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1
잠룡관에 도착한 당일 저녁.
열다섯 명의 인원이 제삼 교관 식당에 모였다.
청여홍의 장원에서 합숙을 했던 열네 명에 길초량이 추가된 인원 구성이다.
방학은 모레까지이며 글피가 개학일이다.
길초량과 소충광에게는 실질적인 마지막 방학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인데,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합숙 뒤풀이를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다.
일행들 모두가 합숙 수련에 열심이었고 합숙이 끝날 무렵에는 큰일을 겪기도 했다.
같이 고생하고 합심해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도 한 만큼, 다들 하고 싶은 얘기들도 많을 것이다.
참고로 이 인원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내게도 이번이 실질적인 마지막 방학이다.
그렇기에 나도 오늘은 즐겁게 먹고 마실 계획이다.
제삼 교관 식당에서 모이게 된 이유는 인원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갑반의 거처라도 열다섯 명이 모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지는 않다.
때문에 길초량과 소충광이 직접 제갈수광에게 부탁하여 장소를 섭외했다고 한다.
섣달 그믐날의 인원들이 처음으로 모였던 밤에도 제갈수광은 우리가 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줬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해서 제갈수광에게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봤는데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는 모양이다.
이런 쪽으로는 융통성이 많은 사람이다.
“이곳 제삼 교관 식당은 방학 기간 중에는 운영되지 않는다고 하오. 그래서 쉽게 허락해 주신 것이오. 조용히 마신 후 깨끗하게 정리하고 가라는 간단한 당부 정도가 있으셨소.”
모두가 공로를 치하하듯 소충광과 길초량을 향해 고생했다는 말들을 연발했다.
편안한 뒤풀이 자리라 다들 얼굴이 밝지만 특히나 표정이 환한 인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길초량, 소충광, 우문직이다.
긴말할 것도 없이 술고래들이 술을 앞에 두고 있기에 저런 표정들이다.
여자들 쪽에서는 두 명의 표정이 매우 환한데, 다름 아닌 유은무와 장우혜다.
두 소녀와 같이 제대로 술을 마셔 봤던 건 작년에 정가장에서 합숙할 당시였다.
그래서 알고 있다. 쟤들도 어마어마한 고래들이다.
쟤들은 평소에는 딱히 술을 찾거나 하지 않는데, 일단 술자리가 마련되면 끝장을 보는 성향이다.
길초량과 소충광이 뒤풀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여관도들이 바로 유은무와 장우혜라고 들었다.
술과 안줏거리는 몇 사람이 나가서 알아서 사 온 것이며, 몇몇 안줏거리는 저녁때 식당에서 챙겨온 것들이다.
덕분에 다 같이 모여 앉은 긴 식탁이 매우 풍성했다.
그 상태에서 우문직이 보따리 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좋은 술부터 한 잔씩 합시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 세가에서는 종종 제게 좋은 술을 몇 병씩 가져다주십니다. 그걸 모아 놓았던 겁니다. 여러분과 같이 마시고자. 하하.”
“오! 역시 우문 공자시오. 배우신 분이고 덕이 있는 분인 줄을 내가 일찍이 알아봤다오.”
소충광이 농담조로 그렇게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청여홍이 보따리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원래 장원에서 뒤풀이를 하며 제대로 대접해 드릴 계획이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아쉬워요. 참고로 제가 가져온 술들도 명주들이에요. 선물 받은 것들도 있고, 지점장님과 총관님이 선물용으로 쓰라며 갖다주신 것들도 있어요. 우문 공자님만큼 덕이 있지는 않지만, 저 또한 여러분들과 함께 마시려고 준비해왔어요.”
“그 무슨 말씀이시오. 그간 청 소저가 얼마나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해 줬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소. 모두가 청 소저에게 고마워하고 있소. 우리에게 있어 청 소저는 이미 덕 그 자체시오.”
소충광의 말에 모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직이 말했다.
“큰 위기에 처했던 우리가 결과적으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연주상단 남창지점에서 최선을 다해 주신 덕분이잖소. 보내주신 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악천후 속에서 계속 고생을 했을 것이오. 중상자들의 상태는 더 악화되고 우리의 부상도 더 심해졌겠지요.”
이번에도 모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충광이 말했다.
“자, 자. 첫 잔은 청 소저가 가져온 술로 건배합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청여홍의 좌우에 앉은 유은무와 장우혜가 이리저리 신속하게 술병을 전달했다.
이후에는 금세 모두의 잔들이 채워졌다.
소충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여름에 청 소저는 좋은 합숙 환경을 제공해 주셨고, 덕분에 모두가 수련에 몰두하여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소. 그런 만큼 첫 잔은 청 소저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건배합시다. 청 소저를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큰 소리는 내지 않은 채 짧고 강한 어조로 복창하더니 술을 들이켰다.
청여홍은 살짝 민망해하더니 결국 배시시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역시나 술고래인 길초량, 소충광, 우문직 등이 주도했다.
덕분에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먹고 마시는 중이다.
그 와중에 내 주시 대상은 네 명이다.
한 명은 심산화다.
아이가 술을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라 계속 시선이 갔는데, 많이 마시는 건 아니고 야금야금 마시고 있다.
애들이면 맛없어하며 표정이 좋지 않을 텐데 심산화는 야금야금 마시는 와중에도 표정이 좋다.
술맛을 아는 건가?
두 명은 유은무와 장우혜다.
역시나 거침없이 들이켜고 있다.
두 소녀는 길초량, 소충광, 우문직 등과의 호응도 좋아서, 같이 분위기를 주도하며 마시는 중이다.
마지막 한 명은 송유하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애라서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쟤는 오늘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다.
소리 없이 많이 먹고 소리 없이 많이 마시고 있다.
조용히 마셔서 그렇지, 마시는 양만 따지면 남자 술고래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강자가 바로 송유하이기도 하다.
작년 합숙 당시에 유은무와 장우혜도 송유하의 주량에는 혀를 내두른 바 있다.
각자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가운데, 내 대각선 앞에 앉은 소충광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 합숙은 정말이지 의미 깊은 시간이었소. 특히 송 공자와의 수련이 많은 도움이 되었소. 고맙소, 송 공자.”
그러자 내 옆옆 자리에 앉은 우문직도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소 공자와 같은 마음이오. 어쩌다가 그 후에 실전까지 치러보니 송 공자와의 수련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음을 절감할 수 있었소. 정말 고맙소.”
이에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꾸해줬다.
“하하. 그저 두 분과 이 대 일로 비무 한 번씩 해드리고 그 후에 간단한 감상을 말씀드렸던 정도에 불과하오. 게다가 두 분과의 수련은 내게도 도움이 되었소. 그러니 그런 말씀들 안 하셔도 되오.”
“아니. 그렇지 않잖소.”
소충광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우리와의 비무가 송 공자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번 합숙에서 송 공자는 수련에 있어 일방적으로 모두를 도와주기만 했잖소. 그래서 더 고맙다고 하는 것이오.”
우문직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다.
“나도 저 말씀들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단목강의 말이었다.
쑥스럽게 얘까지 왜 이래?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청여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두 동의해요.”
“당연히 저도.”
“저희들두요.”
이어진 두 개의 목소리는 단목지와 유은무의 목소리였다.
이쯤 되니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들이다.
얘들이 갑자기 떼로 왜 이래? 사람 민망하게.
“아하하······, 하하······.”
어색한 미소를 보인 후 즉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오.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여러분도 도움이 필요한 인원들의 수련을 열심히들 거드셨잖소. 그러니 나만 뭔가 대단히 수고하고 희생한 것처럼 여기실 필요 없소.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이니.”
내 말에 우문직이 대꾸했다.
“그것도 송 공자 때문이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소. 송 공자는 딱히 도움받는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모두를 도와주고 있는데, 송 공자의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염치가 있지.”
이대로라면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 것 같으니 대충 수긍해 주고 화제를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하하. 뭐, 그렇게들 생각해 주신다니 고맙소. 여러분의 마음은 잘 알았으니, 이제 건배하고 또 각자 즐겁게들 마시도록 합시다.”
내가 그 말과 함께 잔을 들자 다들 잔을 들더니 술을 비웠다.
소충광이 잔을 비우더니 내게 말했다.
“그래서인데 송 공자, 궁금한 게 있소.”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다.
아니, 뭐가 또 아직까지 진지한 건데?
“송 공자, 혹시······ 이번에 졸업할 계획이시오?”
갑작스럽게 정곡을 찔렸기에 나는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모든 인원들의 이목이 완전히 내게로 집중되어 버렸다.
“아하하,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대꾸하자 소충광이 말했다.
“상식적으로, 송 공자 정도 되는 실력에 뭘 더 배울 게 있다고 굳이 오 년 차, 육 년 차까지 잠룡관에 남겠소? 가뜩이나 잠룡관에 있으면 친목 목적으로 다가오는 관도들이 많아서 생활도 불편할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혼자 수련하는 게 백 배 낫지. 내가 송 공자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우문직이 말했다.
“우리 친우들끼리 만나면 송 공자 얘기를 많이 하오. 송 공자가 워낙 관심의 대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소. 다른 친우들과 얘기를 나눠 봐도 다들 소 공자처럼 예상하고 있소. 굳이 송 공자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을 뿐이지.”
우문직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합숙을 함께하며 송 공자의 분위기를 보니 이건 거의 확실하겠다 싶더구려. 부지런히 모두의 수련을 챙기는 모습이 마치 마지막 성심을 다해 주려는 기색이었다고 할까? 고마운 와중에도 그게 느껴졌었소.”
쓱 훑어보니 계반삼조의 아이들은 다소 놀란 표정인데, 그 외의 인원들은 모두 공감하는 표정이다.
나와 친분이 깊은 인원들인 만큼, 비슷한 예상들을 다들 한 번쯤은 해봤던 모양이다.
심지어 송유하마저도.
이쯤 되면 대충 둘러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모두를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참에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구려. 그렇소. 나는 사 년 차 이 학기를 끝으로 졸업할 생각이오.”
역시나 계반삼조원들만 놀란 표정일 뿐, 나머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다.
어쩔 수 없이 모두의 앞에서 이 발표를 하게 될 경우, 다들 이것보다는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러면 적절히 달래줄 계획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이 분위기, 마음에 든다.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
우문직이 내게 물었다.
“졸업 후의 계획은 어찌 되시오? 송가장으로 돌아가시나? 아니면 본맹이나 동부지맹 쪽에서 무림맹의 일을 하신다든가?”
이것도 얘기가 나온 김에 밝히는 게 나을 듯하다.
“둘 다 아니오. 이미 아는 분들도 계시는데, 나는 졸업과 동시에 가문에서 독립하오. 집안 어른들도 허락하셨고 이미 거처도 다 정해 뒀소.”
“오! 거처가 어딘지 말씀해 주실 수 있소?”
우문직이 그렇게 물었고, 바로 대꾸해줬다.
“여러분에게 왜 못 말씀드리겠소? 포양호 쪽이오. 파양 읍내의 북쪽이고. 다만 당분간은 여러분만 알고 계셨으면 하오. 내 거처를 만인에게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라. 하하.”
“오! 나중에 놀러 가도 되오?”
“당연한 말씀을.”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모두의 표정이 환해졌다.
“저, 저도 가도 됩니까? 헙! 죄, 죄송······.”
왕철양이 질문을 했다가 급격하게 사과의 말을 보탰다.
본인도 모르게 내심이 튀어나온 모양이다.
아직은 우리의 관계가 저런 걸 불쑥 물어봐도 될 정도의 관계는 아니라는 판단에 황급히 사과의 말을 보탠 것이다.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하여튼 소심해서는.
“철양아.”
“예? 예, 조, 조교님······.”
“당연히 와도 된다. 언제든.”
왕철양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금세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이에 나는 다른 조원들을 향해서도 말했다.
“물론 너희들도 마찬가지고.”
애들의 표정도 환해졌는데, 특히 심산화가 기뻐하고 있다.
참고로 왕철양과 심산화는 갈 데 없는 아이들이다.
이렇듯 인연이 엮였으니, 관대하고 부유한 이 몸께서 거둬 먹여주고 실컷 부려 먹······, 크흠! 흠!
소충광이 말했다.
“가만있자, 나는 졸업 후에 동부지맹에 지원할 계획인데, 이렇게 되면 그중에서도 남창지부 쪽으로 지원해야 하나?”
남창지부에서 포양호는 멀지 않으니 저 말을 하는 것이다.
놀러 오고 싶을 때 언제든 놀러 오겠다는 뜻으로.
“소 공자가 종종 찾아와 주시면 나도 덜 심심하고 좋겠구려.”
“발령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겠으나, 가능하면 초임 시절의 근무지는 남창지부 쪽으로 신청해 보겠소.”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쯤, 옆에서 단목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참고로 나도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소.”
그 말에 모두의 이목이 단목강에게 집중되었다.
단목강이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오 년 차인 나도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할 생각이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내가 졸업을 발표할 때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반응이다.
그 정도로 다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표인 것이다.
정상적인 학점을 모두 취득했다면 사 년 차 이상의 관도들은 학기 종료 후에 언제든 졸업할 수 있다. 즉, 오 년 차의 일 학기만 마치고 졸업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목강은 이 학기까지 마치고 졸업하겠다는 건데, 당연히 가능하다.
보아하니 단목지만 놀라지 않은 모습이다.
아마도 둘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되었던 내용인 모양이다.
단목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나는 송 공자가 포양호 근처에 거처를 얻어 독립한다는 계획을 몇 달 전에 이미 들었소. 그리고 나 또한 여러분처럼 송 공자가 사 년 차까지만 마치고 졸업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었소.”
단목강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 경우를 상정해서 미리 생각을 정리해 뒀었소. 송 공자가 사 년 차에 졸업하면 나도 오 년 차에 졸업하기로.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송 공자의 거처에서 하숙을 시작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