력이 제법인 애들이 몇 명 들어왔더라. 하여튼 이상한 걸 유행시켜 가지구.”
“아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려줬다.
* * *
제갈수광은 오시 초(오전 11시) 무렵에 깨어났고, 우리는 이른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동부지맹을 향해 출발했다.
저녁때쯤에는 적당한 마을에서 일박을 했는데, 객잔에 머무르는 내내 동부지맹의 무인들은 경계 태세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미시 정(오후 2시)경에 동부지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부지맹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나자 동풍단 측에서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해 왔다.
동풍단은 동부지맹의 첩보 조직이다.
장원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연관된 모든 인원들을 상대로 상황 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모양이다.
큰 사건이기에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동풍단에서는 장원에서 벌어졌던 일과 도주 시에 벌어졌던 일을 구분해서 조사했다.
나는 모든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만큼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조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장원에서 있었던 일에 관련해서는 혼자서 따로 조사에 임했고, 도주 시의 전투에 관련해서는 백송학과 같이 조사에 임했다.
내 은잠술 실력이 굳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 그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는 잠시 기척을 감췄다고만 진술했다. 천둥번개가 치고 거센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기에 어설프나마 충분히 통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말도 보탰다.
백송학이 눈치껏 내 말에 맞춰주자 동풍단의 조사원들도 금세 납득하고 넘어갔다.
전체적으로 조사원들이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면밀한 파악을 위해 질문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러는 내내 우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들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대견스러워하는 기색들이라, 덕분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할 수 있는 만큼 내일 오전까지는 동부지맹에 머물러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에, 그날 우리는 동부지맹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 날 점심 식사 후에 동부지맹을 떠나 잠룡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갈수광과 장호산, 이세옥이 우리를 인솔했고, 백송학과 도예주는 동부지맹에 남았다.
잠룡관의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문 위사가 우리를 관주실로 이끌었다.
잠룡관주 육남춘과 총교관 노양홍도 걱정이 컸던지, 연신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우리의 부상 상태 등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위로와 칭찬을 잔뜩 들은 후에야 각자의 거처로 향할 수 있었다.
간만에 거처에 돌아와서 꼼꼼하게 청소를 하고 빨래와 정리정돈도 마쳤다.
여름이라 방문과 창문들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바람도 솔솔 불고, 참 좋다.
이런 때에는 으레 그렇듯 집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지금의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 식으로 반 각쯤 가만히 있다가 누운 채로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를 떠올렸다.
합숙 기간에 내가 창안했던 쾌류 무공들에 대한 일차적인 보완도 마무리했고, 단목세가 검법의 변형식 작업도 완료했다.
그런 만큼, 이제부터는 한동안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수정 작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이는 송유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승휴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연승휴는 본인의 가전 무예가 다시금 빛을 발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는 것으로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 넋을 기릴 생각이다.
이번에 장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송유하의 범상치 않은 잠재력뿐만 아니라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높은 가능성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수준 높은 무공임을 제대로 확인한 만큼, 공들여 수정하고 보완할 만한 가치 또한 충분하다.
그 작업을 잘 마무리하여 적절한 수련법까지 전수해 주고 나면, 차후에 혈교 문제로 내가 신경을 못 써주는 상황이 되어도 송유하가 알아서 잘 익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