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99
십이월로 접어들었다.
삼 주 후면 겨울 방학이 시작되는데, 그러면 나는 실질적으로 잠룡관을 졸업하는 게 된다.
송유겸의 몸으로 깨어나 만으로는 이 년, 햇수로는 삼 년간 잠룡관도의 신분으로 지냈다.
그래서인지 막상 이 생활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의 아쉬운 기분도 드는 요즘이다.
송유하는 열심히 은잠술을 익히는 중이다.
자율 수련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은잠술의 기초를 가르쳐 줬는데, 자율 수련 기간이 시작된 후부터는 집중적으로 은잠술을 연마하고 있다.
참고로 선우린도 송유하와 함께 은잠술을 배우고 있다.
「설아의 은잠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설아가 배웠으니 저도 배우고 싶어요.」
선우린이 그 부탁을 한 날이 마침 송유하에게 은잠술을 처음 가르친 후로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둘이 같이 배우면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성취가 더 빠르게 상승할 수도 있으니 흔쾌히 받아 줬다.
요즘은 송유하와 선우린 모두 은잠술 익히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래서 그 둘에게는 내 거처에 오거나 내 근처로 접근할 때 항상 은잠술을 펼친 채로 다가오라고 주문했다.
은잠술 성취를 꾸준히 점검하기 위함이었는데, 거의 비슷하게 배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유하는 성취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참고로 송유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도 남들 눈에 잘 안 띄는 방식으로 많이 먹고 많이 마실 수 있는 애다. 그걸 볼 때마다 범상치 않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한 소질이 은잠술과 제대로 맞아떨어진 게 아닌가 싶다.
송유하는 원래 존재감이 별로 없고 성격도 무던한데, 그러한 성향 또한 은잠술과 잘 맞는 듯하다.
그 외의 일상은 언제나 그렇듯 평범했다.
나는 내가 맡은 일곱 명의 아이들을 부지런히 가르쳤고, 틈틈이 청여홍도 지도했다.
쾌류무를 익히고 있는 아이들은 점점 무공이 정립되어 가고 있어서, 내가 요점만 한 차례씩 잡아 주면 금세 알아듣고는 수련에 곧장 반영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고맙게도 단목강과 소충광, 우문직이 아이들의 수련을 자주 도와준 덕분에 나도 편했다.
십이월이 된 후부터는 틈틈이 연승휴의 동굴에 가서 무기와 귀중품들을 거처로 몰래, 조금씩 옮겼다. 옮긴 물품들은 벽장과 부엌에 나누어 숨겨두었다.
잠룡관을 떠나야 하니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청여홍이 소형 화물 마차와 소형 화물선 한 척을 대여해 주기로 했다.
그 화물 마차에 내 짐과 귀중품들을 모두 실어서 나루터까지 옮긴 후, 나루터에서 마차를 화물선에 싣고 포양호의 정가장으로 향할 생각이다.
청여홍은 화물 마차와 소형 화물선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사용료와 인건비를 꼭 지불하겠다고 못 박았다.
친한 사이일수록 이런 류의 계산은 철저해야 한다.
* * *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가운데 섣달 닷샛날이 되었다.
오전에 심산화, 공은림, 하조혁을 지도한 후, 점심때부터는 거처에 머물렀다.
여전히 매일 지도를 해 줘야 하는 아이들은 심산화, 공은림, 하조혁 정도다.
왕철양은 실력이 향상된 덕분에 명호운과 함께 수련하는 중이고, 포연월과 원추엽은 언제나 그렇듯 알아서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유하와 유은무의 은잠술 또한 이틀에 한 번씩만 점검해 줘도 되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나도 근래에는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에 세 차례 정도는 오늘처럼 오후에 시간이 빈다.
여유를 느끼며 거처에서 회회심공과 천섬무의 묘리를 연구하고 있는데 소충광이 찾아왔다.
서탁의 맞은 편에 앉은 소충광에게 농담부터 건넸다.
“졸업을 앞둔 갑반께서는 일과시간에도 어슬렁어슬렁 마실이나 다니시는구려. 계반이라고 해도 믿겠소.”
“푸하하! 어슬렁어슬렁이라니. 그런 거 아니오. 알릴 소식이 있어서 온 거란 말이오.”
“소식?”
“나 말이오. 동부지맹의 동검대에 지원한다고 했었잖소. 한 달쯤 전에 동부지맹에 지원서를 냈는데 오늘 그 결과를 알리는 통지서가 도착했소. 합격했다는 통지요.”
“오! 축하드리오.”
“고맙소.”
“사실, 지난여름에 소 공자가 그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소 공자의 실력이면 무난하게 합격할 것이라 예상했었소. 동검대의 지휘부가 눈이 삔 게 아니면 소 공자 같은 젊은 인재를 놓칠 리가 없지.”
내 말에 소충광이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과찬이시오. 어쨌든 고맙소. 그리고 나, 즉시 전력으로 분류되었소.”
“오오! 즉시 전력이라니……! 그러면 동검대에 입대하자마자 바로 임무 수행에 나서는 것이오?”
“그렇지는 않소. 즉시 전력으로 분류돼도 일단은 신입 대원 훈련소에 입소해야 하오. 단, 훈련 기간이 짧을 뿐이오.”
“아하.”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오. 동검대의 신입 대원 훈련소는 훈련소에서의 교육 과정이 매우 힘들다고 하더구려. 그러니 훈련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이고.”
“아하, 그렇구려. 어쨌거나 그렇듯 즉시 전력으로 분류된 것은 아무래도 소 공자의 실전 경험이 반영된 결과겠구려?”
소충광은 동부 해안에서 사파와 전투를 치를 때도 잠룡대에 속하여 참여했었으며, 이번에 혈교 대규모 거점 타격 작전 때도 본대에 속하여 참여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충광은 지난여름에 청여홍의 장원에서 치열한 실전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동부지맹에 가서 그 사건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었으니, 동부지맹에서도 소충광의 당시 활약상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모양이오.”
소충광의 대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얘기해 줄 게 있는데, 초임 근무지는 남창지부라고 하오. 그러니 휴일이나 휴가 때는 송 공자의 거처에 들르기도 쉬울 것 같소.”
“오호, 그렇겠구려.”
“남창지부에서는 포양호 주변에 있는 무림맹 지소들로도 파견 근무를 많이 나간다고 하니, 송 공자의 거처에서 가까운 지소로 가면 들를 일도 더 많아질 것이오. 그러니 내가 너무 자주 찾아온다며 문전박대하지 마시구려. 하하.”
“문전박대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언제든 와서 편하게 있다 가시오.”
“하하, 고맙소.”
소충광이 웃으며 대꾸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흘 후 미시 초(오후 1시)까지 동부지맹의 동검대 막사 앞으로 가야 하오. 그곳에서 신입 대원 훈련소로 이동하여 입소한다는 모양이오.”
“허! 아직 학기 중이고 졸업도 안 했는데 입소가 빠르구려. 어차피 근자에 소 공자는 어슬렁거리는 게 일과였으니 큰 상관은 없겠지만.”
“푸하하! 자꾸 어슬렁거린다는 표현에 중점을 두시는구려. 사실은 지금이 동검대, 서검대, 남검대, 북검대 모두, 신입 대원들이 훈련소에 입소하는 시기요. 사대 지맹의 검대는 분기별로 한 차례씩 신입 대원을 받는데 지금이 동절기 입소 시기거든. 잠룡관을 졸업하는 관도들이 주로 입소하는 시기도 바로 동절기고.”
소충광이 말을 이었다.
“송 공자의 말마따나 이 시기는 졸업하는 관도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시기요. 그렇기에 잠룡관과 동검대가 협의하여 해당 관도들을 미리 차출해 가는 것이오.”
“아하.”
내가 대꾸하자 소충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로 진 매와 성락 아우가 친우들과 모여 간단한 송별식이라도 하자고 하더구려. 다들 승반 심사 준비로 바쁜 시기이니 그냥 조용히 떠나겠다고 했는데도, 그게 말이 되느냐며 성화를 부려댔소. 그래서 이렇듯 내 입소 소식도 알릴 겸, 송별회도 얘기도 할 겸해서 온 것이오. 송별회는 내일 저녁이오.”
내 경우와 달리 친우들 중 누군가는 앞으로 소충광과 매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의 송별회일 것이다.
내가 흔쾌히 참가하겠다고 했더니 소충광이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음 날의 소충광 송별회에는 승반 심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친우들이 모두 모여,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소충광은 십이월 여드렛날 오전에 잠룡관을 떠났다.
* * *
어느새 섣달 열여드레다.
오늘도 오후에 거처에 머물며 회회심공과 천섬무를 연구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유겸이, 안에 있느냐?”
관주 육남춘의 목소리였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관주님.”
“어, 그래. 있었구나. 방해가 안 된다면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예……. 들어오십시오.”
곧 육남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빠르게 새 방석을 꺼내어 아랫목 쪽에 육남춘을 앉게 한 후, 서탁의 반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육남춘이 내 방을 눈으로 한 차례 천천히 둘러보더니 말했다.
“깔끔하구나.”
“아하하……, 틈틈이 청소하고 있습니다.”
내 대꾸에 육남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신입생들 가르치느라 수고가 많았지?”
“제가 가르쳐 봐야 뭘 얼마나 가르쳤겠습니까. 그저 약간의 도움을 준 정도에 불과합니다. 교관님들의 노고를 알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할까요?”
“허허, 내가 알기로는 네가 가르친 아이들의 실력이 쑥쑥 성장했다고 하던데? 그 정도면 웬만한 교관들보다 가르치는 데 더 소질이 있다고 평가될 정도로.”
“아하하, 그건 제가 맡은 아이들이 영민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인원도 몇 명 되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지도하기가 더 효율적이었던 면도 있습니다.”
“푸허허! 내가 네게 잠룡관의 교관 일을 맡길까 봐 그리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게냐?”
“하하,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허허, 네가 잠룡관 교관 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총교관한테서 들어서 알고 있다.”
육남춘이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저 너와 대화를 좀 나눌까 해서 온 것뿐이다. 네가 이번에 졸업한다는 걸 알고 있고, 지금은 방학이 며칠 안 남은 시점이니까.”
나흘 후인 스무이틀이 승반 심사일이니 잠룡관은 스무사흘부터 방학이다.
즉, 졸업을 통보한 내가 정식으로 잠룡관에 머물 수 있는 날도 사오일밖에 남지 않았다.
육남춘이 허공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본맹에 행사가 있어서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모이면, 나는 괜히 면목 없는 느낌이 들면서 눈치가 보이곤 했었다.”
동부지맹 잠룡관이 통합 잠룡대전에서 수년간 전혀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남들이 나한테 눈치를 줬던 건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 위축감을 느꼈던 게지. 작년에 유겸이 네가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랬었다. 그래서인지 네가 우승하던 당시의 광경이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구나. 그 광경은 아마도 내 기억 속에서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게야.”
“하하…….”
내가 민망한 웃음을 흘리자 육남춘이 말을 이었다.
“작년 통합 잠룡대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후로 우리 관도들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관도들이 전체적으로 더 열심히 수련하고 노력하게 되었지. 많은 관도들이 네가 어떻게 단련하고 수련해 왔는지를 연구하고, 그것을 본인들의 수련에도 반영하거나 참고했다고 하더구나.”
육남춘은 관주인 만큼, 갑반부터 계반까지 모든 교관들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총교관 노양홍으로부터 종합 보고도 받는다. 그러한 보고들을 통해 저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상위 반 관도들이 하위 반 관도들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좋은 쪽으로 달라졌지. 그 또한 네 영향일 것이고……. 그렇듯 유겸이 너는 네 주변뿐만 아니라 우리 잠룡관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관주인 나와 교관들이 노력해도 끌어내기 어려웠던 변화를, 관도인 네가 끌어낸 것이지.”
“아하하……. 제가 무슨…….”
“그러한 여러 이유로 나는 네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건, 네가 여러 차례 관도들을 지켜줬던 일이다. 삼청산의 귀령사객 사건, 태화지부 사건, 장강 사건 모두, 네가 아니었으면 여러 관도들이 죽었겠지. 지난여름에 있었던 여홍이의 장원에서 있었던 사건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렇듯 너는 네 친우들과 동료들을 구한 것뿐만 아니라, 내 소중한 제자들을 구한 게야.”
“관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 너 혼자 한 것이 아니겠지. 단지 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겠지.”
육남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관주 육남춘은 그 모든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 더 이상 부정해 봐야 의미가 없다.
내가 민망한 미소만 지어 보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졸업한다고 하니 이제는 내 속내를 털어놔도 될 듯하여 얘기하는 것이다. 그렇듯 나는 네게 고마운 게 너무도 많으니,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그 고마움을 조금씩이나마 갚아줄 생각이다.”
“헛! 아닙니다, 관주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교관님들과 관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사람은 제자인 접니다.”
그러자 육남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응원하고 지지하겠다는 뜻이니 그런 식으로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거라. 너는 이미 온 강호의 주목을 받는 무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네 행보를 주시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네가 의도치 않은 이상한 오해들이 발생할 수 있다. 설령 네가 그런 오해로 세인들에게 크게 지탄받고 있다 해도, 나는 네 입을 통해 직접 자초지종을 듣기 전까지는 추호도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를 사회적으로 보호할 것이다. 그런 역할로 돕겠다는 뜻이다.”
말만으로도 고마워서, 실로 오랜만에 감동을 느꼈다.
“그러니 유겸이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잠룡관에서 네가 보였던 모습만 계속해서 잘 견지해다오. 그 외에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마음껏 살거라. 네가 은둔자처럼 조용히 살든, 비룡처럼 날아오르든,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할 것이다.”
표정을 보니 비룡이라는 말은 내 별호를 인용해서 넣은 모양이다.
육남춘이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
“네 주변을 보면 아무리 봐도 은둔자처럼 조용히 살기는 틀린 것 같지만 말이다.”
이에 나도 체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후에 육남춘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관주님. 관주님의 따뜻한 가르침, 항상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육남춘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후에 육남춘은 잠시 더 머물다가 내 거처를 나섰다.
* * *
섣달 스무날이다.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거처의 방 안을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 미세한 기척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송유하다.
은잠술을 펼치며 온 것이다.
곧 마루 앞으로 다가온 송유하가 은잠술을 풀더니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저예요.”
“응, 들어와.”
이윽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은잠술 성취가 볼 때마다 느네?”
“할 때마다 재미있어요.”
그렇게 대꾸하는 중에도 눈으로 방 안을 한 차례 훑은 송유하가 말했다.
“생각보다 짐이 많네요?”
승반 심사일을 이틀 앞둔 오늘, 나는 잠룡관을 떠난다.
송유하는 내가 싸둔 짐들을 보고 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응. 그간 개인적으로 주워 모은 것들이 좀 있거든.”
연승휴의 동굴에 있는 귀중품들도 모두 내 거처로 옮겨뒀기에, 그것들도 보따리에 나눠서 싸둔 상태다. 그중에서도 아주 귀한 물건들은 내 행낭에 따로 넣어뒀다.
짐은 어제 일과시간에 혼자서 다 쌌다.
송유하가 거들겠다고 했지만 나는 추억을 되새기며 차분히 정리하고 싶다는 말로 사양했다. 사실은 귀중품이 너무 많아, 송유하가 그걸 보고 이상하게 여길까 봐 거절했던 거지만.
“이참에 저도 오라버니랑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차피 이번에 승반 심사도 안 치는데…….”
송유하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각 반별 종업식은 승반 심사를 치른 날 늦은 오후에 진행되며, 다음 날에 승반 심사 결과가 발표되면 곧장 방학이 시작된다.
한데 따로 종업식을 치르지 않는 반이 있으니, 바로 계반이다.
그렇기에 계반에서 승반 심사를 치르지 않는 관도들은 학기 말이 되면 눈치껏, 미리 잠룡관을 벗어나곤 한다.
그래서 나도 눈치껏, 미리 떠나려는 것이다.
계반이 이렇게나 좋다.
“하하, 며칠 후면 다시 보게 될 텐데, 뭘.”
내가 대꾸하자 송유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우들 여럿이 이번 방학을 포양호에 있는 내 거처에서 보낼 작정인데, 송유하는 그 친우들과 함께 오기로 했다.
짐을 조용히 마루로 옮기고는 혹여 빼놓거나 흘린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폈다.
그 후 마루에서 대기하기를 잠시, 공은림과 하조혁이 사립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둘 다 등 뒤에 커다란 행낭을 짊어진 채다.
“안녕하세요, 조교님.”
“그래, 어서들 와.”
공은림과 하조혁도 나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애초에 저 둘은 잠룡관과 관계없이 나한테 무공을 배우기로 되어 있는 아이들이다. 허죽신한테서 받아먹은 청심단이 있으니 책임지고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고로 공은림과 하조혁은 다른 변경 사항이 없는 한, 앞으로도 잠룡관으로 복귀하지 않고 포양호의 거처에서 나와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또다시 사립문이 열리더니 심산화가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 역시 등 뒤에 커다란 행낭을 짊어지고 있다.
심산화가 아이처럼 또박또박 인사했다.
“조교님, 안녕하세여…….”
“그래, 어서 와.”
심산화도 나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심산화의 경우 동부지맹 잠룡관에 찾아온 본래 목적 자체가 잠룡관도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잠룡관에 없으면 심산화 자신도 잠룡관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의중을 밝혀 왔다.
어차피 나는 그녀의 사연을 알고 있고, 이전부터 내가 돌보기로 마음먹었었기에 이렇듯 데려가는 것이다.
참고로 이 아이들 모두 이렇듯 그냥 떠나면 알아서 자퇴로 처리된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이 자퇴로 처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윤단영과 상의하여 장기 휴학의 형식으로 서류를 제출했다. 윤단영은 한동안 임시 교관으로서 제갈수광의 역할을 대신했으니 그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 중 누군가는 나중에라도 다시 잠룡관에 다니며 다른 인연들을 쌓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복학한 후에는 꼭 육 년 차를 다 채우지 않더라도, 나와 단목강처럼 사 년 차나 오 년 차에 졸업해도 되니까.
잠시 후, 또다시 사립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덩치의 왕철양이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조교님.”
“어서 와.”
“어제 말씀하신 장소에 마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지금 호운이가 말들에게 물과 여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청여홍이 준비해 준 연주상단 남창지점의 화물 마차다.
“꼭두새벽부터 너희들이 수고가 많네?”
“이 정도로 수고라니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준비되셨으면 가시죠. 제가 무서운 짐들을 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철양이 마루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녀석에게 묵직한 짐 두 개를 들게 했다.
나도 행낭을 메고는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었고, 송유하도 큼지막한 보따리들을 들었다.
왕철양과 송유하가 도와준 덕분에 모든 짐을 챙겨 들 수 있었다.
이후에는 모두가 왕철양을 따라 조용히 거처를 벗어났다.
나는 사립문을 벗어나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는 마지막으로 내 거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송유겸의 몸으로 깨어났던 게 이 년 전 구월 하순의 일이었고, 나는 그때부터 이 거처에 머물러왔다.
지금은 십이월 하순이니 이곳은 이 년 삼 개월간 내 보금자리였다.
그동안 이 거처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났고, 여러 추억을 쌓았고,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순간이 되니 이곳에서의 여러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그야말로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들을 기분 좋게 되새기며 사립문을 닫고 돌아섰다.
다 같이 조용히 경공을 펼치며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잠룡관의 정문으로 향하는 대로변의 공터였다.
도착하자마자 명호운이 인사하며 나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조교님.”
“새벽부터 수고가 많았지?”
“아닙니다. 이 정도로 수고는요.”
명호운의 옆에는 말 두 마리가 끄는 화물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짐칸이 천막처럼 되어 사방과 천장이 방수포로 가려진 형태의 화물 마차로, 신속한 운송이 가능한 소형이다.
양 측면과 후면을 가리고 있는 방수포에는 ‘연주상단’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화물 마차의 뒤쪽으로 가서 짐들을 실었다.
짐을 실으면서 보니 마차 안에는 왕철양의 커다란 행낭과 쌍도끼도 들어 있었다.
왕철양도 오늘 나와 함께 잠룡관을 떠나게 된다.
그도 심산화처럼 의지할 데 없는 신세이기에 나는 처음부터 녀석도 거둘 생각이었다. 녀석은 대장 기술도 있으니 도움 될 일도 많다.
들어보니 왕철양은 내가 올해 졸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이미 나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녀석의 경우에도 자퇴할 마음이었던 모양인데 내가 휴학으로 바꾸라고 했다.
마부석에 가서 앉은 후, 나와 같이 이동할 네 명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미리 말했듯 철양이, 은림이, 조혁이는 가는 길에 경공술 점검도 겸할 거야. 특히 은림이하고 조혁이는 장시간 빠른 속도로 경공을 펼치는 게 익숙지 않을 테니, 호흡 조절과 진기 조절에 집중하면서 달려야 할 거야. 달리다가 너무 힘든 것 같으면 전음으로 얘기하고. 알았지?”
“예.”
세 명이 거의 동시에 대꾸했다.
세 명 모두 지난 이 학기 동안 쾌류표를 열심히 익혔다.
이에 나는 나루터까지 가는 길에 아이들의 경공술 성취를 점검하여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다듬어 줄 생각이다.
이후에는 심산화에게 말했다.
“산화의 경공 실력은 따로 점검이 필요 없는 수준이지만, 너도 모두의 뒤에서 달리면서 보조를 맞춰 줘. 그러다가 누군가가 다소 지쳐 보이면 그 사람 옆으로 가서 같이 달려주는 거야. 알았지?”
심산화가 특유의 아이 같은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네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말고삐를 잡자, 옆에 서 있던 명호운이 인사를 건넸다.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 조교님.”
명호운의 경우에는 이번에 고향의 가족들이 옥산까지 오기로 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에 포양호의 내 거처로 온다는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명호운과 같은 동네에서 자란 원추엽도 명호운의 가족을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둘은 절친이니 가족끼리도 잘 알 것이다.
“그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예.”
이후에는 송유하가 아쉬움 깃든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며칠 뒤에 봬요, 오라버니.”
“그래, 누이. 그때 봐.”
이어서 내가 말고삐를 가볍게 한 차례 털자, 두 마리의 말이 동시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리는 잠룡관의 정문에 다다랐는데, 경비 무사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매우 아쉬워했다.
인원 점검과 보고를 하며 경비 무사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적당히 인사한 후에 천천히 마차를 몰아 잠룡관의 정문을 벗어났다.
언젠가는 잠룡관에 들를 일이 있겠으나 당분간은 들를 계획이 없다. 그렇다 보니 정문을 나서는 기분 또한 묘했다.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죽립을 눌러 썼고, 아이들에게도 죽립을 쓰라 지시했다.
잠룡관의 정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차 모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아이들도 경공 속도를 높였고, 우리는 여전히 동틀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부지런히 나아갔다.
나는 최소한의 휴식만 부여하며 아이들이 계속해서 경공을 펼치게 했다.
식사는 미리 준비한 건량과 육포를 주며 그것만 먹게 했고, 식사 시간 자체도 매우 짧게 잡았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은 식사 시간에도 빠르게 건량과 육포를 씹어 넘긴 후, 곧장 운기조식을 취하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도 그나마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건 역시 심산화뿐이었다.
어차피 연산촌 나루터까지만 이동하면 그 후부터는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된다.
소형 화물선이라고는 해도 소수의 선원과 우리 다섯 명이 이용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일 것이다. 청여홍의 평소 배포를 생각하면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결국 배에 오르고 나면 그 후부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다들 푹 쉴 수 있다.
그래서 훈련 삼아 아이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장시간 경공을 펼치는 게 힘들다는 걸 제대로 겪어 봐야, 평소에도 그것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며 수련할 수 있다.
밤늦은 시각까지 이동한 후에는 적당한 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느 정도 쉴 수 있게 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동하고 싶은데 말들도 쉬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은 지칠 대로 지쳤기에 서너 차례 운기조식을 취한 후부터는 다들 모닥불 곁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이쯤 되니 심산화마저도 적잖이 지친 기색이었다.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두 시진(4시간)이 지나기 전에 애들을 깨워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날 오시 초(오전 11시) 무렵에 연산촌 나루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를 세운 후 정박해 있는 배들을 훑어보니 연주상단의 깃발이 달려 있는 소형 화물선이 보이지 않았다.
청여홍의 일 처리가 이럴 리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혹시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다른 배들을 유심히 살필 무렵, 무인으로 보이는 삼십 대 사내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보니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었는지를 떠올리고 있는 순간, 그가 먼저 내게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송유겸 공자. 혹시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다행히도 그가 누구인지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이지요. 예전에 청여홍 소저와 함께 포양호의 정가장에서 합숙할 때 호위해 주셨던 무사들님 중 한 분이잖습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마주 포권해 보이자 무사가 더욱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오늘은 지점장님의 지시에 따라 송 공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내가 죽립을 쓰고 있기는 하나, 몰고 온 마차에는 연주상단이라는 글자가 드러나 있다. 그걸 보고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배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소형 화물선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없더군요. 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배입니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소형 화물선이 아니고 소형 유람선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 저게 어딜 봐서 화물선입니까?”
내가 농담조로 묻자 무인도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모릅니다. 지점장님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뿐이라.”
그리고 지점장 관대평은 청여홍의 지시에 따랐겠지.
“하여튼 청 소저를 누가 말리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말하자 무인이 대꾸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설령 아가씨께서 저 배를 요청하지 않으셨어도 결국 저 배가 왔을 겁니다. 송 공자를 모시는 일이니 저희 지점장님과 총관님께서도 각별히 신경을 쓰셨을 것이라.”
하긴 그것도 그렇다.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온 배를 물리고 다른 배를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지요. 고마운 마음으로 타겠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무인이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르시지요.”
아이들과 무인과 합심하여 마차를 배 위로 올리자, 선원들이 알아서 말들을 구석으로 데려갔다.
지난여름에 연주상단의 유람선을 타 봤던 왕철양과 심산화는 신난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공은림과 하조혁은 호화로운 내부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나는 넓은 방을 배정받아 그곳에 짐을 옮겼다.
배가 나아가기 시작한 가운데 우리는 선원들이 미리 준비해 준 식사로 맛있게 배를 채웠고, 이후에는 각자의 선실에 들어가서 푹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