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291화 (291/416)

내 안에 마교있다 291

송천광은 서둘러 세수하고 의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들어서니 두 사람이 보였는데, 한 명은 이청오였고 한 명은 오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당연히 남궁세가주다.

눈빛부터 묵직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존재감이 남다른 느낌이다. 설령 그가 남궁세가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저 범상치 않은 존재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다.

겉보기로는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남궁세가주의 원래 나이는 예순 즈음이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은데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내공 경지가 매우 높기에 저렇듯 젊어 보이는 것이다.

나이에 비해 저렇게까지 젊어 보이는 것도 부러운데 외모도 훌륭하다. 멋지게 나이 든 외모다.

중년 사내의 외모로는 자신도 어디에 가서든 부러움을 사는데, 남궁세가주도 평소에 주변의 부러움을 많이 살 것 같다.

송천광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이청오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남궁세가주에게 말했다.

“가주님, 이분이 우리 장주님이십니다.”

그러자 남궁세가주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공손히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 뵙겠소. 남궁벽이라 하오.”

송천광도 마주 포권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송천광이라 합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자 이청오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대화 나누십시오.”

이청오가 응접실을 벗어난 후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남궁벽이었다.

“원래는 볼일이 있어서 동부지맹에 들렀던 길인데, 가까이 온 김에 송 장주를 한번 봬야 할 것 같아서 이렇듯 찾아오게 되었소. 불쑥 찾아온 결례를 용서하시오.”

송천광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결례라니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송천광을 바라보는 남궁벽의 눈빛이 깊어졌다.

남궁벽이 듣기로 송천광이라는 사람은 강호의 유명인사들을 만나면 과도한 저자세로 굽신거리기 바쁘다고 했다. 송가장을 무가로 키우고 싶은데 강호에 인맥이 전혀 없다 보니,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서 저자세로 굽신거린다는 것이다.

한데 지금은 저자세도 아니었고 굽신거리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송유겸을 잃은 충격과 슬픔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오.”

남궁벽의 말에 송천광이 서글픔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온전한 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송천광이 호흡을 정돈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남궁 가주님께서도 같은 일을 겪고 계시지요. 한데 가주님께서는 일상생활을 넘어 외부 활동까지 소화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당연히 저만큼 슬프실 텐데도 그렇듯 의연한 모습이시니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소. 송 장주의 눈에 내가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아직 딸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껏 그 누구도 그 아이들의 시신을 발견하거나 확인하지 못했잖소. 그래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오.”

“하오나 그 넓고 긴 낙석의 범위에서 벗어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라고…….”

“그래도 시신이 발견된 건 아니잖소. 게다가 그 사고가 발생한 날로부터 스무날도 지나지 않았소. 체념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오.”

“하지만 천운으로 바위틈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했다면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도 무반응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고수들이 기척을 촘촘히 확인했는데도 일대에서 산 사람의 기척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고…….”

송천광의 말에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누가 봐도 송 장주의 말씀이 맞소. 그저, 이렇듯 시신을 확인해야만 죽음을 인정하는 건 내 기준일 뿐이라고 생각해 주시구려. 사실 나는 이러면서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는 것뿐이오.”

남궁벽이 바로 말을 이었다.

“참고로 내 딸아이도 영민하지만 유겸이는 아주 특별한 아이요. 그러니 현재 바위 더미가 뒤덮여 있는 결과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당시의 또 다른 상황이 있었기를 간절히 기대해 보는 것이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소.”

남궁벽의 말을 들은 송천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여 유겸이 그 아이와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가주께서 말씀하시는 분위기가 왠지 그런 듯하여…….”

“아, 그렇소. 정말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소.”

송천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째 아들은 대체 언제 남궁세가주 같은 초특급 거물과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계반의 그 장우혜 소저가 실은 가주님의 영애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었습니다. 유겸이 그 아이가 장우혜 소저와 친분이 깊다는 사실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던지라……. 한데 가주님과도 인연이 있었을 줄은…….”

송천광이 놀란 표정으로 대꾸하자 남궁벽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송 장주께서도 내 딸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일전에 무원객잔에서 가족 모임을 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과 친분이 깊은 몇 명의 관도들이 제게 인사를 하러 왔었습니다. 그때 장우혜 소저와 유은무 소저를 봤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두 소저가 선우 대협의 손녀와 남궁 가주님의 영애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만…….”

이번 통합 잠룡대전을 통해 남궁설이 정체를 드러낸 탓에 자연스럽게 선우린의 정체도 드러났다. 이청오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송천광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남궁 가주님께서는 유겸이 그 아이와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작년 통합 잠룡대전 당시에 내가 머물고 있던 무림맹의 귀빈실에 왔었소. 딸아이가 초대했던 모양인데, 출타했다가 돌아가서 보니 우리 큰아들과 딸과 린아와 유겸이가 같이 있었소. 인사를 나누면서 잠깐 본 것만으로도 유겸이가 매우 탁월한 청년이라는 걸 알겠더구려. 그러더니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던 것이오. 그 후에는 우승을 축하해 주려고 내가 유겸이를 귀빈실로 초대했었소.”

“그랬었군요. 한데 방금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유겸이가 소가주님과도 안면이 있었던 모양인데…….”

“안면이 있었던 것뿐이겠소? 그 둘은 친분이 상당히 깊었소. 우리 큰아들도 유겸이를 참 좋아했소. 근래에는 유겸이와 묶여서 동천쌍룡으로 불리는 게 기분 좋다는 말까지 했었으니.”

“그, 그렇습니까…….”

놀란 어조로 그렇게 대꾸한 송천광의 표정에 점점 서글픔이 담겼다.

남궁벽의 저 얘기까지 듣고 나니 둘째 아들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무공 실력이 뛰어나기에 인맥만 받쳐 주면 강호에서의 미래도 창창할 터였다. 아비로서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는데, 둘째 아들은 본인이 알아서 천하제일세가의 가주, 소가주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듯 최상의 인맥까지 구축해 놓았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송천광의 표정을 확인한 남궁벽이 서둘러 말했다.

“내 얘기가 송 장주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나 보구려. 그럴 의도는 아니었소. 미안하오.”

송천광이 표정을 정돈하며 대꾸했다.

“제가 잠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뿐입니다. 가주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송천광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가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저는 그간 실의에 빠져 무기력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동병상련의 입장인 가주님을 뵙고 이렇듯 대화를 나누니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 덕분에 비로소 저도 지난 며칠간의 못난 생활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모쪼록 기운 내시기를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에 남궁벽이 말했다.

“유겸이는 이전에도 내 딸을 여러 차례 구해줬었소. 물론 유겸이는 위기 상황에서 친우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 내 딸만을 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딸이 유겸이 덕분에 무사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소. 그래서 나는 원래 그 고마움에 대해 유겸이에게 답례할 생각이었소.”

남궁벽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혹여 유겸이에게 답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가문에게라도 답례할 생각이오.”

“아이고 가주님, 답례는 무슨 답롑니까.”

놀란 송천광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지만 남궁벽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송 장주께서 송가장을 무가로 성장시키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소. 장주께서 원하신다면 우리 세가에서 그 방면으로 도움을 드리리다. 유겸이가 있었다면 알아서 무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겠지만, 유겸이가 없는 경우라면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을 터이니.”

그 말에 송천광의 눈동자가 커졌다.

남궁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기적인 계획과 관리가 필요한 일이오. 한데 마침 송가장의 위치는 동부지맹에서 가깝소. 우리 세가의 주요 인사들은 동부지맹에 올 일이 많으니, 그때마다 송가장에 들러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해 줄 수 있을 것이오. 물론 나도 동부지맹에 올 때마다 들를 것이고.”

남궁벽이 바로 말을 이었다.

“무가로 발돋움하려면 기본적으로 가문 무공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할 텐데, 보통은 그걸 갖추기가 어렵소. 우리 세가에서는 그 부분부터 도움을 드릴 수 있소.”

그 말에 송천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공이라고 하시면…….”

“우리 가문이 남궁세가의 무학만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오랜 세월 천하제일세가라고 불려 온 만큼, 우리는 연구 목적으로 수많은 무공 자료들을 수집해 왔소. 기증받은 것들도 많소. 과거에 실전되어 지금은 주인이 없는 것들도 적지 않으며, 개중에는 수준이 높은 무학들도 여럿 있소. 참고로 세가 내부에서도 그런 무학들이 이대로 사장되는 건 아깝다는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소. 그러던 중에 이런 상황을 맞게 되었으니 그 무공들로 답례를 하면 어떨까 생각한 것이오.”

남궁벽의 말에 송천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송가장을 무가로 키우고자 하는 목표를 세운 후부터, 사실상 가문 무공을 제대로 갖추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가문 무공은 무가의 근본이다. 그런 것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무가에 강호인이 모여들 리 없다.

참고로 제대로 된 무공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가 어렵다.

한데 남궁벽이 지금, 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송가장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건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도움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말이 없던 송천광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가주님의 제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제안인지 잘 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한 차례 묵례한 송천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송가장을 무가로 키워 가고자 했습니다. 한데 둘째 녀석의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송가장이 무가가 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중입니다. 그냥 이전처럼 평범하게 부호 가문으로 살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겁니다. 이래저래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한 정신으로 충분히 고민해 본 후에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남궁벽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해하오. 송가장의 방향성에 관련된 일이니 차분히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옳을 것이오. 이게 무슨 촌각을 다퉈야 하는 사안도 아니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송천광이 대꾸하자 남궁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려던 얘기는 모두 마쳤으니 이제 가 봐야겠소.”

“벌써 가시렵니까? 조금 더 머무르시다가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일 때문에 곧장 남창지부에 가 봐야 하오. 그 일로 세가의 수행원들이 동부지맹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오.”

“아, 그러시군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소, 송 장주.”

“저야말로 오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직접 와 주신 것부터 여러모로 위로해 주시고 배려해 주신 것까지, 그 모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송천광과 이청오는 남궁벽을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두 사람은 말을 탄 남궁벽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대문 밖에 서 있다가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에 이청오가 말했다.

“기운을 좀 차리신 느낌입니다.”

“그렇게 보이는가?”

“예.”

이청오가 대꾸하자 송천광이 천천히 서너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내, 지금껏 자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적이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이번에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남궁 가주님을 뵙고 나니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더군. 남궁 가주님도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잖나. 그런데도 그분은 일 때문에 동부지맹에 들렀다가, 그 후에 우리 장원에 오셨다가, 이제는 또 일 때문에 남창지부에 가신다더군. 내가 실의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도 그분은 가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계셨던 것이지.”

송천광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그분은 천하제일세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문제없이 이끌고 계시는데, 나는 송가장이라는 이 작은 조직조차 제대로 이끌지 않고 내팽개쳐 뒀지. 책임감도 책임감이지만, 전체적인 그릇의 크기가 하늘과 땅 차이인 걸세. 결국, 나는 이 정도 그릇밖에 안 되면서 무가를 일으키겠답시고 꿈만 야무지게 꾸었던 게지.”

이청오는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난감함 가득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송천광이 말했다.

“자네를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네. 이제부터는 나도 노력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네.”

“아…….”

“자네와 상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네. 방금 남궁 가주께서 깜짝 놀랄 제안을 해 왔거든. 송가장의 미래와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나는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네.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이청오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함께 고민하고 조언해 드리겠습니다.”

* * *

야명석 동굴에서의 생활이 계속될수록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야명석으로 인해 공간이 항상 밝기 때문이었는데, 나와 남궁설은 어느 순간부터 굳이 날짜를 가늠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공복을 느끼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 등으로 날짜를 가늠하는 건 오차가 너무 클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서로 돌아가면서 잠을 자고 운기를 취하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 시점이 되자 내 발목의 부상도 완치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날 이후로 대충 여드레나 아흐레 정도 지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날의 일이었다.

발목의 부상이 완치되자마자 남궁설과 함께 지하수로의 하류 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우리가 수중 통로를 통해 처음으로 지하수로에 진입했던, 그 작은 웅덩이다.

하류 쪽으로 향하는 지하수로는 넓은 공간이 많기에 그런 구역에서는 경공을 펼치며 이동했다.

경공을 펼치면서 보니 남궁설의 경공 수준이 크게 상승했음을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사뿐사뿐 바닥을 밟고 있는데도 쭉쭉 나아가고 있다.

그 와중에도 무게중심은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진기의 순환도 일류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과연 절정고수다운 경공이었다.

참고로 나 또한 내공이 크게 상승한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경쾌한 느낌을 받으며 경공을 펼치는 중이다.

처음에 이 지하수로를 발견하고 나서 야명석 동굴까지 이동하던 길은 매우 고단했었다.

당시에 나는 발목을 다쳤었고 남궁설은 극도로 지쳤었다. 우리 둘 다 경공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야명석 동굴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었다. 중간에 휴식도 취하고 짧은 수면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건이 될 때마다 경공을 펼치다 보니 같은 거리인데도 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중 통로를 통해 절벽 쪽 공간에 가 보기 위함이다.

사실, 절벽 아래쪽의 바위 더미를 철거하는 공사는 별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각종 안전 점검도 필요한 데다가 절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그 공사가 별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수중 통로를 통해 이어지는 절벽 쪽의 공간도 여전히 물에 잠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그 공간에 가 보려는 이유는, 밖에서 들릴 수도 있는 소리나 진동을 통해 공사 진척도를 가늠해 봄과 동시에, 우리의 생존 사실을 알릴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다.

만약 밖에서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된다면, 바위 더미를 걷어내는 작업도 그 위치부터 진행될 수 있다.

입수 준비를 마친 후 남궁설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저쪽 장소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면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을 거야. 그 경우에는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숨을 참아야 하니까 호흡 관리를 잘해야 해.”

물속에서는 전음을 보낼 수 없기에 주의 사항을 미리 알려준 것이다.

“네.”

“저쪽 공간에 가면 나는 잠시 바위에 붙어서 진동 같은 게 느껴지는지 확인할 거야. 바위 더미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야. 그렇게 알고, 설 매는 혹시라도 호흡이 달리는 것 같으면 무리하며 버티지 말고 먼저 이곳으로 이동해. 물론 절정에 올라서 호흡이 그리 부족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알았어요. 무리 안 할게요. 그럼 제가 먼저 갈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설이 곧바로 웅덩이 안으로 입수했다.

‘창궁지의 인어’께서 앞장서서 수중 통로로 잠영하며 나아갔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남궁설은 원래 경이로운 수영 실력의 소유자였는데, 절정고수가 되더니 더 빨라진 느낌이다.

한동안 잠영하여 수중 통로를 통과한 우리는 이윽고 절벽 쪽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낙석을 피해 숨어들었던, 절벽 하단의 그 틈새 공간이다.

예상대로 공간이 완전히 물에 잠겨 있었다. 호흡할 만한 수면 위의 공간도 없었다.

이에 나는 계획했던 대로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바위를 양손으로 짚고 앞머리를 댔다.

그 상태로 가만히 집중하니 미세한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망치나 정 같은 것들을 이용해 바위를 파쇄하는 느낌의 진동이었다.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진동의 느낌이 매우 멀었다. 먼 곳에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공간은 길게 이어진 낙석 범위의 중앙 부근이다.

바위 더미 철거 작업은 낙석 범위의 양쪽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중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낙석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던 만큼, 바위 더미 제거 작업이 이 근처에 이르려면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시험 삼아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린 후, 입구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에 쌍장을 대고는 장력을 연속으로 발출했다.

파앗- 파앗-

물속이라 타격음도 그리 크지 않았고 진동도 별로 없었다. 내 근처로 물보라만 심하게 일었을 뿐이다.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가 그만큼 단단하고 거대하다는 뜻이다.

이 정도 타격음과 진동이라면 누군가가 이 공간 가까이에 있어야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러기가 어려운 여건이다.

이곳은 낙석 범위의 중앙 부근이라 바위 더미도 더 높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런 식이면 우리의 생존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강한 장력을 연속으로 발출해서인지 슬슬 숨이 달리는 느낌이다.

곧바로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에서 돌아섰다.

남궁설을 향해 웅덩이 방향을 가리키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중 통로를 향해 헤엄쳐 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앞으로 이 공간에는 한 번씩만 와서 바위 더미 철거 작업의 진행 상황만 확인하면 될 듯하다.

그 외의 시간에는 지하수로의 상류와 하류를 탐사하면서 혹시 모를 출구가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만약 지하수로에서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경우에는 바위 더미 철거 작업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나는 야명석 동굴 안에서의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껏 운기조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고, 호법을 서는 시간에는 머릿속으로 무공 연구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일종의 폐관 수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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