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07
다시 식사를 이어가던 중에 남궁찬이 말했다.
“오랜만에 유겸이 보니까 그냥 넘어가기가 싫네? 반주 삼아 술이나 한잔하자.”
남궁찬도 술을 퍽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음주 쪽으로도 제갈수광과 장단이 잘 맞는다.
그런 남궁찬이니 말은 반주라고 하고 있어도 낮술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에 내가 술과 잔들을 갖다 달라고 하자 이화미는 잔이 네 개임을 알고 의아해했다.
평소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내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려고 하니 의아한 것이다.
이화미는 아직 남궁찬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라 그녀에게 말해줬다.
“이분이 바로 남궁세가의 소가주셔. 그런 분이 같이 한잔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당연히 함께 마셔 드려야 하지 않겠어?”
이화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비록 일반인이라고는 해도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를 리 없다.
이화미가 빠르게 읍하더니 서둘러 창고 쪽으로 향했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내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당시의 이야기를 해 줬다.
남궁찬과 백송학이 듣고 싶어 했다.
그간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는데, 그래도 나한테서 직접 듣고 싶다나.
얘기를 듣는 동안 남궁찬과 백송학은 여러 차례 탄성을 내뱉었고, 잠룡관에서 이미 한 차례 들었던 소충광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모습이었다.
남궁찬에게는 더 자세히 얘기해 줄 내용이 있지만,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이니 평범한 수준에서만 얘기해 줬다.
어차피 남궁찬은 남궁설한테서 따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났지만 남궁찬은 반주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나, 저럴 줄 알았지.
그래서 우리는 아예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식당에는 일꾼들이 종종 드나들다 보니 대화할 때 종종 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겸이 넌 뭐가 이렇게 볼 때마다 확확 달라지는 거야? 발전 속도가 그렇게까지 빠른 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남궁찬이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내 경지가 높아진 것을 알아보고 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남궁찬은 만날 때마다 항상 나를 유심히 관찰한다. 대놓고 관찰하는 건 아니나, 깊은 눈빛으로 은근히 관찰한다.
그로 인해 내 상태 변화를 금세 알아채는 것인데, 무공마저 고강하다 보니 더 잘 알아챌 수밖에 없다.
부인해 봐야 거짓말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두루뭉술 인정해 줬다.
“이래저래 약간의 기연과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곧장 화제를 남궁찬과 백송학 쪽으로 돌렸다.
“형님들도 마지막에 뵀을 때와 비교하면 기운이 엄청나게 강건해지셨군요. 굳이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큰 변화가 자연스레 전해집니다.”
표현을 유하게 해서 강건하다고 한 것이지, 실은 둘 다 잘 벼린 칼날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다.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안광 또한 더 형형해졌다.
남궁찬이 대꾸했다.
“장기간 고난도 작전을 수행하며 강도 높은 실전을 치러 온 결과지. 우리 실력으로도 힘겹고 버거웠던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남궁찬은 특히 남궁설과 내가 죽은 줄 알고 분노하여 맹렬히 전투에 임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실력 상승의 폭도 남궁찬이 가장 큰 느낌이다.
어쨌거나 제갈수광뿐만 아니라 남궁찬과 백송학의 실력이 크게 성장한 건, 내 입장에서는 매우 든든한 일이다.
또다시 위험이 닥쳐오면 나도 저 세 사람과 함께 주축이 되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야기꽃이 피던 중에 백송학과 소충광이 소피를 보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남궁찬이 술잔을 비우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유겸아, 너와 설아에 관한 소문 말인데.”
“예? 소문이라뇨?”
내가 되묻자 남궁찬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너희들은 이곳에서만 지내서 몰랐겠구나.”
“소문이라니, 무슨…….”
“너와 설아가 생존해서 복귀한 일로 너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일 거라는 식의 소문이 났거든. 아무리 상황이 어려웠다 해도, 다 큰 남녀가 제법 오랜 기간 단둘이 지냈는데 설마 아무 일도 없었겠느냐는 거지. 가뜩이나 선남선녀가 서로 도우며 여러 난관을 극복했을 테니 온갖 애틋한 감정이 싹트지 않았겠느냐며.”
처음 듣는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날 수도 있다는 예상 정도는 했었다.
“아하, 역시 그런 소문이 난 거군요.”
“예상은 했다?”
“예. 당시의 상황 자체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법한 상황이었잖습니까. 그러니 말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화제일 수밖에 없죠.”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저와 설 매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잘못된 소문이라고 일축하시면 됩니다.”
내 대꾸를 들은 남궁찬의 얼굴에 다소 의외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뭐,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기는 하니까.
남궁찬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말을 안 믿겠지?”
“하하, 그게 참 곤란한 부분이죠. 아무 일도 없었다며 강력하게 반박해 봐야 믿어 주기는커녕 의심만 더 커질 테니…….”
“어찌 됐건 우리 설아는 이미 시집 다 간 셈이네.”
“아하하…….”
이건 애초에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잠시 후 남궁찬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로?”
이에 단호하게 대꾸해 줬다.
“예. 전혀요.”
“아, 그래…….”
대꾸하는 남궁찬은 뭔가 아쉽다는 기색이었다.
저기요? 지금 뭘 아쉬워하고 있는 겁니까?
그 상태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솔직히 우리 설아, 예쁘잖아? 너한텐 별로야? 여자로 안 느껴져?”
아니, 이보쇼! 지금 대체 뭘 따지고 있는 거요? 제정신이오?
물론 농담조였기에 나는 대꾸 대신 낮게 한숨만 내쉬었다.
남궁찬이 민망한 미소를 보이며 얼버무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유겸아.”
“아하하, 예.”
“그래도 그렇게까지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형도 상처받는다고.”
표정 관리가 좀 안 됐던 모양이다.
“아하하, 한심이라뇨. 오해십니다, 형님.”
“음, 그래도 하나만 물어보자. 정말로 설아가 여자로 안 느껴지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래.”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으이그, 하여간.
나와 남궁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저 속내를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현재 나는 나와 내 주변의 힘을 키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고로 연애나 혼인 같은 사안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 건 먼 미래에나 생각할 문제다.
천마신교 때문이다.
혈교와 연결된 만큼, 천마신교에서도 십중팔구 강시술이나 귀갑강시공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위지광 놈은 활용하고도 남을 놈이다.
게다가 혈교는 증운생의 사파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천마신교에서도 그 당시 사파의 십 대들이 복용했던 공력 증폭 약물 따위를 활용할 수 있다.
당시의 약물은 공력을 이삼 할 정도 증폭시켜 주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위지광 놈이라면 그보다 증폭량이 훨씬 큰 약물을 만들어 마인들에게 복용시킬 수도 있다.
그 정도면 후유증도 어마어마할 것이고 진원진기에도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진원진기에 큰 타격이 가면 생명력이 약해진다.
하지만 그런 걸 대수로이 여길 위지광 놈이 아니다.
천마신교가 강시술, 귀갑강시공, 공력 증폭 약물 등을 활용하면, 사파와 혈교에서 활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제작하거나 활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체계와 여건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게 바로 천마신교다.
나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들의 실력을 어떻게든 끌어 올리려 노력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천마신교와의 싸움은 나 혼자만 강해지고 나 혼자만 동분서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정예, 최정예 전력을 늘려서 탄탄한 조직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웬만한 위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측간에 갔던 백송학과 소충광이 돌아왔고 낮술 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들 오랜만이다 보니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한참 대화의 꽃이 피던 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화미가 들어섰다.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응? 손님?”
“네. 제갈건이라는 성함을 쓰는 공자신데, 지금 안마당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뭐어? 제갈건 공자라고? 정말?”
“네.”
“얼른 이쪽으로 모셔.”
이화미가 짧게 읍하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주인이니, 일어나서 연회장의 문 앞으로 다가가 제갈건을 기다렸다.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복도 에 제갈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 공자……!”
내가 놀란 표정으로 제갈건을 부르자 그가 매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송 공자! 오랜만이오! 이렇게 송 공자를 보게 되는구려!”
“오랜만이오, 제갈 공자. 어서 오시오. 방금 제갈 공자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지 뭐요.”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이거, 갑자기 찾아온 모양새가 되어서 괜히 미안하구려.”
“미안하다니, 별말씀을 다 하시오. 잘 오셨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매우 반가웠다.
인사를 나눈 후 곧장 제갈건을 연회장 안으로 이끌었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제갈건이 술자리 쪽에 있는 남궁찬 등을 발견하더니 놀라며 말했다.
“어? 찬 형님……?”
“건아, 어서 와.”
“와아! 형님이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너를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네?”
백도를 대표하는 남궁세가와 제갈세가가 서로 친분이 깊고 왕래가 잦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두 사람은 소가주들이기도 하니 친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제갈건이 이어서 백송학과 소충광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백 호법님도 계셨네요? 소충광 공자도 계시고.”
“안녕하셨소, 제갈 공자.”
“어서 오시오.”
저들은 아마도 작년 통합 잠룡대전에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대강의 인사가 끝나자 남궁찬이 제갈건에게 물었다.
“밥은 먹었어?”
“예. 간단히 요기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럼 건이도 이리 와. 이리 와서 앉아. 술과 안주로 배 채우면 되지.”
참으로 술꾼다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대낮부터 웬 술자린지요?”
“아, 우리도 점심 때쯤 이곳에 도착했거든. 오랜만에 유겸이를 만나는 거라서 이렇듯 낮부터 회포를 풀고 있는 거지.”
제갈건이 자리에 앉자 이화미가 잔과 젓가락 등을 챙겨왔다.
제갈건에게 물었다.
“한데 제갈 공자가 이곳에는 어인 일이시오? 제갈 공자가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나뿐만 아니라 다들 궁금한 표정이었다.
제갈건이 대꾸했다.
“아, 사실 나는 이곳에 송 공자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소. 그저, 새로 가정을 꾸리신 당숙과 윤 교관님께 인사드리러 왔던 길이오.”
“아하.”
그의 당숙은 제갈수광이다.
참고로 제갈건도 작년에 육 년 차라서 올해가 졸업이었다. 그래서 이렇듯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당숙 댁에 찾아갔더니 대문이 잠겨 있고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더구려. 언젠간 오시겠지 하고 기다렸소. 한데 소년 두 명이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더니, 내게 무슨 용무가 있어서 그 집 앞에 있는 거냐고 묻더구려. 그래서 친척 집에 찾아왔다고 대꾸해 준 후, 이 집 부부가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아느냐고 되물었소. 그랬더니 모르는 사람한테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하더구려.”
소년들 두 명은 정세건과 촉휘명일 것 같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믿음직스러웠소. 그래서 그냥 내 정체를 밝혔더니 소년들이 내 이름과 우리 세가의 이름을 아는지, 깜짝 놀라더구려. 그러면서 당숙과 윤 교관님이 출타 중이시라 닷새 후에나 돌아오실 거라고 말해 줬소. 그럼 닷새 후에 다시 와야겠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그중 한 소년이 ‘혹시 유겸이 형 알아요?’ 하고 내게 묻는 것이오.”
제갈건이 바로 말을 이었다.
“소년의 입에서 갑자기 송 공자의 이름이 나오니 깜짝 놀랐소. 반가운 마음에 서로 아는 사이고 친분도 있다고 대꾸해 줬소. 그랬더니 소년들이 이곳으로 가 보라고 하더구려. 송 공자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서.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달려온 것이오.”
그제야 다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찬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랬구나. 어쨌든 잘 왔어, 건아.”
모두가 잔을 들어 건배한 후에 술을 마셨다.
그 후, 내가 남궁찬부터 잔을 채워 주기 시작하는데 제갈건이 말했다.
“아니, 송 공자,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원래라면 송 공자는 오 년 차로서 잠룡관에 있어야 정상이잖소. 한데 지금 이러고 있다는 건, 사 년 차에 졸업을 해 버렸다는 얘기 같은데…….”
“그렇소.”
“송 공자는 참 예측불허시구려. 작년 통합 잠룡대전 때 볼 수 있으려나 했더니, 강력한 우승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참하시고. 잠룡관은 사 년 차에 툭 졸업해 버리고.”
“하하, 그렇게 되었소.”
“게다가 작전을 수행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질 않나. 그랬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리질 않나.”
“걱정을 끼쳤구려.”
“그간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이오? 자세히 좀 듣고 싶구려.”
이에 나는 한동안 제갈건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얘기해 줘야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나에 관련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제갈건이 물었다.
“한데 당숙과 윤 교관님이 어디 가셨는지 혹시 아시오?”
“아, 두 분은 합숙 훈련에 가셨소.”
“엥? 합숙 훈련?”
이에 제갈건에게 비룡장에 머물고 있는 친우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다.
친우들의 면면을 들은 제갈건은 놀란 반응이었다.
“잠룡일대의 기동타격조 출신들은 이런 식으로 단합하고 있었구려. 우리 잠룡이대의 기동타격조 출신들은 졸업 후에 연락조차 뜸한데……. 확실히 송 공자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기 때문이겠구려. 이렇듯 송 공자가 거처를 얻자마자 다들 모여든 것을 보면.”
참고로 잠룡일대는 동부지맹과 북부지맹의 관도들로 구성됐었고, 잠룡이대는 서부지맹과 남부지맹의 관도들로 구성됐었다.
제갈건에게 대꾸했다.
“하하, 당시의 조장님이었던 단목강 공자가 북부지맹 쪽 조원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낸 덕분이오. 나는 그냥 장소만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 대단한 문파와 가문의 후예들이 모일 장소가 없어서 굳이 이곳에 모였을까. 결국은 송 공자 때문에 모인 거지.”
짜식이 할 말 없게 만드네.
“아하하…….”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자 제갈건이 말했다.
“어쨌든 송 공자,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숙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네댓새만 신세 좀 집시다.”
“편히 머무시오.”
“고맙소.”
저녁때는 송천광과 이청오가 연회장의 술자리에 합류했다.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제갈세가의 소가주가 방문한 터라 송천광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는 역시나 ‘아이고’ 소리를 남발하며 부지런히 굽신거렸다.
예전의 송천광을 생각하면 요즘 보이는 저자세는 그래도 못 봐줄 수준은 아니다. 그래서 그나마 오글거림도 덜했다.
그렇듯 낮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지다가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오전에는 남궁찬이 비무를 제안해 왔다.
“작년에 제갈 형님과 네가 둘이서 수련 목적으로 비무를 자주 했다고 들었어. 제갈 형님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너와 그런 식의 비무를 꾸준히 이어가고 싶은데.”
남궁찬 같은 고수와 비무를 꾸준히 이어 가는 것은 당연히 내게도 큰 도움이 된다.
“좋죠.”
흔쾌히 승낙한 후 곧장 실내 연무장으로 향하여 비무를 시작했다.
남궁설과 수련을 자주 했던 나는 남궁세가의 무공이 어느 정도는 눈에 익은 상태다.
그러나 남궁찬을 상대해 보니 전체적인 무공의 궤만 비슷할 뿐,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랐다.
남궁찬이 품고 있는 기세는 태산 같았고, 그가 펼쳐내는 한 수, 한 수에서는 더없이 강력한 압력이 전해져 왔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전투 성향이었다.
고수들은 대부분 적절한 선에서 공수의 균형을 찾게 마련인데 남궁찬은 달랐다.
체감상 공(攻)이 팔 할 이상으로, 회피를 포함한 수(守)의 비율은 채 이 할이 되지 않는 듯했다.
강맹함과 예리함을 모두 갖춘 공격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쉼 없이 쏟아지는데, 눈앞이 번쩍번쩍하는 느낌이었다.
뇌룡이라는 별호를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붙였다.
그렇다 보니 역공을 취할 틈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다른 이들은 반격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끝난다고 봐야 한다.
비무가 끝나든, 생이 끝나든.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남궁찬의 검은 얼핏 단순한 경로로 찔러오는 것 같아도, 직접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검로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검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무인이다 보니 그의 앞에 있던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던 것이겠지.
비무가 마무리되었다.
첫 비무다 보니 둘 다 실력을 어느 정도는 감춘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엄청나게 치열한 비무였다.
남궁찬이 말했다.
“이야……! 이게 바로 유겸이구나! 내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결정적인 상황을 못 만들다니. 과연 비룡, 명불허전이었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이다.
“형님이야말로 엄청나시더군요. 벼락이 몰아치는 폭풍우 안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입니다. 왜 형님을 뇌룡이라고 하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나 또한 진심으로 감탄했다.
남궁찬이 백도 공인 천재로 통하는 이유를 내 온몸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할까.
남궁찬이 말했다.
“네가 특히 놀란 건, 네가 위기 국면에서도 동작의 낭비가 없었다는 점이야. 그렇다 보니 언제 그 빠른 속도로 역습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끝까지 과감하게 몰아붙일 수가 없더라고.”
“저도 계속해서 틈을 노리려 했는데 적절한 틈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군요.”
내가 대꾸하자 남궁찬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네 최고 속도를 이용했다면 틈은 얼마든지 있었겠지?”
“그럴 만한 각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통했을지는 알 수 없지요. 형님의 반응 속도도 제가 확인한 범위보다 훨씬 빠를 테니까요.”
남궁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의 비무를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차차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겠지. 그러다 보면 서로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무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가 적당할 것 같지?”
“예.”
내가 대꾸하자 남궁찬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긴장감 넘치는 비무는 정말 오랜만이었어.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 유겸아.”
매우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만족스러웠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날에는 백송학이 비무를 요청해 왔다.
남궁찬한테서 다 들었다며 비무 얘기를 꺼내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낙했다.
백송학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나는 내 역량이 허락하는 한, 그가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줄 작정이다.
은인 문제를 떠나서 생각해도 백송학과의 비무는 무조건 내게 도움이 된다.
소요곡의 무공은 신묘하기에 비무하다 보면 배울 점도 많기 때문이다.
비무해 보니 백송학 또한 포연월의 무공과 궤만 같을 뿐, 기세, 압력, 속도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달랐다.
때때로 강력한 공격을 가했는데도 마치 솜뭉치를 때린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런 면이 참 신기했다. 그게 바로 소요곡 무학의 묘리이기도 할 것이다.
백송학도 나와의 비무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 그와도 일주일에 두 차례씩 비무를 이어가기로 했다.
일과 시간에 남궁찬은 소충광과 제갈건의 수련을 도우며 지냈고, 백송학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수련을 도우며 지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 합숙 훈련에 갔던 인원들이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