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67
심심해서 우벽희에게 대화를 걸었다.
전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하는 태도만 봐도 그녀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신룡대나 흑풍대 같은 최정예 무력 조직에서의 생활은 여러모로 고되고 힘들다.
그 고단한 삶을 온전한 정신으로 견뎌내려면 마음가짐부터가 남달라야 하는데, 매사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상황들이 너무도 많다.
대화를 나눠 보니 우벽희는 신룡대 생활을 잘할 것 같다. 저 정도면 거의 체질이다.
게다가 우벽희가 특히 은잠술 실력이 빼어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건 정예 기밀 조직에서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재능이다.
아직 연차가 적기는 하지만, 저런 잠재력에 저런 성격이면 앞으로 신룡대에서 크게 쓰일 것이다.
미래에는 길초량과 우벽희가 나란히 신룡대의 조장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우벽희와 전음을 나누는 중에, 멀리에서 경공을 펼치며 이동하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척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남궁설과 우벽희의 수준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먼 거리다.
이전 같았으면 나도 멀리에 있는 저 기척들을 이렇게까지 빨리 알아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허죽신 덕분에 내공이 크게 상승하여 회회심공의 성취도 상승했는데, 그로 인해 내 기감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덕분이다.
물론 절정의 경지에서는 내공이 크게 늘었다고 해서 무조건 성취가 상승하는 건 아니다. 내 경우에는 그만한 깨달음이 받쳐 주고 있는 상황에서 내공이 크게 늘었기에 성취도 충분히 상승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얼추 이쪽이라는 점이다.
이 동굴을 향해 오는 길일 수도 있고, 그냥 이 근처를 지나가는 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주의해야 할 상황이다.
우선 그 기척들을 차분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는 만큼, 곧장 우벽희에게 전음을 보내어 대화를 중단시켰다.
[쉿.]
맥락도 없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을 테지만, 우벽희라면 내가 괜히 이럴 리 없다는 걸 금세 파악할 것이다.
이후에는 곧바로 남궁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설 매, 몇 개의 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 은잠술 유지에 더욱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
[네, 그럴게요.]
이후부터는 이쪽으로 오고 있는 기척들에만 집중했다.
기척들을 알아챈 초반에는 이동 중인 자들의 인원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리가 먼 데다가 기척들이 제법 은밀한 탓이었다.
그러나 단체로 경공을 펼치는 속도가 빠른 것만 봐도 저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기척에 계속 집중하며, 나는 목갑에서 독침들을 꺼내어 왼손의 손가락들 사이에 끼웠다.
저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해도 은신한 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는 하나,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미리 대비해 둘 필요는 있다.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인원수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총 열한 명이다.
그 열한 명이 한 줄로 경공을 펼치는 중이다.
잠시 후에는 기운의 성질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자와 두 번째에서 달리고 있는 자의 기운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 왔던 혈교 놈들의 기운이었다.
한데 세 번째에서 달리고 있는 자의 기운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는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혈교의 기운이 이어지겠거니 여겼는데, 의외로 다른 종류의 기운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운들의 성질에 대해서는 굳이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게는 매우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운 기운, 즉 천마신교의 심법으로 인해 발산되는 기운들이었던 것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들인 만큼, 기운이 발산되는 성질만으로도 저들이 익힌 심법마저 추측할 수 있다.
놈들이 익힌 심법은 일월합천공(日月合天功)과 마령진결(魔靈眞訣)이다.
두 심법은 천마신교 내에서 최고급으로 통하는 심법들로, 최정예 무력 조직에 속한 이들만 익힐 수가 있다.
천마신교의 정예로 통하는 삼단이대(三團二隊) 중에서도 흑풍대, 수라단, 혈영대는 최정예로 분류되는데, 저 심법들은 그 세 조직 안에 들어가야만 익힐 수 있는 것들이다.
즉, 저놈들은 모두 천마신교의 최정예 무력 조직에 속해 있는 놈들이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파악을 이어가다가 행렬의 아홉 번째에 위치한 기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내 기감을 강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함을 넘어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기운이었기 때문이고, 저 기운의 주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조중렴의 기운이다.
내 넷째 사형이었던 바로 그놈의 기운인 것이다.
확실하다.
확실한데도 섣불리 믿어지지 않는다.
너무 많이 놀란 나머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차례나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야 했다.
물론 사부님의 복수를 해야 하는 이상 놈과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만날 운명이긴 했다.
한데 그게 지금일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몸이 서서히 떨려오고 있다.
조중렴 놈이 무서워서 떨리는 게 아니다.
흥분되기 시작하여 떨리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면 천마신교와 혈교가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대로 확인된 셈이다.
정상적인 천마라면 혈교와는 절대 교류하지 않았을 텐데, 미친 위지광 새끼는 기어이 혈교와 교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이 선대 교주님들과 선배들의 혼에 이렇듯 간단하게 먹칠을 해 버릴 줄이야.
이유는 대강이나마 짐작이 간다.
전대 천마였던 사부님과 여러 면에서 너무 많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 탓에, 위지광 놈의 교내 지도력과 장악력은 아직까지 약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천마신교의 외부에도 조력자를 만들어 둘 계획으로 교류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존심 강한 위지광 놈은 본인이 충분히 혈교를 제어하며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혈교 놈들도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지금은 천마신교의 힘이 강력하기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뒤에서는 뒤통수칠 준비를 하고 있을 놈들이 바로 혈교 놈들이다.
물론 혈교가 언젠가 천마신교의 뒤통수를 치게 되더라도 그건 나중의 일일 것이다. 지금은 혈교의 입장에서도 천마신교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천마신교와 혈교가 힘을 합할 가능성이 커진 만큼, 그 기간 동안 백도는 힘든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
놈들이 점점 다가올수록 더 많은 사항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조중렴과 함께하고 있는 천마신교의 인원들은 흑풍대나 혈영대는 아니다. 흑풍대나 혈영대였다면 경공을 펼치는 상황에서도 기본적으로 저들보다 훨씬 더 은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수라단이다.
흑풍대가 각종 기밀 임무와 특수전에 특화된 최정예 무력 조직이라면, 수라단은 전면전에 특화된 최정예 무력 편제다. 상대적으로 흑풍대는 소수고 수라단은 다수다.
수라단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수라단주 전호척이 떠오른다.
내 천마신교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전호척도 있었다. 그도 당시의 천인공노할 짓에 동참했던 쓰레기들 중 한 놈이다.
참고로 현재 저 일행 중에 전호척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초고수는 없다.
수라단의 무인들이 투입된 이유는 아마도 조중렴을 호위하기 위함일 텐데, 저들은 수라단 한 개 조의 반도 안 되는 인원수다.
한 조 전체가 움직이면 이목이 끌리기 쉬우니, 해당 조에서 정예들만 차출하여 소수로만 호위 전력을 구성한 모양이다.
수라단원들 여덟 명의 전체적인 경지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 그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섯 명이 절정고수고 세 명이 일류고수인데, 절정고수들의 성취는 세 명이 초반, 한 명이 초중반, 한 명이 중반 남짓으로 보인다. 절정의 중반을 넘었으면 수라단에서 조장급이다.
세 명의 일류고수는 모두가 일류의 후반쯤이다.
지금껏 내가 상대해 왔던 사파나 혈교의 절정고수들은 다수가 무늬만 절정고수인 자들이었지만, 수라단의 절정고수들은 실전 실력의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진짜배기들이다.
조중렴 놈의 성취는 거의 절정의 중반에 가까워 보인다.
의외다.
내 마지막 기억에 놈의 경지는 갓 절정 수준이었다.
그 당시로부터 만으로 이 년이 흐르는 동안 성취가 상당히 크게 상승한 것이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성취다.
조중렴 저놈이 그동안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조중렴 놈이 그 정도는 아니다.
우리 사형제 중에서 자질도 가장 부족하고 노력도 가장 덜 했던 놈이 바로 조중렴이다.
내 사형제였기에 내가 잘 안다.
하면 다른 가능성은 하나다.
절정의 경지에서는 깨달음이 중요하긴 하나, 영약을 퍼부으면 성취 자체는 억지로라도 조금씩이나마 상승시킬 수가 있다.
투자 대비 효율이 매우 낮을 뿐이다. 영약이라는 게 너무 귀하기에 그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도 어렵다.
하지만 천마의 자리에 오른 위지광 놈이 천마비고를 열어서 사제들에게 영약을 뿌렸다면 어떨까?
그 경우라면 조중렴의 저러한 성취 상승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부님이 병상에 계신 동안 모인 영약도 적지 않았을 테니까.
위지광 놈의 입장에서는 공범들의 입단속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영약을 일정 부분 나눠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욕심도 많은 놈이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싶다.
사제들을 죽여서 입막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선두에서 신법을 펼치고 있는 혈교 놈들 두 놈은 절정의 초반 수준이다.
보아하니 그 두 놈은 조중렴과 수라단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인 듯하다.
마침 조중렴이 이곳 거점에 머무르고 있던 차에 백도에서 토벌 작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자 안전한 퇴로 쪽으로 안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동 방향을 볼 때, 놈들의 경로는 우리가 있는 동굴 입구의 근처를 지나쳐가는 경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곳을 벗어나 조중렴 놈을 추적할 계획이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벽희와 남궁설은 이곳에 남겨두고 혼자 갈 것이다.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놈들 모두가 순간적으로 이동을 멈추며 빠르게 기척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수라단의 조장과 조중렴 놈이 상당한 고수이다 보니, 저 거리에서도 이쪽 동굴 입구에 경비조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다.
놈들이 기척을 죽인 채로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넓게 돌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데, 이곳과 가까워지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저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놈들이 우리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나는 곧바로 우벽희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들 중에 매우 신경 쓰이는 기척이 있소. 나 혼자 은밀히 뒤따라가서 조사한 후에 복귀할 터이니, 우 소저는 설 매와 함께 지금 그 자리에서 계속 은신하고 있으시오. 혹여 내가 돌아오기 전에 특수작전조원들이 동굴 밖으로 나오거든, 나는 알아서 합류할 터이니 기다리지 말고 본래의 임무를 속개하라고 전해 주시오.]
전음을 들은 우벽희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채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적진에서 단독으로 움직이겠다고 하고 있으니 당연히 염려될 것이다.
이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바로 옆에서 은잠술을 펼쳐 봤으니 내 은잠술 조예가 얼마나 깊은지도 잘 봤을 것 아니오? 혹여 위험해지면 곧바로 죽은 듯 숨어 있다가 이동하곤 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
그제야 우벽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는 남궁설에게도 전음을 보내어 똑같은 내용을 전했다.
남궁설은 우벽희와 달리,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하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이에 나는 남궁설과 우벽희를 향해 차례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은신하고 있던 지점에서 조용히 벗어났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조중렴 일행의 뒤를 은밀히 따라갔다.
놈들은 한동안 기척을 죽인 채로 천천히 이동하다가, 어느 정도 시점부터는 다시금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심해야 할 지역을 벗어났다는 판단에서 저러는 것이다.
놈들은 곧 서쪽 산지의 다른 골짜기로 들어섰다.
내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골짜기의 옆 옆 골짜기다.
아까 있던 곳이 중앙의 봉우리를 기준으로 서쪽이었다면 이곳은 서북서 방향이다.
놈들이 이내 골짜기의 좁은 산길을 구불구불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따라 올라가면서 보니 이쪽 골짜기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기암괴석들이 즐비했다.
완만한 산자락 지대를 지나서 계속 올라가다가 경사가 급해지던 무렵, 놈들이 갑자기 주변을 살피더니 산길을 벗어나 계곡 물줄기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안력을 돋워 살펴보니, 큰 바위들이 이리저리 자리 잡은 계곡의 한 지점에 제법 넓은 웅덩이가 보였다.
몸을 낮추며 이동하던 놈들이 웅덩이 바로 옆의 커다란 바위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저놈들이 뭘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두 놈이 소리 내지 않은 채 하체부터 조용히 웅덩이 안으로 입수하는 게 보였다.
다름 아닌, 안내 역할을 하던 혈교의 절정고수 두 놈이다.
이윽고 입수한 두 놈의 상체도 수면 아래로 사라지더니 이내 머리들도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잠수한 것이다.
그러자 뒤를 이어 수라단 놈들이 차례로 혈교 놈들처럼 입수하며 잠수했다. 참고로 조중렴 놈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로 입수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식으로 모두가 입수하여 잠수했는데, 잠시 기다려 봐도 다시 밖으로 나오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후, 이것들 봐라?
나도 잠룡관에서 계곡의 물웅덩이를 통해 연승휴의 동굴에 드나드는 사람인 만큼, 저게 뭘 의미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