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04
겨울이 지나고 삼월 초가 되자 봄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룡관은 삼청산 안에 있어 삼월 초라고 해도 쌀쌀했는데, 이쪽은 확실히 잠룡관보다 따뜻한 느낌이다.
겨우내 가득했던 비룡장의 수련 열기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초반보다 요즘의 열기가 더 뜨거운 것 같다.
분위기를 이끄는 이들은 역시나 송풍회의 인원들이다.
송풍회의 인원 중에서 남군호는 일류의 중후반이며, 추소륵, 종금무, 황보충, 강하령은 일류의 후반이다.
다들 기동타격조 시절에 수많은 실전을 치르고 여러 차례 한계를 겪으며 생사의 고비를 넘었던 정예들이다. 그 경험 덕에 이른 나이에도 이렇듯 경지가 높은 것이다.
일류의 후반에 있는 네 명 중에서는 역시 추소륵의 경지가 가장 높고, 그다음은 종금무, 황보충, 강하령 순이다.
추소륵이 많이 앞서 있고, 두 번째인 종금무를 황보충이 바짝 뒤쫓고 있으며, 강하령은 살짝 처져 있는 형국이다.
추소륵은 절정에 매우 근접한 상태다.
그와 비무를 꾸준히 해 왔기에 잘 안다.
추소륵은 아마도 눈앞을 뿌옇게 가리고 있던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절정의 형체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련에도 가장 적극적이다.
그렇듯 앞서가는 추소륵이 매우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다 보니, 종금무, 황보충, 강하령, 남군호로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로 소림의 무학은 기본적으로 속성형이 아니라 만성형이다.
이는 소림의 무학이 심오하여, 성취가 후반에 이르러야 비로소 전반적인 이치와 내재적 묘리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소림의 이름난 고수들이 주로 대기만성형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데, 그 점을 상기해 보면 추소륵이 어린 나이에도 저 경지에 와 있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저러니 소림이 속가제자임에도 예외를 두어 추소륵을 아끼는 것이다.
이미 절정에 오른 길초량, 단목강, 남궁설도 자주 어울려 수련하고 토론하며 실력 향상을 위해 애썼고, 선우린은 포연월, 원추엽과 주로 어울리며 수련했다.
명호운, 왕철양, 심산화는 아직 배울 게 많기에 잠룡관에서 그랬듯 내가 주기적으로 개별 지도를 해 줬다.
녀석들은 나한테서 오래 배웠기 때문인지 쾌류무의 성취들이 쭉쭉 상승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명호운의 발전이 인상적이다. 녀석은 현재 이류의 끝자락이니 조만간 일류에 오를 것이다.
명호운은 정세건, 정우립과도 자주 어울렸는데, 이는 세 사람이 창을 쓰기 때문이다.
정우립은 명호운의 수련을 돕고, 명호운은 정세건의 수련을 돕는 식의 협력 관계가 된 모양이다.
나는 공은림과 하조혁의 지도에 집중했다.
사실 암기술을 주 무공으로 익히는 일은 검법, 도법, 창법, 권법 등을 주 무공으로 익히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두 아이도 기초, 기본 단계를 배울 때는 상당히 어려워했었다.
그러나 암기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두 아이의 발전 속도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허죽신이 선별해서 보냈을 정도로 자질이 좋고, 내공까지 탄탄하게 받쳐 준 덕분이라 하겠다.
공은림과 하조혁은 이제 몇 보 이내의 근접 거리 안에서라면 빠르게 이동하며 암기를 날려도 어느 정도 적중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다.
두 아이는 보법인 쾌류보와 신법인 쾌류표의 성취도 많이 상승한 상태이며, 은잠술에도 이제는 약간이나마 익숙해진 상태다.
집중적으로 조련한 보람이 있다.
* * *
삼월이 하순으로 접어들며 봄기운이 더 내려앉았을 무렵, 비룡장에 말과 마차의 행렬이 찾아왔다.
선두에서 천천히 말을 몰고 온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송천광과 이청오였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 이 숙부님……!”
내가 놀라며 두 사람을 맞이하자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고 있었느냐?”
“유겸이, 오랜만이로구나.”
이에 나도 공손히 예를 취하며 인사했다.
“아버지, 이 숙부님, 어서 오십시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그래.”
“기별도 안 주시고 이렇듯 갑자기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 마차들은 대체…….”
송천광과 이청오를 따라온 마차는 총 다섯 대다.
한 대는 소형 마차고, 두 대는 평범한 중형 마차이며, 나머지 두 대는 대형 짐마차다.
소형 마차는 고급스러우니 안에 동난향 그 아줌마가 타고 있을 것 같다.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형 마차 두 대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총 여덟 명이 내렸고 모두가 여인들이었다.
중년 여인으로부터 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주로 장년층이 많았다.
마차에서 내린 여인들이 송천광의 뒤쪽에 도열하기 시작할 때쯤, 마차를 몰고 왔던 사내들 다섯 명도 여인들의 뒤쪽에 도열했다. 내게는 정면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송천광이 말했다.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들이다. 대부분 송가장에서 오래 일해 왔으며, 실력뿐만 아니라 됨됨이도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다. 이 총관과 여러 날 상의해 가며 선발했다. 네 거처에는 강호의 유명인사들이 종종 방문할 테니 더 신경을 써야 했지.”
송천광이 바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송풍장의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유하한테 들어 보니 이곳에 이미 귀한 손님이 많이 와 있다고 하여 미리 데려왔다.”
지금까지는 우리끼리 돌아가며 식사 및 설거지 당번을 하고, 알아서 청소하며 지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도 슬슬 집안일을 해 줄 일꾼들을 구하려던 차였다.
문제는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룡장에는 이미 유명한 후기지수들이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강호의 유명인사들이 종종 방문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곳의 일꾼은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쉬울 리 없다.
그러던 차에 송천광이 이렇듯 일해 줄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
이청오와 함께 엄선한 모양이니 더욱 믿음이 간다.
일꾼들은 여인 여덟 명에 사내 다섯 명으로, 총 열세 명이다.
송풍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중에는 일꾼이 더 필요하겠지만, 현재의 비룡장에는 전혀 부족함 없는 인력이다.
도열한 이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내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봬요, 둘째 도련님. 잠룡관에 입관할 당시만 해도 아직 앳된 모습이셨는데, 몇 년간 못 뵙는 새 늠름한 대장부가 되셨네요. 게다가 둘째 도련님은 이제 명성 높은 강호의 고수시죠. 정말 장하세요. 그런 둘째 도련님을 모시게 되어서 모두가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열심히 할게요.”
중년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가 폈다. 그러자 도열해 있던 다른 일꾼들도 그녀를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가 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내가 얼떨결에 대꾸하자 중년 여인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을 잃으셨다는 얘기는 진즉 들었지만 역시나 저희를 전혀 못 알아보시는군요.”
“아, 그게……,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녜요. 죄송하시다뇨.”
내가 미소를 짓자 중년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계서댁이라고 해요. 앞으로 부족하나마 이 사람들을 관리하게 되었으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중년 여인은 ‘계서’라는 지명이 들어가는 지역 출신일 것이다. ‘계서촌’이라든지, ‘계서리’라든지, ‘계서골’이라든지.
참고로 계서댁과 십 대 중후반의 소녀는 생김새가 닮았다. 모녀지간인 듯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대꾸하자 이청오가 말했다.
“유하한테 들었는데 이곳의 외원에는 여러 사람이 머물 만한 별채가 세 곳 더 있다지? 그 별채 중에서 한 곳을 이들이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
“세 곳 중에서 한 곳은 약간 멀게나마 호수가 보여서 나름의 운치가 있습니다. 그곳을 사용하시면 될 듯합니다.”
내가 대꾸하자 계서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도, 도련님, 저희에게 그런 좋은 곳을 내어 주실 필요는…….”
“이곳은 제 지인의 장원으로, 우리는 임시로 머무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몇 달간 임시로 머무는 거, 이왕이면 모두가 경치 좋은 곳에 머물면 좋잖습니까. 깔끔하게만 사용하면 될 일입니다.”
내 말에 계서댁을 포함한 일꾼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감격한 표정들이다.
송천광에게 얘기해서 송풍장의 일꾼 숙소도 잘 지어 달라고 해야겠다.
이청오가 말했다.
“그리고 이곳 내원의 동쪽 별채에는 식당, 조리실, 연회장 등이 있고, 방도 두 개가 딸려 있다고 들었다.”
동쪽 별채의 숙직실 용도로 설계했던 방들이다.
“예.”
내가 대꾸하자 이청오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계서댁이 여자들을 이끌고 가서 동쪽 별채를 쭉 한번 둘러보시오.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일할지에 대해 감을 좀 잡을 수 있을 테니.”
“예, 총관님.”
여인들이 동쪽 별채 쪽으로 이동하자 이청오가 이번에는 남자 일꾼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짐마차를 동쪽 별채로 이동시키고 여자들이 얘기하면 부엌 짐들을 날라주게. 이후에는 숙소로 가서 모두의 짐을 내려놓은 후 마차와 말들을 정리하도록 하고.”
“예, 총관님.”
남자 일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쯤, 비룡장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왔다.
오후 수련을 하다 말고 달려온 모양새들인데, 아마도 송천광이 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내 부친이 비룡장에 처음으로 방문했으니 예의상 바로 인사하러 달려왔을 것이다.
아는 얼굴들이 많아서인지 송천광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담겼다.
“아이고오! 이게 누구신가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제부터는 저 ‘아이고’ 소리를 계속 듣게 되겠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장주님.”
“안녕하세요, 장주님.”
송천광은 인사를 건네오는 이들의 호칭을 일일이 불러 가며 화답했다.
“아이고오. 단목 공자, 길 공자, 남궁 소저, 선우 소저, 그리고 포 소저와 원 공자, 귀여운 심 소저도 있고 또…….”
송천광이 계반삼조의 아이들 다섯 명과 공은림, 하조혁의 이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일전에 잠룡관 접객당에서 모두 함께 어울렸었다고는 해도, 명문 또는 명가 출신이 아니면 굳이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인데.
송천광은 종금무와 강하령도 알아봤다.
기동타격조 활동을 마치고 잠룡관으로 돌아왔을 당시, 우리는 단상 위에 올라 모든 관도들 앞에서 표창장을 받았었다. 그 후에는 종금무가 졸업을 기념하여 연설했었고 우리는 계속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송천광은 그날 잠룡관에 찾아와서 그 광경을 오래 구경했기에 두 사람의 얼굴도 알아본 것이다.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눈 송천광이 초면인 인물들을 일별하며 내게 물었다.
“자, 이제 내가 처음 보는 분들을 소개해 주겠느냐?”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하다.
내 지인들이라면 보통 인물들이 아닐 것을 알기에 저러는 것이다.
먼저 윤단영부터 소개했다.
“이분은 제갈수광 교관님과 혼약한 윤단영 교관님입니다. 원래 서부지맹의 교관님이셨습니다. 제갈 교관님이 복귀하시기 전까지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머물고 계시는 겁니다.”
“아이고, 제갈 교관님의……! 처음 뵙겠습니다요, 윤 교관님.”
“처음 뵙습니다, 송 장주님. 이렇듯 뵙게 되어 너무도 반갑습니다.”
윤단영이 대꾸하자 옆에 있던 이청오가 작은 목소리로 송천광에게 설명했다.
“윤 교관님은 현 화산파 장문인의 제자십니다. 근 백 년간 화산이 배출한 여제자 중에서 최고의 기재로 통하는 분입니다.”
송천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화, 화산파……! 자, 장문인의 제자……!”
동부지맹 권역에는 소위 구파일방이라고 불리는 명문거파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동부지맹 권역에 사는 일반인들은 명문거파 출신의 인사를 직접 볼 일이 별로 없다.
특히 화산파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중의 명문이며, 현 무림맹주가 속한 문파이기도 하다. 그런 화산파의 일반 제자도 아니고 장문인의 제자라고 하니 저렇듯 놀란 것이다.
윤단영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유겸이가 저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아이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령 저 녀석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건 다 제갈 교관님, 윤 교관님 같은 분들의 훌륭한 지도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저런 말은 참 잘한다니까.
그래도 효과는 확실해서 윤단영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송천광에게 다음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기동타격조 시절의 전우인 남군호 공자입니다. 태산파 장문인의 제자입니다.”
“오오오! 태산파의……! 정말 반갑소, 남 공자.”
“안녕하십니까, 장주님. 송 공자에게 신세 지고 있습니다.”
“허헛! 앞으로도 얼마든지 신세 지셔도 되오.”
다음에는 황보충을 소개했다.
“이쪽도 기동타격조 시절의 전우인 황보충 공자입니다. 황보세가의 소가주입니다.”
“황보세가의 소가주시라니……! 반갑소, 황보 공자.”
황보충이 대꾸했다.
“하핫! 안녕하십니까, 장주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고, 영광은 무슨. 나야말로 영광이오.”
이후에는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추소륵 공자입니다. 역시나 기동타격조 시절의 전우이며…….”
그러자 송천광이 내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추, 추소륵이라는 이름이면 혹시 소림의……?”
일부러 추소륵을 마지막으로 소개한 건데, 표정을 보니 역시나 이름만 듣고도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다.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내게 저렇게 묻고 있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내 대꾸에 송천광이 눈을 부릅떴다.
“허어어! 소림의 자랑이라는 추소륵 공자마저 이곳에 와 계실 줄은……!”
추소륵은 남궁찬, 남궁묵 이후 시대의 후기지수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후기지수였다. 가뜩이나 소림 출신이다 보니 송천광이 저렇듯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추소륵이 반듯하게 예를 취하며 송천광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주님.”
“아이고, 정말 반갑소, 추 공자아……!”
“기동타격조 시절에도 송 공자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지금도 지고 있습니다.”
“신세는 무슨. 그런 생각 말고 편하게,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시오. 허허! 허허허!”
아주, 신나셨네.
우리가 그렇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던 순간이었다.
“응애애애! 응애애애애애!”
갑자기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니 모두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울음소리는 고급스러운 소형 마차 안에서 들리고 있다.
동난향이 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 마차다.
“웬…….”
내가 의아해하며 그 소리를 낼 때쯤, 이청오가 서둘러 마차의 옆으로 이동하더니 말했다.
“림아가 깬 모양이군요. 문 열어드릴까요?”
“아……, 네, 총관님.”
마차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난향이 아닌 진양옥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곧 이청오가 마차의 문을 열자, 안에서 진양옥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양옥은 그 와중에도 울고 있는 아이를 열심히 달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형 마차에서는 왜 사람이 안 내리는지 의아했었는데, 저 아기가 깰까 봐 조용히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어머니…….”
내가 진양옥을 부르자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유겸이 오랜만이구나.”
서둘러 다가가면서 보니 진양옥이 안고 있는 아이는 이삼 개월쯤 되었을 법한 갓난아기였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데 그 아기는…….”
그러자 진양옥 대신 이청오가 대꾸했다.
“네 동생이다.”
“예에에?”
“너희 사 남매의 늦둥이 막내라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유하의 친동생인 거고.”
“그, 그렇다는 건…….”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진양옥에게 한 차례 시선을 준 후, 고개를 돌려 송천광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커흠! 흠!”
송천광이 내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허……! 세상에나, 기운들도 좋으시지.
하긴, 송천광의 나이는 아직 사십 대 중후반이고 진양옥은 삼십 대 후반이다. 아이를 낳기에 문제가 안 되는 나이들이기는 하다.
진양옥에게 물었다.
“이 숙부님께서 아까 ‘림아’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러면 이 아이의 이름이…….”
아이는 잠깐 울더니 울음을 그친 상태다.
“응. 유림이야, 송유림. 여자아이고. 자, 안아 봐.”
“예……?”
“오라버닌데 안아 봐야지.”
“이, 이렇게 어린 아기를 안아 본 적이 없어서…….”
“괜찮아. 내가 하듯이 목을 받쳐서 이렇게.”
그 후에 진양옥이 아기를 내게로 내밀었다.
받기 직전에 물었다.
“우, 울면 어쩝니까.”
“이 시기의 아기치고는 잘 안 우는 편이야. 울어도 금방 그치고. 유하도 그랬어.”
송유하의 성격은 갓난아기 때부터 무덤덤했던 건가.
어쨌거나 아기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안았는데, 신기하게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더 좋아진 느낌이다.
“웃네. 유겸이한테 안기니까 좋은가 보다.”
“하하, 그, 그렇습니까.”
“어때, 예쁘지?”
“예, 진심으로.”
안은 채로 가까이서 보니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송천광의 외모와도 여러모로 겹치지만, 내가 볼 땐 진양옥을 더 많이 닮았다.
송유하가 진양옥을 많이 닮았음을 상기하면 이 아기도 장차 미모로 이름 좀 날리지 않을까 싶다.
진양옥이 말했다.
“유하가 갓난아기일 땐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었는데, 얘는 그래도 예쁘게 생겼지 뭐니.”
보아하니 농담이 아니다.
그녀에게 대꾸했다.
“별로 안 예뻤다던 그 누이가 커서 잠룡오화가 됐는데, 그렇다면 얘는 장차…….”
그러자 진양옥이 수습하듯 대꾸했다.
“아, 그, 그게, 유하처럼 크면서 예뻐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크면서 안 예뻐지는 경우도 있고…….”
그때쯤 송천광이 진양옥에게 말했다.
“바람이 좀 부는 날이라 밖에 오래 있으면 애한테 좋지 않소.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에 진양옥이 내게서 아기를 받아 들고 본채의 현관 쪽으로 향하니, 윤단영을 포함한 여자들이 온갖 탄성을 내며 아기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모두를 먼저 들여보낸 후에 들어가려고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단목강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늦둥이 누이가 생겼으니 송 공자도 이제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구려.”
“하하, 너무 갑작스러워서 얼떨떨합니다.”
그러자 단목강이 농담조로 말했다.
“조금 더 지내면서 보면 귀여워 죽을 것이오. 그러니 심장 관리 잘하시오.”
그도 겨울에 단목세가에 가서 어린 단목연을 보고 왔으니 저 말을 하는 것이다.
“하하, 그래야겠습니다.”
일 층 거실로 들어와 보니 여자들은 아기를 서로 안아 보느라 난리가 나 있었다.
평소 약간 무뚝뚝한 느낌인 남궁설마저도 아기를 안고는 좋아 죽는 모습이니 말 다 한 것이다.
들어보니 송유림은 정월 닷샛날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이 삼월 스무이틀이니 태어난 지 두 달하고 보름 남짓 된 것이다.
송유림의 출생일로부터 열 달을 빼 보면 작년 삼월 초순으로, 내가 기동타격조 활동을 마치고 잠룡관으로 복귀했을 즈음이다.
송천광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유겸이, 나 좀 보자.”
“예.”
따로 할 말이 있는 분위기였기에 그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며 송천광이 말했다.
“일전에도 잠깐씩 와서 구경했었는데 정가장이 터가 참 좋단 말이야. 듣자 하니 이쪽 구역은 네 지인의 장원이라지?”
“예.”
“정 장주님한테서 들었는데 정가장에서 이쪽 대지를 판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시더구나. 아쉽구나. 미리 알았으면 이 땅부터 매입해서 이곳을 네 거처로 해 줬을 텐데.”
“아하하……. 옆에 짓고 있는 거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부지가 훨씬 넓어져서 놀랐습니다.”
“네 거처에는 앞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올 테니 규모가 어느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
“……감사합니다.”
“그쪽 장원의 이름을 송풍장이라고 지었다는 건 알고 있지? 유하가 알고 있었으니 너도 알고 있겠지?”
“예. 정 장주님한테서 들었습니다.”
내 말에 송천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로 들어서자 송천광이 말했다.
“서재가 굉장히 넓구나.”
“지인이 서재 겸, 집무실 겸, 회의실로 쓰시려고 이렇게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곧 송천광과 회의 탁자를 마주한 채로 앉은 후에 말했다.
“그나저나 작은어머니가 회임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런 건 말씀을 해 주셔야…….”
송유하도 그동안 관련된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
비밀로 할 종류의 얘기도 아닌지라, 그녀가 알고 있었음에도 내게 밝히지 않았을 리는 없다.
“유하 엄마가 너희들의 잠룡관 생활을 방해하기 싫다며 알리지 말자고 하더구나. 림아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유하 엄마가 산후에 몸이 좀 안 좋아서 한동안 몸조리에만 집중했다. 그때도 유하 엄마가 자기 몸조리 끝낸 후에 알리고 부르자고 하기에 그 뜻에 따른 것이다.”
송천광이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백이와 유상이는 송가장에 왔다가 림아가 태어난 걸 알게 됐고, 유하는 개학 후에 유상이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네게 아예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이렇듯 우리가 직접 찾아올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려고 너를 보자고 한 것이고.”
“무슨 얘기이시길래…….”
“유하 엄마는 앞으로 계속 너와 같이 살 것이다.”
“예에에?”
내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자 송천광이 말했다.
“너는 장차 큰일을 하게 될 테니 가족 중 누군가는 곁에서 너를 챙겨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네가 독립한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유하 엄마도 너와 같이 분가시키기로 마음먹었었다. 너도 유하 엄마를 잘 따르고 유하 엄마도 네게 잘하는 듯하여 그렇게 결정했지. 아, 물론 유하도 졸업하면 시집가기 전까지는 이쪽에서 지내게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송천광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나 너도 싫지 않은 모양이구나. 짐작은 했다만.”
진양옥과 송유하라면 당연히 환영이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입니다.”
“나중에 유하가 시집갈 때를 염두에 둔 결정이기도 하다. 물론 시댁 측에서도 사정을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사돈 부인이 송가장의 시녀로 있는 것보다는 너로 대표되는 송풍장의 어른으로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 아니냐.”
송천광 나름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결정했음을 알 것 같다. 예전에는 철없는 어른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아버지답다고 할까.
“낫다마다요.”
“그리고 나와 이 총관도 최소 몇 달간 이곳에 머물 것이다. 송풍장의 공사를 직접 챙기기 위해서다. 너와 친우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신경 쓸 테니 그리 알거라.”
그 말에도 다소 놀랐지만, 순순히 대꾸해줬다.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본채의 이 층에 있는 방들은 가족들이 왔을 때 이용하라고 비워뒀었다. 그 방들을 쓰게 하면 된다.
“네 형도 졸업해서 송가장으로 돌아왔다. 네 형은 장차 송가장을 이끌어가야 하니 이 기회에 연습을 시키는 목적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으로 일꾼들을 많이 데려온 탓에 송가장에서도 따로 일꾼을 구해야 하는데, 그 일꾼들도 직접 구해 보라고 했다.”
“아…….”
생각해 보니 송유백도 작년에 육 년 차였다. 이번에 졸업했을 것이다. 놈에 대해 워낙 신경을 안 쓰고 살다 보니 잊고 있었다.
송천광이 할 얘기를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네 친우들을 보니 내가 다 든든하더구나. 네가 필요한 게 있거나, 친우들이 필요하다는 게 있으면 뭐든 애비에게 얘기하거라. 최대한 들어줄 터이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송천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재를 벗어났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가 사라진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몇 달 전 잠룡관의 접객당에서 봤을 때도 송천광의 변화를 느꼈었는데, 방금 이렇듯 대화를 나눠 보니 그 변화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송천광의 저러한 변화는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오늘 이렇듯 송천광이 일꾼들을 데려왔으니 앞으로는 다들 수련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잘됐다.
믿을 수 있는 진양옥이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된 것도 좋고, 아기 송유림이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도 즐거울 것이다.
나중에 송유림이 네댓 살쯤 되면 직접 무공을 가르쳐줘도 재미있겠지.
아예 잠룡관 입관 전에 절정고수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거다.
그리고 그날 저녁.
놀랍게도, 언제 돌아올지 전혀 기약이 없었던 제갈수광이 불쑥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