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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마교있다-293화 (293/416)

내 안에 마교있다 293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우리는 폭포 아래의 연못에서 시작되는 작은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물길은 곧 계곡과 만나며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는 북쪽으로 흘러 나가고 있었다.

계곡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었고, 주변은 산지이기는 하나 눈에 보이는 능선들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이렇듯 지형들이 점점 평지로 향하는 느낌이라, 경공을 펼치는 우리의 발걸음도 경쾌했다.

야명석 동굴 안에서 남궁설은 경지가 상승했고 나는 성취가 상승했다.

그 후로 우리가 제대로 경공을 펼쳐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지하수로에서도 경공을 펼쳐 보긴 했으나, 그 안은 곳곳에 좁은 구역들이 많기에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전과 비슷한 속도로 천섬비를 펼치며 달리는 데도 몸이 더 가볍고 공력 소모도 크게 줄었다는 게 체감된다. 내공이 크게 상승한 덕분이다.

최고 속도는 얼마나 더 빨라졌을지 기대된다.

보아하니 남궁설도 절정고수가 되더니 경공술 경지가 눈에 띄게 상승한 모습이었다.

현재 제법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는데도 그녀는 미끄러지듯 가볍게 나아가는 중이다. 가까이 있으니 알 수 있는데, 기운의 순환도 훨씬 여유로워졌다.

남궁설은 원래 경신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일류고수 시절에도 경지 대비 속도가 빨랐었다. 그러니 그녀의 최고 속도도 얼마나 더 빨라졌을지 기대된다.

참고로 남궁설은 은잠술의 성취도 제법 높아진 상태다.

야명석 동굴 안에서 내 도움을 받으며 틈나는 대로 수련했기 때문이다.

절정의 경지에, 남궁세가의 검술에, 빠른 속도에, 은신술까지.

이제는 남궁설도 어디에서든 최정예 전투력이다.

폭포 쪽에 있을 때는 날이 매우 밝았지만 한참 이동하다 보니 점점 산그늘이 짙어졌다.

경공을 펼치는 중에 두리번거리며 적당히 노숙할 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데, 어느 시점부턴가 계곡 옆으로 소로가 나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생긴 길이다.

길을 확인하자마자 남궁설이 내게 물었다.

“고산지가 아닌 저산지에 이렇듯 길이 나 있다는 건, 멀지 않은 곳에 민가나 마을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죠?”

“그렇겠지.”

“민가와 마을이 있다는 건, 어딘가에 큰 마을과 저잣거리도 존재한다는 거겠죠?”

너무도 당연한 걸 굳이 묻는 이유는 그만큼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하다.

내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설이 말했다.

“나, 하나도 안 피곤해요. 잠 안 자고 계속 경공 펼쳐도 끄떡없을 것 같아요. 날 새워서 달리고 내일 낮에도 계속 달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저잣거리를 발견할 때까지는 멈추지 말고 그냥 가요.”

소로를 발견하기 전이었다면 슬슬 노숙하며 체력 관리를 한 후에 출발하는 게 옳겠지만, 지금은 소로를 발견한 상태이니 그냥 가도 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설이 경공 속도를 더 끌어 올리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나도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뒤따랐다.

완만한 산자락의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밭이 보이더니, 조금 더 이동하자 물가의 양옆에도 논밭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이동하다 보니 어둠 속 저 멀리 희미한 불빛들이 보였다.

마을이다.

작은 산골 마을이긴 하나, 사람 사는 곳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마을 어귀로 향했다.

밤하늘을 보니 시간은 해시 초(오후 9시)를 살짝 넘은 듯했다.

마을에 들어서서 길을 따라 조용히 걷던 중에, 대문 밖 길가에 서서 소피를 보고 있는 노인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멀리까지 볼 수 있기에 노인을 발견한 것이지만, 노인은 아직까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설 매, 잠시만 은신하고 있어.]

남궁설은 내 전음을 듣자마자 음영 속으로 숨어들며 은잠술을 펼쳤고, 나는 인기척을 내며 노인 쪽으로 다가갔다.

소피를 보던 노인이 나를 인식하고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뉘신고?”

동네 사람을 대하듯 친근한 말투였다.

어둠 속이라 아직 내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응당 동네 사람이겠거니 하고 저렇게 말하는 듯하다.

노인이 아직 볼일을 보는 중이었기에, 나는 다가가던 걸음을 멈춘 채로 대꾸했다.

“아, 어르신, 저는 그냥 나그네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꾸 없이 볼일을 마무리 짓더니 바지춤을 정리했다.

그제야 나는 노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 대문 밖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기에 그곳에 섰다. 내 모습을 드러내야 노인이 그나마 덜 경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인이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이 작은 산골 마을에 들르는 외인이라고는 행상인이나 약초꾼이나 사냥꾼 정도인데, 젊은 무인께서 어인 일이시우.”

손자뻘인 나를 상대하면서도 조심하는 말투였다. 눈동자에도 경계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내가 검을 차고 있다 보니 저렇듯 조심하는 것이다.

“아, 수련을 위해 깊은 산 속에 들어갔었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이 근처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불빛이 보이기에 이곳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런.”

딱하다는 투로 대꾸하긴 했으나 경계심은 여전한 것 같다.

곧바로 노인에게 말했다.

“마침 이렇듯 뵙게 된 김에 궁금한 것 두세 가지만 여쭙고 떠날까 합니다.”

“물어보시우.”

“이곳이 어딥니까? 그러니까, 어느 현에 속한 마을인지…….”

“장수현이우. 이 마을은 장수현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고.”

“장수현…….”

어딘지 모르겠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노인이 바로 입을 열었다.

“장수현을 모르는 걸 보면 이 인근 분이 아니시구먼. 장수현은 평강현의 지현이우. 이곳에서 서쪽으로 쭉 가면 평강현이우. 북쪽으로 쭉 가면 호북의 통성현이고, 북동쪽으로 가면 강서의 수수현이고.”

“아……!”

노인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제야 대강이나마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것 같았다.

“하면 어르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저잣거리는 어디입니까? 객잔을 찾고 싶습니다.”

“장수현의 저잣거리가 작기는 한데 객잔은 있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요?”

“북쪽으로 가시우. 마을 앞에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큰 길이 나올 것이우.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쭉 가면 되우.”

“아하. 알겠습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또 여쭐 게 있는데, 오늘이 며칠입니까?”

내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깊은 산속에서 헤맸다고 해도 날이 바뀌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만 한데, 그걸 묻고 있으니 의아한 모양이다.

“초닷샛날이우.”

“아, 그렇습니까.”

잠복 중이던 특수사조가 혈교의 거점을 타격하기 위해 출발했던 때가 시월 이렛날 이른 저녁 무렵이었다.

그리고 남궁설과 내가 동굴 안의 벼랑길에서 추락한 시각은 아마도 다음 날인 시월 여드렛날 새벽쯤이었을 것이다.

노인이 초닷샛날이라고 했으니 이미 십일월이라는 뜻이다.

계산해 보면 우리는 이십칠 일 만에 밖으로 나온 게 된다.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사나흘 정도 더 흐른 셈이다. 역시나 동굴 안에서 가늠한 날짜라서 그런지 오차가 적지 않다.

노인에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어르신.”

“부지런히 가면 오늘 자정경에는 저잣거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우. 부디 밤길 살펴 가시구려, 젊은 무사 양반.”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뒤돌아 마을 어귀 쪽을 향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남궁설은 은잠술을 펼치는 채로 나를 따르다가 노인의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즈음에 내 옆에 나타났다.

“아까 어르신이 말한 건 속보 기준이겠죠? 그럼 우리 경공 속도라면…….”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글쎄? 정확히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 시진(한 시간) 전후면 도착하지 않을까?”

그러자 남궁설이 눈동자에 각오를 담으며 대꾸했다.

“삼각(45분) 안에 끊어요.”

“푸훗!”

사소한 부분에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밤중이라 인적도 드무니 신나게 달리면 되잖아요. 그러니 어서 가요.”

말을 마친 남궁설이 경공을 펼치며 빠르게 튀어 나갔고, 나도 즉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해시 정(오후 10시) 무렵, 장수현의 저잣거리에 도착했다.

남궁설이 어찌나 빠르게 달리던지, 채 삼각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저잣거리에 가까워지자 남궁설은 가죽 행낭에서 검은 면사포를 꺼내더니 얼굴의 눈 아래를 가리는 형태로 착용했다. 용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면 괜히 피곤한 일이 생길 수 있기에 저러는 것이다.

나도 앞머리를 늘어뜨려 한쪽 눈을 가렸다.

이후에 저잣거리에 들어섰는데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남궁설은 저잣거리에 도착하면 옷가게부터 들르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시간인 만큼 거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주점 몇 군데만 여전히 영업 중이었는데 그마저도 손님이 적었다.

작은 현의 저잣거리는 보통, 시간이 이 정도만 되어도 한산하기 마련이다.

상권이 그리 크지 않은 만큼 우리는 저잣거리를 금방 둘러볼 수 있었다.

보니까 숙박할 수 있는 객잔은 두 곳뿐이었다.

한 곳은 규모가 컸고 한 곳은 규모가 작았다.

밖에서 두 곳을 비교해보던 남궁설이 말했다.

“작은 쪽은 시설이 훨씬 깔끔한데도 한적하네요. 이유는 셋 중 하나겠죠. 불친절하거나, 음식이 맛이 없거나, 비싸거나. 뭐, 두 가지 이유 이상일 수도 있는 거구요.”

“그렇지.”

“그래도 시설 좋은 곳에서 묵고 싶어요. 어차피 비싼 건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되고, 하룻밤 자고 떠날 테니까 불친절한 건 대강 넘어가면 되고, 혹여 음식 맛이 좀 떨어져도 지금의 우리의 뱃속은 뭐든 맛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적어도 음식 쪽은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래도 객잔이라, 맛이 일정 수준 이상은 될 수밖에 없는 거거든.”

남궁설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작은 객잔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산대 안쪽에 앉아 있는 오십 대 중년인과 그 앞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이십 대 청년이 보였다. 옷차림으로 보아 중년인은 객잔 주인인 듯했고, 청년은 점소이인 듯했다.

“어서 오십……! 쇼…….”

주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힘차게 반기는 듯하다가, 우리의 행색을 확인한 후부터는 점점 작아졌다. 우리의 몰골이 추레한 탓이다.

주인과 점소이는 그 와중에도 힐끔거리며 남궁설을 바라봤다.

검은 면사포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다고는 하나, 드러난 눈언저리만 봐도 보통 미모가 아니라는 게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남궁설이 말했다.

“일 인실로 두 개 주세요.”

“아……, 송구하오나 현재 저희 객잔이 일 인실은 일괄적으로 공사 중입니다. 몇 개 있는 이 인실은 이미 다 찼고, 남은 건 특실 두 곳뿐입니다.”

주인의 대꾸는 사무적이었다. 가뜩이나 특실이니 우리처럼 행색이 추레한 이들이 머물 일은 더더욱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남궁설이 되물었다.

“특실……?”

“특실은 뒤뜰에 있는 아담한 독채로, 거실에 침실 두 개가 딸린 사 인실입니다.”

“오오, 독채.”

남궁설이 좋아하자 주인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어……, 위쪽에 걸려 있는 가격표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객잔이 숙박료든 음식값이든 비싼 편입니다. 당장 옆 객잔과 비교해도 이 할에서 삼 할 정도 더 비싼데…….”

“네. 봤어요. 그나저나 여기, 음식은 맛있나요?”

“예. 요리 실력으로는 인근에서 알아주는 숙수입니다만…….”

“그렇군요. 그럼 특실 하나 주세요. 씻고 싶으니 따뜻한 물도 준비해 주시구요.”

남궁설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주인은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었다. 우리가 숙박료와 식대를 지불할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숙박료 계산을 해 주시면 당연히 방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늦은 터라 따뜻한 물을 준비해 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주인이 대꾸한 순간, 남궁설이 손바닥으로 계산대 위를 ‘탁!’하고 치더니 뗐다. 그녀의 손바닥이 떠난 계산대 위에 은자 한 냥이 놓여 있었다.

주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건 당연했다.

남궁설이 말했다.

“나중에 나갈 때 이 은자에서 우리가 쓴 비용을 제하고 거슬러 주세요. 일단, 숙수가 가장 잘하는 요리 중에서 고기 요리 위주로 다섯 가지 준비해 주시고, 술도 최고급 술을 종류별로 대여섯 병 준비해 주세요. 음식과 술은 우리가 머물 특실로 갖다주시구요.”

“아이고,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요, 소저.”

주인이 빠르게 굽신거리며 대꾸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남궁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시간이 늦어서 따뜻한 물은 준비가 안 된다고 하셨던가요?”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지요, 소저. 즉시 아궁이에 불 넣고 가마솥에 물 채워 넣겠습니다요. 양껏 쓰실 수 있도록 많이 준비하겠습니다요.”

주인이 싹싹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하자 남궁설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돈 많이 쓰는 건 상관없지만 호구 잡히는 건 딱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이용료 목록과 계산서는 제대로 정리해 두세요. 나갈 때 확인할 테니까.”

“아이고, 그러믄요. 동전 한 냥의 오차도 없게끔 확실하게 기입해 두겠습니다요.”

남궁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제 방으로 가죠. 부디 비싼 값을 하는 방이면 좋겠군요.”

“얼마 전에 내부 공사를 새로 하고 단장한 곳이라, 적어도 인근에서 그보다 더 좋은 방은 없을 겁니다요. 그래도 혹여 불편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쇼. 최대한 신경 써 드리겠습니다요.”

말을 마친 주인이 점소이에게 손짓하자, 점소이가 얼른 우리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가시지요. 특실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점소이를 따라가기 전에 주인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내일 아침에 죽립 두 개만 사다 주십시오. 깊게 눌러 쓸 수 있는 것으로.”

“그리하겠습니다요, 공자.”

점소이의 안내에 따라 뒤뜰에 있는 후원으로 들어와 보니, 과연 새로 단장한 공간답게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쾌적했다.

규모가 큰 옆 객잔과 가격 경쟁을 해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이렇듯 고급화 전략을 쓴 모양이다. 나쁘지 않다.

특실의 구조는 침실 두 개와 거실 하나였는데, 한 침실에는 이 인용 침상이, 다른 침실에는 일 인용 침상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해준 점소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남궁설이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와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정말 기분 좋게 푹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게. 아주 좋네. 아, 그리고 이 인용 침상이 있는 방은 설 매가 써. 내가 일 인용 침상이 있는 방을 쓸 테니까.”

“네? 아니에요. 송 오라버니가 넓은 침상 써요.”

“더 피곤한 사람이 넓은 침상에서 편하게 쉬어야지. 상식적으로 내가 더 피곤할까, 설 매가 더 피곤할까?”

“그, 그건…….”

“설 매가 써.”

내가 딱 정해 주듯 말하자 남궁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양보해 줘서 고마워요.”

우리는 따뜻한 물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겸, 한 차례씩 운기조식을 취했다.

이윽고 독채 옆의 세면실에 온수가 준비되어, 남궁설이 먼저 씻고 그 후에는 나도 씻었다.

나는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에 거실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식탁에 요리와 술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요리들을 흡입하듯 먹었다.

숙수의 실력이 좋다더니 과연 맛이 좋았다. 오랜만에 먹는 육류 요리라서 더 맛있는 것 같았다.

폭식하겠다고 선언했던 남궁설은 과연 쉬지 않고 젓가락질을 해댔다. 송유하 이후로 여자가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양이 얼추 오륙 인분은 되었음에도 우리는 거의 다 먹어치울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점소이를 불러 식탁을 정리하게 한 후, 간단한 안줏거리들을 시켜서 남아 있는 술을 마셨다.

나는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나,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기에 남궁설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준비된 술이 금방 떨어져서 추가로 주문해서 마셨다.

술을 마시며 그간 겪은 일들을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기분 좋을 정도로 마신 우리는 각자의 침실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에 일어나 보니 대략 사시 정(오전 10시)이었다.

남궁설은 아직 안 일어난 모양이라, 나는 술기운을 몰아낼 겸 방에서 운기조식을 취했다.

남궁설이 일어난 건 오시 초(오전 11시) 무렵이었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특실에서 먹은 뒤, 점소이가 갖다준 죽립을 쓰고 그곳을 나섰다. 물론 남궁설은 면사포도 썼다.

계산대로 다가가자 주인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우리를 반겼다.

“아이고, 두 분, 편히 쉬셨습니까요?”

“네. 잘 먹고 잘 쉬었어요.”

“불편한 점은 없으셨고요?”

“네. 덕분에. 그럼 계산서 좀 볼까요?”

“예, 소저. 여기 있습니다.”

남궁설이 계산서를 살펴보기 시작하자 주인이 말했다.

“어젯밤 늦게 주문하신 술 중에서 한 병값과 안줏값은 계산서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 죽립도 아는 가게에서 싸게 구해 온 것이라 계산서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성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안주와 죽립은 그렇다 쳐도, 어제 남궁설이 주문한 술들은 모두 비싼 술들이었다. 한 병값이 만만치 않았던 만큼, 그 가격을 빼줬다면 주인으로서도 나름의 성의를 보인 건 맞다.

한동안 계산서를 훑던 남궁설이 말했다.

“딱히 이상한 부분은 없는 것 같군요. 계산하죠. 아, 그리고 인심 써주셔서 감사하고, 이 죽립도 잘 쓸게요.”

“아이고, 별말씀을. 감사 인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주인이 그렇게 말하며 계산대 아래에서 지폐와 동전들을 꺼내어 남궁설에게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계산해서 미리 준비해 뒀던 모양이다.

남궁설이 돈을 받더니 동전 스무 냥을 세어 점소이에게 줬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우리를 담당했던 점소이다.

“헛……! 가, 감사합니다, 소저.”

남궁설이 점소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때쯤, 주인이 계산대 아래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더니 말했다.

“이거……, 먼 길 가시는 분들 같아서 요기하시라고 준비했습니다. 주먹밥입니다만, 우리 숙수가 신경 써서 만들었으니 맛이 괜찮을 겁니다요.”

“이렇게 감사할 데가…….”

남궁설이 작은 보따리를 받아들며 대꾸하자 주인이 말했다.

“다음에도 이 근처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 주십시오. 두 분은 선남선녀시니 제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다음에도 잘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호남 쪽에 갈 일이 생기면 다시 들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잘 묵고 간다는 인사를 남긴 후 객잔을 벗어났다.

객잔을 나선 우리는 곧바로 옷가게로 향했다.

가는 길에 행낭을 파는 가게가 보였기에 우리는 그곳에 먼저 들어갔다. 지금 메고 있는 전투용 가죽 행낭은 작아서 큰 행낭이 필요했다.

둘 다 적당한 크기의 행낭을 산 후 옷가게로 향했다.

남성 의복점과 여성 의복점이 나란히 붙어 있어, 우리는 각각의 가게에 들러 필요한 의복과 속옷을 샀다.

그 후, 근처에서 적당량의 육포와 건량까지 구입하자 출발 준비가 끝났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곳에서는 속보로 걷다가, 인적이 없는 곳에서는 빠르게 경공을 펼치며 이동했다.

이튿날 새벽에는 장수현의 북쪽에 있는 대교현에 도착했는데, 우리는 대교현 외곽의 객잔에서 눈을 붙인 후, 오후에 일어나서 다시 동쪽 길을 따라 이동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우리는 수수현에 도착했다.

참고로 수수현부터는 행정구역상 강서에 속한다.

수수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찾아간 곳은 무림맹의 지소였다. 수수현에 있는 지소이니 수수지소다.

지소는 각 현에 있는 무림맹의 소규모 거점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우리가 경유했던 장수현과 대교현은 지현들이기에 무림맹의 지소가 없었다.

수수지소의 정문 앞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고 있는 세 명의 무인들 중에서 선임으로 보이는 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신원을 확인해야 하니 협조를 부탁드리겠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있으면 그걸 보여주시면 되고, 그게 없으면 저쪽에 가서 죽립과 면사포를 벗고 서류를 작성해 주셔야 하오.”

이에 나는 품속에서 동패 하나를 꺼내어 무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남궁설도 나와 같은 동패를 무인에게 내밀었다.

동패를 확인한 무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우, 운룡패……!”

그렇다. 방금 우리가 내민 건 일성운룡패다.

무림맹주의 명에 의해 기밀 임무를 수행했던 만큼, 특수작전조원들에게는 운룡패가 지급됐었다. 남궁설은 누구한테 받았는지 모르나, 내 것은 도예주한테서 받은 것이다.

무인에게 말했다.

“지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무인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안으로 이끌었다.

역시 운룡패다.

응접실에 잠시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중년인이 말했다.

“나는 수수지소장인 장성목이라 하오. 운룡패를 가진 두 분이 이 몸을 찾으셨다고 들었소.”

이에 내가 장성목을 향해 포권하며 인사하자 남궁설도 나와 맞춰서 포권했다.

“지소장님을 뵙습니다.”

“반갑소만 두 분은 누구신지…….”

이에 내가 죽립을 벗자 남궁설도 죽립과 면사포를 벗었다.

곧바로 장성목에게 물었다.

“지소장님께서는 혹여 저희들이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장성목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견식이 짧아 공자와 소저가 누구신지 잘 모르겠소.”

“저는 송유겸이고, 이쪽은 남궁설 소저입니다.”

내 말에 장성목이 눈을 부릅떴다.

“소소, 송유겸 공자와 남궁설 소저라면 일전의 혈교 거점 타격 작전 당시에 죽……!”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이이이이, 이런 일이……!”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수수지소장 장성목은 본인이 직접 전서 내용을 적어서 직접 전서구를 날렸다. 남창지부를 향해서였다.

이후에 우리는 장성목의 배려로 수수지소에서 깨끗이 씻은 후, 배불리 먹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하룻밤 편하게 자고 일어난 우리는 다음 날 새벽에 수수지소를 나섰다.

장성목은 우리가 수수지소를 떠날 때까지 직접 우리를 챙겼다. 그는 호위무사들까지 붙여주려 했으나 우리가 거절했다.

수수지소의 호위 무사라고 해도 잘해야 일류 수준일 테고, 그러면 우리의 경공 속도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수수현에서 동남쪽 산길을 따라 부지런히 이동한 우리는 다다음 날 늦은 오후 무렵, 남창지부 앞에 도착했다.

신분을 밝히기 위해 정문으로 다가가는데, 열려 있는 문의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아……! 유겸아……!”

남궁벽의 목소리였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가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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