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8
허죽신이 행낭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하게도 사십 개의 청심단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 두 개는 서탁 위에 그대로 둔 채였다.
배웅해 주기 위해 나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참.”
방문 앞에 다다른 허죽신이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금 행낭을 열고 그 안을 뒤적거렸다.
이후에 그가 꺼내 든 건 하나의 보자기였다.
보자기는 성인 사내의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다.
허죽신이 그걸 내게 내밀며 말했다.
“네 누이에게 주거라.”
“이게······, 뭡니까?”
“아까 훌륭한 차를 대접해 준 데 대한 보답이다. 분쇄된 약재인데, 그 정도면 구 등분으로 소분해서 이틀에 한 번씩 잘 우려 마시면 될 게다. 마신 후에는 다섯 차례쯤 운기조식을 취하라고 전하고.”
“어떤 효능이 있습니까?”
“약간의 공력 상승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헛! 그런 귀한 걸······.”
내가 놀란 표정으로 대꾸하자 허죽신이 말했다.
“헐헐. 공력 상승의 효과가 있다고 하니 무슨 영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그다지 귀하지 않은 약재들 십여 종류를 섞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약재들도 잘 조합하면 의외의 효능들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거거든.”
약학과 연단술의 대가다운 권위가 느껴진다.
“물론 기본적으로 대단치는 않은 약재들인 만큼 큰 효능을 기대할 것은 아니다. 그래도 소소한 도움 정도는 될 게야.”
“감사합니다, 곡주님. 누이도 감사해할 겁니다.”
“감사는 무슨. 흔한 약재들이니 너무 호들갑들 떨 필요 없느니라.”
허죽신이 그 말을 끝으로 거처를 나섰고, 나는 사립문 앞까지 그를 배웅했다.
* * *
잠룡대전 첫날의 이런저런 소식은 저녁 구보 중에 송유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소충광과 우문직, 장우혜 모두 매우 무난하게 일회전을 통과했다고 한다.
“아, 그리고 단목홍신 공자도 지역 예선에 참가했더라구요.”
“오, 그래?”
“네. 일회전도 무난하게 통과했구요.”
새벽 구보 때마다 마주치는 이가 단목홍신이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단련해 왔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실력 또한 충분히 진출권을 노려봄직한 실력이다.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지만, 혹여 다소 아쉬운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사 년 차인 만큼, 오 년 차와 육 년 차라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구보를 마치고 거처에 돌아온 후, 아까 허죽신에게서 받았던 약재를 송유하에게 전해 줬다.
허죽신한테서 들었던 복용법과 효능에 대해 얘기해 주자 당연하게도 송유하는 크게 놀랐다.
“겨우 차 한잔 대접해 드린 것으로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은근히 좋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얘도 이제는 확실히 무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씻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후 서탁 앞에 앉아서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수정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해시 초(밤 9시)가 되기 전에 유등을 껐다.
평소에 비하면 약간 이른 시간이다.
어둠 속에서 벽장에 넣어 뒀던 청심단 상자 두 개를 모두 꺼내 서탁에 포개어 놓았다.
이후에는 상자의 뚜껑을 연 후, 목갑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안에서 청심단을 꺼내어 곧장 복용했다.
작년 이맘때에도 겪어 봤던 익숙한 약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배 속에서 약 기운이 퍼지기 시작할 즈음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청심단 하나의 약효를 모두 흡수하고는 운기조식을 멈췄다.
하나의 약 기운을 완전히 흡수하기까지는 네 차례의 운기조식이 필요했다. 작년에도 그랬었다.
하지만 운기 속도가 그때와는 크게 다르다.
회회심공의 운기 속도에 천섬무의 묘리가 적용된 후부터는 운기 속도가 빨라졌었다.
요즘은 그 현상이 시작되었던 초창기보다 그 속도가 더 빨라진 상태다. 초창기에 비하면 천섬무도, 회회심공도, 모두 성취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비해 공력을 흡수하는 효율이 증가한 느낌도 든다.
아직은 하나만 복용한 상태이기에 효율이 얼마나 상승했는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효율이 상승했음을 분명히 느낄 정도는 된다.
작년과의 차이점을 대강이나마 파악한 만큼, 나는 본격적으로 청심단을 복용해가며 운기조식을 취했다.
두세 개씩 한 번에 복용하지 않고 하나씩 복용했다. 귀찮더라도 이렇게 해야 약효를 최대한으로 흡수할 수가 있다.
나는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청심단 마흔 개를 모두 복용할 계획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운기 속도를 더 빠르게 하는 수련도 겸하면서.
서른한 개를 복용했을 때쯤에 보니 이미 새벽이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는 있으나, 굳이 그러지 않은 채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곧 송유하가 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반각이 지나지 않아 송유하가 왔다.
“오늘 아침나절에는 간만에 심법 수련에 몰두할 계획이야. 아침 구보는 혼자 하도록 해.”
이후에는 바로 다시 운기에 돌입했다.
마흔 개의 청심단을 모두 복용했다.
운기를 모두 마친 후 환기를 위해 방문을 열어 보니 시간은 이미 사시 초(오전 9시)를 넘은 듯했다.
나무 상자와 목갑을 대충 정리하여 다시금 벽장에 넣고는 그대로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아!”
입에서 절로 기분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밤을 완전히 새웠는데도 딱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면에서는 충만한 힘이 느껴지고 있다.
작년에는 열 개의 청심단을 통해 오 년 남짓의 공력을 얻었었다. 오 년 공력을 살짝 넘는 공력이었다.
이번에 마흔 개의 청심단을 통해 내가 얻은 공력은 이십삼 년 공력이다.
회회심공이 약기운을 흡수하는 효율이 작년에 비해 증가한 덕분이다.
참고로 이 몸의 공력을 단번에 가장 많이 상승시켜 줬던 건 백년음양선과다. 당시에 과실 자체로만 이십오 년 공력을 얻었었다.
그러니 내가 밤새 얻은 이십삼 년 공력이 얼마나 큰 건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이 뜻밖의 기연은 공짜가 아니다.
수업료인 만큼 청선곡의 떨거지들 두 명을 맡아야 한다.
사실 귀찮아서 떨거지들을 더 이상 늘리지 않고 싶었을 뿐이지, 애초에 어려울 것은 없는 사안이었다.
내게는 쾌류 무공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생해서 만들어 놓았으니 활용하고 또 활용하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절정에서의 성취 속도에는 자신이 있었으며, 실제로도 경지가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절정은 깨달음이라는 측면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만큼, 한 번 그 길을 가 봤던 내 입장에서는 발전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최근의 내 경지는 절정의 초중반을 지나 막 중반으로 향하던 상황이었다.
그 상태에서 이번에 이십삼 년 공력이 더해진 것이다.
덕분에 절정의 중반을 넘어버렸다.
이 정도면 전생에 도달했었던 경지와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설렌다.
이제부터는 경지의 측면에서는 전생에도 못 디뎌 봤던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되기 때문이다.
뿌듯함도 느낀다.
처음에 깨어났을 당시에 이 몸의 무공 경지는 삼류였다. 그냥 삼류도 아니고 제대로 삼류였다.
그 상태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전생의 경지를 회복한 마당이다.
이러니 어찌 안 뿌듯하겠는가.
좋은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피곤한 건 아니지만 이왕 휴식을 취할 거라면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 * *
눈을 뜨니 정오 무렵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서탁에 앉아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에 대한 수정, 보완 작업을 계속했다.
신시 정(오후 4시)쯤 제갈수광이 찾아왔다.
“괜찮다면 그전에 말했던 수련, 지금 하러 가지.”
즉시 그를 따라나섰다.
거처를 벗어나서 몇 걸음을 걸었을 때쯤, 제갈수광이 눈매를 좁힌 채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송유겸 너······.”
제갈수광은 고수인 데다가 나와 매우 가까운 사이다. 그런 만큼, 그가 왜 저러는지 내가 모를 리 없다.
이십 년 넘는 공력이 갑자기 더해진 건 큰 변화다.
물론 회회심공은 밖으로 경지를 잘 드러내지 않기에 내게 그 많은 공력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그래도 분위기 변화를 눈치채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분위기가 변한 이유는 빤한 것이고.
“아하하, 여유로워진 김에 어제는 하루 종일 운기조식에 몰두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던지라······.”
나는 어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단목강과 허죽신, 송유하가 들렀던 게 전부였다.
혼자 있던 시간에 내가 뭘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그냥 대충 둘러댄 것이다.
“하······!”
놀람 가득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던 제갈수광이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이런 괴물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제갈수광이 말했다.
“수련은 비무 형식으로 진행할 거다.”
“예.”
“그리고 네 그 속도 말인데, 내가 따라가기 버거운 수준으로 운용해 줄 수 있나?”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무를 진행하다 보면 금방 맞춰갈 수 있겠지요. 다만, 교관님 정도 되는 분이 따라오기 버거울 정도의 수준이면 매우 빠른 속도일 텐데, 그러면 아마도 공력이 빠르게 녹을 겁니다.”
“그 경우에는 비무를 오래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군.”
“예.”
내가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말했다.
“우리 수준에 비무 시간의 길고 짧음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
나도 동의하는 바이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왕 하는 수련, 약간의 부상 정도는 감안한다는 각오로 치열하게 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 다칠까 염려하지 말고 과감하게 들어와도 된다. 공력 소모돼서 더 이상 속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얘기하고.”
“알겠습니다.”
실내 연무장에 도착하여 제갈수광과 마주하고 섰다.
그는 쌍검을 뽑아 쥐었고, 나는 오른손에는 비룡검을 쥐고 왼손에는 소비도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제갈수광이 쌍검을 쥔 채로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상대인 내 입장에서는 마치 단단한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제갈수광은 지난 여름방학 기간에 경지가 상승했었다.
그전까지는 절정의 중후반이었는데 이번에 절정의 후반으로 상승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단단하고 빈틈이 없는 느낌이다.
한동안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제갈수광이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네 녀석과 이렇듯 마주 서 보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군. 이런 게 잠룡관도라니. 후!”
마지막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까지 터트렸다.
내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시작하지.”
나는 일단 천섬무를 중상 단계로 운용하며 제갈수광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우리는 눈 깜짝할 새 오 합을 주고받았는데, 그러자마자 나는 즉시 천섬무의 운용 단계를 상 단계로 올렸다.
애초에 중상 단계의 속도가 통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상 단계로 바로 가기가 애매한 듯하여 일단은 중상 단계로 시작했던 것뿐이다.
속도를 상 단계로 올리자 제갈수광이 쌍검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방어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일단은 방어를 하면서 내 속도에 적응하려는 것인데, 버거워하고 있다.
예상대로이며, 이게 바로 그가 바라던 상황이다.
참고로 나 또한 그가 쌍검술로 맹렬하게 펼쳐내는 방어식을 내 검술로 상대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내 검술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건 내가 바라던 상황이기도 하다.
나는 천섬무를 꾸준히 상 단계로 운용하며 검술을 펼쳤고, 제갈수광은 그런 내 공격을 부지런히 방어했다.
그 속에서 나는 매우 오랜만에, 원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