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289화 (289/416)

내 안에 마교있다 289

저 어리고 예쁜 것의 공포에 찬 신음과 비명을 듣고 있자니 너무 안쓰럽다.

당장에라도 수라강령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기다리다가, 일각이 되기 전에 옹달샘에서 가죽 물주머니를 채웠다.

그러고는 일각을 꽉 채운 시점에 남궁설에게 걸었던 수라강령의 수법을 풀었다.

“으어어어어……! 으악!”

공포에 질려 신음을 흘리던 남궁설이 비명을 지르며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헉, 헉, 허억, 헉…….”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피부의 보이는 곳마다 식은땀이 가득하다.

남궁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고, 나는 가만히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적어도 춘약 기운에 의해 정신이 지배당하는 상태는 아닌 듯하다.

아직 공포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남궁설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를 악물고 춘약 기운을 버텨내던 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참고로 남궁설은 그 춘약 기운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예상했었고 또한 각오했었다.

한데 이렇듯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니 의아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죽 물주머니의 마개를 따서 말없이 남궁설에게 건넸다.

남궁설이 거칠게 호흡하는 중에도 가죽 물주머니를 받아 들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많이 말랐던 모양이다.

물을 마신 후에도 남궁설의 호흡은 거칠었다.

그녀의 호흡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말했다.

“악몽 꾸고 나서 정신이 없을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매우 의아하겠지. 그래도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키고 운기조식을 취하라고 권하고 싶어. 설 매의 체내에는 아직 내단의 기운이 적잖이 남아 있을 거거든.”

한기를 치료하고 남은 내단의 기운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기운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흡수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자심행과 덕분에 남궁설은 현재 일류의 후반이다. 그러니 내단의 기운을 흡수하면 절정에 근접할 수도 있다.

내단의 기운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가 관건인데, 시간의 흐름에 의한 자연 손실량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남궁설이 수라강령에 걸려 있던 시간은 일각쯤이며, 내가 점혈하기 시작했던 시간까지 합해도 일다경 내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꾸하지 않은 채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부좌를 틀고 곧장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의외다. 궁금한 게 많을 테니 뭐 하나라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냥 운기조식을 시작할 줄이야.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운기조식을 취하는 남궁설을 조용히 지켜봐 줬다.

제대로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그녀는 운기조식과 운기조식의 사이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호흡만 정돈한 후에 바로 다시 운기조식을 이어갈 뿐이었다.

남궁설의 운기조식은 두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내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운기조식이 이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내단의 기운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두 시진하고도 일각 가량이 흘렀을 때쯤, 운기조식 중인 남궁설의 기운이 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요하고 일정한 느낌을 주던 기운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활발해진 기운은 점점 세찬 느낌까지 더해갔다.

심상치 않은 현상인 만큼 즉시 기감에 집중했다.

남궁설의 기운이 계속해서 활발해지는 가운데, 이제는 자연의 기운마저 그녀라는 한 점을 향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전생에도 한 번, 현생에도 한 번, 총 두 번이나 이 현상을 겪어 봤기에 더 확실히 알고 있다.

저건 절정에 오르는 순간의 바로 그 느낌이다.

허……!

놀랍다.

한기를 치료하고 남은 이각빙혼사의 내단만으로는 절정에 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까지 어느 정도 섭취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봤었다.

한데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절정에 올라버린 것이다.

세상에나.

“스으으읍.”

운기조식을 마친 남궁설이 숨을 길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커진 눈동자에 놀람이 담겨 있다.

곧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한 그녀가 희열이 깃든 표정으로 말했다.

“송 오라버니, 나…… 나……!”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주며 대꾸했다.

“축하해.”

“마, 맞죠? 나, 방금 절정에 오른 거, 맞는 거죠?”

확신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도 처음 절정에 진입했을 때는 내가 절정에 올랐는지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남궁설의 저러한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 줬다.

“맞아.”

내 대꾸를 듣자마자 남궁설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가 절정에 오르다니……! 아아아……!”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흔들면서 하늘을 보고 있다. 혼자 있었다면 방방 뛰기라도 했을 기세다.

저런 기분일 수밖에 없다.

얘가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송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내 덕은 무슨. 설 매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지. 결정적일 때 기연을 얻은 덕이고. 행여나 내가 목숨을 구해준 덕분이라는 얘기라면 더는 하지 않아도 돼.”

그러자 남궁설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송 오라버니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내가 살아서 이렇게 빠르게 절정에 오를 일도 없었을 게 분명하니까.”

더 대꾸해 봐야 소용없을 분위기이기에 미소만 지어 주었다.

그 후에 물었다.

“그보다도, 어때? 절정에 오르니까 많은 부분이 일류 시절과는 다르지?”

“네! 진짜, 진짜 달라요! 일단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요. 그리고 모든 감각이 훨씬 또렷해진 느낌이에요. 벌써 시야부터 너무 맑구요. 진짜 신기해요. 절정고수들은 이런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군요.”

‘진짜’를 몇 번이나 쓰는 거냐.

그만큼 흥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록된 강호사에서 열일곱 살에 절정에 오른 무인은 없었지, 아마?”

“내가 알기로도 그렇기는 해요.”

“최연소 절정고수라는 기록을 세운 기분은 어때? 아마도 쉽게 깨질 기록은 아닌 듯한데.”

오랜 강호사에서, 이 넓은 강호에서, 최연소 절정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당연히 좋죠. 좋기는 한데, 계속 그 생각을 하면 괜히 자만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지 않도록 정신 줄을 단단히 잡으려고 해요.”

좋은 자세다.

그녀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 일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높은 남궁세가의 위상이 지금보다 더 높아지겠네.”

“음…… 그렇기야 하겠지만 당분간은 내가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요. 물론 꼭 알려야 할 사람들에게는 알려야겠지만, 외부에는 이 사실이 최대한 늦게 알려졌으면 해요.”

남궁설이 바로 말을 이었다.

“실력은 드러난 것보다는 감춰져 있는 게 여러모로 더 도움이 되잖아요. 내가 명성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알리는 것도 고려했겠지만, 그렇지도 않구요.”

“잘 생각했어.”

우리는 이후에도 한동안 남궁설이 절정에 오른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야기가 대강 정리되었을 때쯤, 남궁설이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어떻게 된 거예요? 춘약의 기운이 그렇게나 강력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해서…….”

시선을 살짝 내리면서 말을 줄이는데, 창피한지 볼이 살짝 붉어져 있다.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송 오라버니가 손을 잡아줬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 직후에 내게 달라붙으며 입맞춤을 했었는데 그건 기억 못 하는 모양이다. 기억하는데도 부끄러워서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건 악몽이에요. 끔찍한 악귀가 가족뿐만 아니라 지인들과 친우들을 집어삼켰고, 나중에는 나까지 집어삼키려 했어요. 나는 계속 도망 다녀야 했어요.”

남궁설이 말을 이었다.

“악몽을 꾸는 중에도 고통이 느껴졌어요. 바늘이 온몸을 찔러대는 듯한 고통이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깨어난 후에도 그 고통의 여파가 계속됐어요. 혼란스럽고 의아했어요. 그 당시 송 오라버니의 표정 속에서, 송 오라버니가 모종의 조치를 했을 것 같다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말을 마친 남궁설이 매우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말했다.

“고문법을 썼어.”

남궁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목을 뺐다.

“고, 고문법……?”

“서책에서 극한의 공포와 극한의 고통을 동시에 주는 고문법에 대해 읽은 적이 있거든. 극한의 공포라면 춘약의 기운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고문법을 펼쳤던 거야. 그러는 중에도 고통을 주는 요소는 최소화하기 위해 애썼는데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어. 혹시 지금도 아픈 건 아니지?”

“지금은 전혀 안 아파요. 그보다도, 왜 그런 고문법을 익히고 있었던 거예요? 따지려는 게 아니고 신기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보통 그런 걸 익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익힌 건 아니고, 당시에 신기해서 원리를 좀 연구했었거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억이 났던 거지.”

“아하.”

적당히 둘러댄 건데 그냥 납득하고 있다. 의심하는 기색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요즘의 남궁설은 내가 뭔 짓을 해도 믿을 분위기다.

“그러면 내가 춘약 기운에 완전히 지배당한 후부터 고문법에 걸려 있던 시간까지 다 합하면 얼마나 돼요?”

“일다경 남짓?”

“길지 않은 시간이었군요. 그래서 내단의 기운이 많이 남아 있었던 거구나.”

“어쨌거나 미안해. 고문법 같은 거 써서.”

내 말에 남궁설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미안하다뇨. 나를 괴롭히려고 쓴 것도 아니고 도우려고 쓴 건데. 오히려 나는 송 오라버니가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춘약의 기운을 그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이 강호에 몇 명이나 있겠어요?”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남궁설이 말했다.

“미안한 건 오히려 나예요. 송 오라버니의 체내에 남아 있던 자심행과의 기운…… 지금쯤 다 흩어졌을 거 아녜요.”

“아까도 말했지만 거의 다 흡수한 상태였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

남궁설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육포, 많이 남아 있다고 했죠?”

“어. 넉넉한 편이지.”

“앞으로 나는 육포 위주로 식사하면서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는 조금씩만 먹을게요. 그러니 송 오라버니는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 위주로 식사해요.”

“아냐, 아냐. 그러면 쓰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나는 절정에 오르는 게 목표였는데 이미 이뤘어요. 이제 중요한 건 송 오라버니예요. 내가 자심행과 먹을 때 했던 말, 이번에도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

표정과 어조가 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았어. 고마워.”

내 대꾸에 남궁설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궁설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서로 호법 역할을 해 주며 항상 안전한 상태에서 운기조식을 취했고, 잠을 잘 때도 서로 번을 서 줬다.

이각빙혼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해로운 생물이 존재할지 모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남궁설은 본인이 예고했던 대로 육포 위주로 끼니를 해결했고, 나는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 위주로 끼니를 해결했다.

내가 먹는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의 양이 많고 회회심공의 흡수율도 높다 보니 공력 또한 쑥쑥 늘어갔다.

그렇듯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야명석 동굴 안에서의 나날들이 흘러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