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7
표정을 보니 허죽신은 두 일대제자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고, 그 이유에 대해 납득하고 있는 듯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노부도, 현 곡주도, 본 곡의 다른 구성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왜 그렇습니까?”
“그 아이들은 내공 경지만 높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아서 즉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니라. 그 아이들은 무기술이나 체술 등 전투에 필요한 무공을 굳이 익히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익힌 건 심법뿐이다. 심법과 연단술을 통해 내공만 쌓았지. 죽은 그 두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곡 전체가 그런 식이며 노부도 마찬가지다. 내공 경지는 높아 보이겠지만 만약 너와 대결한다면 노부가 무조건 질 것이다.”
표정을 보니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의 정보를 통해 나도 청선곡에 대해 웬만큼은 알고 있다.
무림맹에 속해 있기는 해도 청선곡이 추구하는 바는 일반 강호 세력들과는 많이 다르다.
일반 강호 세력들이 무(武)를 추구한다면 청선곡은 도(道)를 추구하는 단체다. 여느 도가 문파들처럼 무도(武道)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청선곡은 선도(仙道)를 추구한다. 신선이 되고자 도를 닦는 게 선도다.
그리고 청선곡에서 선도를 추구하는 방식이 바로 약학과 연단술이다.
청선곡은 약학과 연단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더 나은 단약을 만들고, 그것들을 복용하며 양생(심신을 건강하게 하여 장수를 꾀함)을 추구한다.
건강하게 장수하며 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청선곡에서 무공을 익히는 목적도 기본적으로는 양생에 있다.
양생이 목적인 만큼 청선곡은 특히 심법 수련을 중시했으며, 실제로도 그들은 내공 면에서 강점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축기를 통해 모으는 공력에 연단술로 제조한 영약의 공력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청선곡은 고유 무공 자체는 그다지 대단할 게 없었음에도 내공의 힘으로 그 약점을 보완하곤 했다.
물론 청선곡의 구성원들이 양생만을 목적으로 무공을 익혔던 것은 아니다.
영약을 노리고 위협해 오는 적도들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당연히 있었다. 그렇기에 일정 수 이상의 제자들은 무공을 열심히 익힌다고 들었다.
한데 방금 허죽신이 내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내 표정에서 기색을 읽었는지 허죽신이 혼자서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무림맹의 질서 안에서 백도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다. 백도의 위세가 강한 지역들은 치안도 좋아서 위협 요소들이 없다시피 했지. 본 곡이 속해 있는 안휘 무림도 그런 지역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본 곡도 매우 오랫동안 안위를 염려하지 않고 지냈다. 가뜩이나 본 곡의 바로 옆에는 그 강력한 황산파가 자리 잡고 있으니 더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었지.”
황산의 남쪽 가까운 곳에 제운산이 있다.
청선곡이 위치한 곳이 바로 그 제운산인데, 그 일대가 황산파의 영향권이다.
황산파는 남궁세가와 더불어 안휘 무림을 대표하는 백도 세력이며, 나아가서 동부지맹을 대표하는 세력이다. 당장 현 동부지맹주 관필만이 황산파이기도 하다.
청선곡은 그런 황산파의 영향권 안에 위치해 있는 만큼 당연히 안전하고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 안전함에 너무 익숙해졌던 게다. 안전하고 평화롭다 보니 본 곡 특유의 성향이 과하게 작용하여, 이런 시기에 약학과 연단술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한 풍조가 몇 대에 걸쳐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이 지경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허죽신이 말을 이었다.
“본 곡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무공을 배우고자 입문하는 게 아니다. 무공을 배우고 싶었으면 애초에 다른 데에 갔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무공 초식을 반복 수련하는 것보다 수천 가지 약재의 이름과 효능을 외우는 게 더 즐거운 사람들이다. 무공을 익히는 건 우리에게는 매우 고역이다. 가뜩이나 여러 연구들이 적잖은 성과까지 내기 시작하자 무공 쪽은 더더욱 등한시하게 된 게지.”
저 얘기를 들으니 천마신교의 의마 장로와 환마 장로가 떠오른다.
그 둘은 해당 전문 분야에 탁월하여 장로가 된 사람들로, 무공 실력 자체는 썩 대단치 않았었다.
그럼에도 천마신교의 장로라는 지위와 체면이 있는 만큼, 무공 실력도 일정 이상은 갖춰야 한다는 게 사부님의 지론이셨다. 그 이유로 친히 그 두 장로들의 무공을 지도하곤 하셨다.
두 장로는 사부님 좀 말려 달라며 내게 자주 하소연을 했었다.
「오공자, 제발 부탁이오.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단 말이오.」
그 간절했던 표정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기에 허죽신의 저 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의 참사는 그러한 풍조가 매우 오래 이어져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일로 본 곡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지. 하지만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상대가 바로 그 혈교니까.”
허죽신이 바로 말을 이었다.
“본 곡은 혈교가 노리기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대항할 역량이 전무하다는 걸 다들 모를 리 없었지. 즉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근본적인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말씀은 그간 무공을 등한시했던 풍조를 바로잡겠다는 의미겠지요?”
“그렇지. 막막한 느낌도 있지만 우리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도 내공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수준으로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맞는 얘기다.
느지막이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이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 바로 내공 부분이다.
웬만한 다른 요소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한데, 내공 쪽만큼은 그게 어렵다. 공력이라는 건 영약이라도 복용하지 않는 이상 단기간에 확 느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데 청선곡의 인원들은 기본적으로 공력이 갖춰져 있다. 어설프게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갖춰져 있다.
이러면 당연히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다만 일대제자 이상은 나이가 있기에 이제 와서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한다고 해도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아래 세대를 지원하는 일에 치중하기로 했다. 그편이 전체를 위해서도 더 이롭다는 결론이지.”
그것도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이대제자들은 연령대가 이십 대 중반부터 십 대 초중반까지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 아직 십 대인 제자들 위주로 무공을 익히도록 했지. 문제는 어른인 우리도 본 곡의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탓에 아이들을 지도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무공 지도는 평소 친분이 깊은 황산파에 부탁했지.”
“아하.”
“그 덕에 몇 명의 제자들이 이미 속가제자의 형식으로 황산파에서 무공 지도를 받고 있다. 어차피 본 곡 고유의 무공은 심법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다른 무공을 배운다고 하여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지. 그리고 황산파에서 우리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무공사부 중 한 명이 바로 금무다.”
“금무라면······, 종금무 공자 말씀이십니까?”
내 물음에 허죽신이 대답 대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말했다.
“종금무 공자의 실력은 믿을 수 있습니다. 제자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지켜본 것만으로도 믿음직하더구나. 제자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데, 딱 봐도 움직임부터가 남다르다고 할까.”
종금무는 동부지맹 잠룡관을 대표하는 관도였으며 그만큼 실력도 출중했다. 기동타격조 당시에도 단목강과 추소륵에 살짝 못 미쳤을 뿐이다.
“금무가 우리 제자들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두 명 정도는 잠룡관에 입관시켜 보라고 제안하더구나. 그것도 일리가 있어 보여서 내년 일 학기에 입관시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계반이라면 당장 입관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계반의 경우에는 학기 중에 입관하는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다면서.”
종금무가 굳이 계반을 언급하면서까지 학기 중 입관을 추천했다고 하니 왠지 분위기가 싸하다.
“계반 얘기를 들으니 당연히 네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금무도 네 얘기를 하더구나. 계반 입관을 추천하는 이유도 네 존재 때문이라면서. 가뜩이나 지금도 너는 조교로서 몇몇 계반 관도들의 수련을 지도하고 있다면서.”
“아하, 종 공자가······.”
제길, 그놈이 쓸데없는 얘기를 했던 것이군.
“그래서 내친김에 학기 중 입관을 상담하기 위해 노 장로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 계반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아, 내가 말한 노 장로란 노양홍 총교관이다.”
총교관 노양홍은 황산파의 장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미리 거절 의사를 밝혀두는 게 좋을 듯하다.
지금 지도하고 있는 떨거지들만으로도 충분히 귀찮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 써야 할 떨거지들을 더 늘리고 싶지 않다.
난감함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죽신에게 말했다.
“곡주님. 참으로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현재 맡고 있는 관도들을 지도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버겁습니다. 지금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입니다. 여기에서 추가로 누군가를 더 지도하는 건 무리입니다.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음······.”
침음을 삼키고는 있는데 쉽게 포기할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서 바로 말을 보탰다.
“그리고 아직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이번 학기를 끝으로 잠룡관을 졸업할 계획입니다. 넉 달 후면 졸업인 만큼, 혹여 그 제자분들과 인연이 닿는다 해도 유의미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 노부는 네게 제안을 하러 온 것이다. 일방적으로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닌 만큼, 내 제안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려주고 싶구나.”
“아하하······ 좋은 제안을 하셔도 제가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대꾸해 줬지만 허죽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인이 메고 왔던 행낭 안을 뒤적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행낭에서 꺼낸 건 넓적한 나무 상자였다.
그가 나무 상자를 서탁 위에 올려놓더니 조심스럽게 뚜껑 부분을 열었다.
열린 나무 상자 안에는 작은 목갑들이 다섯 칸씩 네 줄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작은 목갑들은 내가 작년에 복용하면서 봤던, 개별 포장된 청심단의 목갑들이다.
전해지는 향 또한 저것들이 청심단임을 증명하고 있다.
“네게는 이게 양생단이 아니라 영약이지. 네 개에 일 년 공력이라 했으니 이걸 다 복용하면 오 년 공력이겠구나.”
실제로는 십 년 공력이다.
게다가 작년에 복용할 때는 일류 시절이었다. 지금은 절정이다. 당연히 약 기운을 흡수하는 효율도 약간이나마 증가했다. 저걸 다 복용하면 십 년 공력을 넘어 십일 년, 십이 년 공력이 더해질 가능성이 높다.
회회심공의 축기 효율이 크게 증가하긴 했으나, 그래도 축기로 저 공력을 모으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탐난다.
“아하하······, 이미 말씀드렸듯 저는 넉 달 후에 졸업하는 입장이기도 하여······.”
나는 제대로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놀라서였다.
내가 대꾸하는 와중에 허죽신이 말없이 행낭에서 또 하나의 넓적한 나무 상자를 꺼냈기 때문이다.
허죽신은 그것마저도 서탁 위에 올려놓고 상자의 뚜껑을 한 차례 열어 보이기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는 방금 전에 봤던 상자의 내부 모습과 똑같은,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청심단 스무 개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두 명이니 당연히 수업료도 두 배여야겠지.”
이러면 총합 사십 개다.
세상에, 사십 개면 공력이 얼마야?
허죽신의 입장에서는 십 년 공력을 예상하고 저걸 내밀고 있을 테지만 실제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공력은 최소한이 그 두 배다.
허죽신이 수업료 얘기를 했으니 말인데, 실제 양생단으로서의 가치로 환산해도 저 정도면 대단히 비싼 수업료다.
청심단은 양생단 중 최고로 통하는 만큼 원래 귀하고 비싼 약이기 때문이다.
허죽신이 나와 시선을 맞춘 채로 말했다.
“금무가 그러더구나. 너는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지만 합리적이며,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마치고는 씩 웃고 있다.
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해줬다.
“생각해보니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곡주님.”
“푸헐헐헐헐!”
허죽신이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나도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