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311화 (311/416)

내 안에 마교있다 311

칠월 초아흐렛날 오후, 합숙 특훈을 떠났던 인원들이 비룡장으로 복귀했다.

다들 일차 합숙 특훈 때와 비교해 피부가 더 그을린 모습이었고, 눈동자는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딱 봐도 일차 합숙 특훈 때보다 고된 훈련이었음을 알 것 같았다.

다들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향하는 가운데,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제갈수광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른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했다.

“곧 세건이와 휘명이를 지도해줄 시간인데, 마침 교관님과 방향이 같으니 같이 가려고요. 이번 합숙 얘기도 들을 겸.”

내 말을 들은 제갈수광이 말없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보쇼!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하든 반응을 보이든 해야 할 것 아니오!

“모두의 상태를 보니 훈련이 일차 때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던데…….”

“어. 진운령과 황성락 같은 경우에는 한 차례씩 탈진했지.”

“여지없이 제대로 굴리셨던 모양이군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다들 악착같이 훈련에 임하더군.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인원들이라서 애초에 강도 높은 훈련을 준비했던 거지만.”

합숙에서 지독하게 굴리는 건 제갈수광의 주특기나 다름없다.

남궁설, 선우린과 함께 삼청산으로 합숙하러 갔을 때도 제갈수광은 우리를 지독하게 굴렸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시에 남궁설과 선우린도 두어 차례씩은 탈진했을 것이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풍세학과 선의림이 합류한 덕에 특훈의 열기가 더 뜨거웠다. 그 두 사람은 아무래도 추소륵에게 경쟁심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 그런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더군. 찬 아우 앞이니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마음도 컸을 테고.”

“그랬겠군요.”

“그렇다 보니 무공 실력 면에서 그 뒤를 잇는 종금무, 건이, 황보충, 강하령 같은 인원들도 더 열심히 임하게 되고, 연쇄적으로 나머지 인원들도 더 악착같이 임하게 된 거지.”

“아하.”

“같이 고생한 덕분인지 풍세학과 선의림도 모두와 두루두루 친해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무작위로 이 사람, 저 사람과 손발을 맞추는 훈련이 많다 보니 친해지기도 더 수월했을 거야.”

“그렇군요.”

이후에 잠시 조용히 걷던 제갈수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열심히 했지만, 이번 합숙 특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들은 단목지와 송유하였다.”

“훨씬 뛰어난 이들이 많은데도 단목 소저와 누이를 꼽으신 이유가…….”

“단목지의 경우에는 검술 실력이 내가 알고 있던 실력보다 훨씬 뛰어나서 놀랐다. 그간 큰 발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전체적인 움직임은 강하령에게 많이 못 미치는데, 검술 실력만큼은 강하령과 별로 차이가 안 느껴지는 수준이더군. 그래서인지 찬 아우도 놀란 기색이었다. 심지어는 오라비인 단목강마저 놀랐으니 말 다 했지.”

“오호…….”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나는 단목지와 함께 단목세가의 검술을 여인에게 적합한 형태로 수정하는 작업을 했었으며, 그 작업은 작년 여름 청여홍의 장원에서 합숙할 당시에 완료됐었다.

지금은 그 후로 일 년이 지난 시점이다. 단목지의 경지에서 일 년이면 성과가 드러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검술이 단목강과 단목홍신에 비해 간결한 느낌인데도, 단목세가 검법 특유의 노도와 같은 기세는 잘 살아 있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더군. 웅대한 기세를 간결하게 풀어내는 검술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우니까. 성취가 늘어갈수록 더더욱.”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쨌거나 단목지의 검술 성취가 크게 상승했다고 하니,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며 보람이 느껴졌다.

“누이는 어떤 면이 인상적이셨습니까?”

“송유하는 일류에 오른 지 반년 남짓밖에 안 지났지. 시기로 따지면 황성락보다도 늦게 일류에 올랐으니 이번 합숙 인원 중에서는 최하위권이었고. 그런데 놀랍게도 특훈 내내 중위권 인원들만큼이나 잘 따라와 줬다. 자초지종을 들은 찬 아우와 송학 아우도 놀라워하더군.”

내가 공들여 지도해온 송유하가 여기저기에서 인정을 받으니 참 뿌듯하다.

제갈수광이 말을 이었다.

“빠르고 격렬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신술이 가볍고 쾌속했다. 송유하의 경지에서 그런 수준의 경신술을 펼칠 수 있다는 건, 송유하가 익힌 경신법 자체가 매우 빼어난 무공이라는 의미겠지. 게다가 송유하는 네 영향으로 평소에 체력 단련도 열심히 하잖나. 그렇듯 훌륭한 경신술 실력에 체력마저 받쳐주니 그 고된 훈련을 무난하게 소화해낼 수 있었던 거겠지.”

풍우비룡무의 신법은 기본적으로 날렵함에 특화되어 있다.

게다가 나는 송유하에게 경신술을 지도할 때 쾌자결에 중점을 뒀었다.

그 결과라 하겠다.

“한데 내가 훨씬 더 놀랐던 건 송유하의 궁술 실력이었다. 건이도 어느 정도는 무음시를 구사할 줄 아는데, 송유하는 건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음시를 구사하더군. 송유하는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궁술 천재야. 저대로만 성장하면 나중에는 나를 능가할 거다.”

“허……! 그 정도입니까?”

내가 묻자 제갈수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 묻긴 했으나 그 이유를 모를 내가 아니다.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성취가 동반 상승하면서 궁술의 발전도 더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갈림길에 가까워지자 제갈수광이 정리하듯 말했다.

“어쨌거나 훈련을 지도한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같이 지도한 찬 아우와 송학 아우도 만족스러워했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따 저녁 때 뵙겠습니다.”

그러자 제갈수광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지.”

이번에도 송천광이 저녁에 만찬을 준비했다. 즉, 술 마실 생각에 저렇듯 표정이 좋아진 것이다.

하여튼 못 말리는 술꾼이다.

“예. 살펴 가십시오.”

* * *

저녁 만찬에서 만난 풍세학과 선의림은 역시나 이곳에 장기간 머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윤단영이 예상했던 대로 된 것이다.

모두가 두 사람의 합류를 반겼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 * *

다음 날 오후에는 우문직, 단목홍신, 단목지와 차례로 비무를 펼쳤다.

세 사람 모두 통합 잠룡대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내게 비무 형식의 수련을 부탁해온 탓이다.

먼저 우문직, 단목홍신과 차례로 비무를 해봤는데,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두 사람 모두 안정적으로 통합 잠룡대전에 진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작년에 통합 잠룡대전에 참가했던 경험을 토대로 올해에는 더 좋은 성적을 내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 후에는 단목지와 비무를 진행했다.

직접 상대해 보니 제갈수광의 말마따나 강하령과 비교해도 차이가 별로 안 느껴질 정도로 검술 실력이 훌륭했다. 성취가 얼마나 많이 상승했는지, 내 기억 속에 있는 단목지의 검술 실력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직접 비무해 보기 전까지는 단목지가 동부 예선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일종의 도전 정신으로 통합 잠룡대전 얘기를 꺼냈겠거니 여겼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본인의 검술 실력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으로 출전을 결정했던 것이다.

비무를 마친 후 호흡을 고르고 있는 단목지에게 말했다.

“와아! 놀랍구려! 성취가 이렇게까지 급격하게 상승하다니.”

“송 공자님이 검법을 잘 수정해주신 덕분이에요. 수정된 검로를 따라 검법을 펼치다 보면 검이 손에 착착 달라붙는 기분이 들어요. 그 느낌이 좋다 보니 계속 수련에 몰두하게 돼서…….”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저렇듯 즐겁게 몰두하면 수련의 효과도 매우 커진다.

단목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검술이 재미있어서 검술 수련에만 빠져 살다 보니 경신법 실력은 거의 제자리예요. 제가 보법과 신법을 펼치면서도 불균형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앞으로 한동안은 경신법 위주로 수련하려고 해요. 검법은 감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수련하구요.”

비무하면서 보니 실제로 검술의 훌륭한 성취에 비해 보법과 신법의 성취는 부족했다. 검법의 성취가 너무 빠르게 상승한 탓에, 경신법이 검법의 수준을 못 따라간 결과다.

“그게 좋을 것 같소. 그 불균형만 어느 정도 보완되면 통합 잠룡대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만하오.”

내 말에 단목지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 전에 동부지맹 잠룡대전을 통과하는 게 우선이겠지만요.”

“그 검술 실력이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오. 가뜩이나 작년부터는 선발 방식이 바뀌어, 한 번 패한다고 해도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잖소.”

“감사해요. 어쨌든 저는 그냥 동부지맹 잠룡대전에서든 통합 잠룡대전에서든, 성적에 대한 부담 없이 편한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에요. 애초에 제 목적은 성적을 내고 명성을 얻는 게 아니라, 우수한 관도들과 겨뤄보며 경험을 쌓는 것이거든요. 중요한 대회인 만큼 모두가 전력으로 임할 테고, 그런 조건에서 실력을 겨루다 보면 경지 상승에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대회에 임하는 이의 더없이 훌륭한 마음가짐이라 하겠다.

저런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도 커진다.

단목지에게 말했다.

“방금 소저와 겨뤄보니 검법에서 보완하면 좋을 법한 부분이 세 군데 보였소. 셋 다 간단한 수준의 수정만 가하면 되는 부분들이오. 바로 시작합시다.”

지난 일 년간 내 무공 경지는 크게 상승했다. 그렇다 보니 보완할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감사해요.”

이에 우리는 곧장 수정 작업에 돌입했고, 그 작업은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끝났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검법 수정 작업이 늦게 끝난 덕분에 단목지와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하는 동안 단목지는 부지런히 나를 챙겼는데, 그게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으나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다음 날인 칠월 열하룻날 새벽.

잠룡관에 재학 중인 인원들이 모두 소형 유람선에 올랐다.

곧 개학이니 잠룡관으로 복귀하기 위함이다.

방학 기간의 대부분을 힘겨운 합숙 특훈으로 보냈는데도 떠나는 표정들이 밝았다. 합숙 특훈이 큰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것이다.

특히 통합 잠룡대전 출전을 노리고 있는 우문직, 단목홍신, 단목지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다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겨울 방학 때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들을 남기고 떠나갔다.

* * *

팔월 초하루다.

남궁찬이 남창지부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남궁찬과 백송학과 소충광은 며칠 전에 비룡장을 떠나 남창지부로 향했다.

물론 떠나기 전날 밤에 술을 실컷 들이붓고 갔다.

술 마시면서 들었는데, 남궁찬은 대외적으로 취임식을 간소하게 치르겠다는 뜻을 미리 공표했다고 한다.

귀빈들을 초청하지 않은 채로, 아침 일찍 남창지부의 구성원들만 모아놓고 간략한 취임사를 한 후, 곧장 지부장의 업무를 시작한다는 모양이다.

취임 기념 연회도 일절 개최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그 뜻을 명확하게 밝혔던 터라, 모두가 비룡장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심지어는 가족인 남궁설조차도 그냥 비룡장에 남아 있다.

오후에 실내 연무장에서 홀로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촉휘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겸이 형! 저예요!”

수련을 중단하며 문 쪽에 대고 외쳤다.

“어! 들어와, 휘명아!”

곧 촉휘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흡이 다소 거친 것으로 보아 빠르게 달려온 듯했다.

“무슨 일이야? 급한 일이라도 있어?”

“형! 남궁세가주님께서 오셨어요!”

“뭐어어? 정말이야?”

“네. 남궁설 누나가 얼른 가서 유겸이 형한테 알리라고 해서 달려온 거예요. 그리고 남궁세가주님만 오신 게 아니에요. 몇 분이 같이 오셨어요. 지체 높으신 분들 같았어요.”

지체 높으신 분들이라니, 누굴지 궁금하다.

간단하게 실내 연무장을 정돈한 후 서둘러 내원으로 향했다.

비룡장의 내원으로 들어서는 오르막길의 양옆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그 나무 그늘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남궁벽과 홍민옥, 남궁묵, 선우훤, 단목진, 문숙경 등, 반가운 얼굴들이 여럿 보인다. 그들의 주변으로 비룡장의 인원들 여럿이 모여 있다.

다가가면서 살펴보니 방문객 중 두 사람은 나와 친분이 없는 이들이었다.

친분은 없어도 누군지는 알고 있다.

둘 다 천마신교의 정보 문서에 용모파기가 상세하게 나와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멀리서나마 한 번씩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제갈세가주 제갈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선우세가의 소가주인 선우수다.

내가 다가가는 것을 알아챈 방문객들이 하나둘씩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오! 유겸아!”

“송 공자……!”

이에 나는 더욱 속도를 높여 방문객들을 향해 다가간 후,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유명인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니 한 명씩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렇듯 친분이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자 남궁벽이 제갈신과 선우수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이 두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예. 재작년 통합 잠룡대전 개회식 때 문상께서 두 분을 소개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맞다. 그렇지. 그때 알았겠구나.”

이에 나는 제갈신에게 먼저 예를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주님. 안녕하십니까.”

제갈신은 제갈수광과도 용모의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 사촌 간이니 당연하다.

두 사람의 용모에서 차이점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부분은 눈매인데, 제갈수광의 눈매는 나른한 한량의 느낌이고 제갈신의 눈매는 점잖으면서도 진중한 문사의 느낌이다.

제갈신의 외모는 사십 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나, 실제 그의 나이는 사십 대 후반이다. 내공 경지로 인해 저렇듯 동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허허, 반갑네, 송 공자. 재작년 통합 잠룡대전 당시에는 그래도 소년의 느낌이 좀 있었는데, 이제는 듬직한 청년이군그래.”

“가주님께서는 재작년에 뵀을 때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허허허허!”

제갈신이 너털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우리 건이가 신세를 지고 있군.”

“이 정도로 신세는요.”

제갈신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더 많은 이야기는 이따가 나누도록 하지.”

“예, 가주님.”

제갈신에게 그렇게 대꾸한 후, 이번에는 선우수 쪽으로 신형을 틀었다. 선우수의 옆에는 선우린이 달라붙어 있다.

선우린이 내게 말했다.

“송 오라버니, 우리 아빠예요.”

‘아빠’라고 하는구나.

선우린이 귀엽고 애교 많은 성격이어서인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선우수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소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직은 선우훤이 가주이니 선우수는 소가주다.

선우수가 미소 띤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듯 인사를 나누게 되니 너무도 반갑네, 송 공자.”

선우수는 준수한 용모에 인자한 인상이며, 이곳에 방문한 이들 중에서 남궁묵 다음으로 젊다.

실제 나이는 사십 대 초반인데 겉보기로는 삼십 대 중후반쯤이다. 그도 내공 경지로 인해 저렇듯 젊어 보이는 것이다.

선우수가 선우린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송 공자와 린아의 친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송 공자가 린아를 여러 차례 지켜준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네. 이 아이의 아비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네.”

“따님께서 영민한 덕에 위기를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는 그저 약간의 도움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내 대꾸를 들은 선우수가 미소를 지을 때쯤, 외원 쪽에서 세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두 사람은 송천광과 이청오였고, 두 사람의 뒤를 여유롭게 따라오고 있는 이는 정세건이었다.

아마도 저쪽에는 정세건이 알리러 갔던 모양이다.

나무 아래에 다다른 송천광은 친분이 있는 남궁벽, 홍민옥과 먼저 인사를 나눴다.

이후에는 남궁벽이 송천광에게 방문객들을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송천광은 처음에 남궁묵이 소개될 때는 ‘아이고’ 소리를 두어 번 내며 매우 반가워하더니, 선우수, 단목진, 문숙경, 제갈신이 소개될 때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연신 굽신거렸다.

남궁벽은 마지막으로 선우훤을 소개했는데, 송천광은 경악한 표정으로 거의 굳어버렸다.

“자, 자, 잣……, 자천성 대협……!”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는 모습에 내가 창피해졌지만, 사실 송천광의 입장에서는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기는 하다.

강호 최고의 인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우훤과 직접 대면한 상황이니까.

“허허헛. 반갑소, 송 장주. 누가 이렇게 유겸이를 잘 키워냈는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직접 보는구려.”

“과, 과찬이십니다요, 자천성 대협……!”

송천광이 그렇게 대꾸하며 나를 한 차례 바라봤다.

놀란 기색이다.

이유를 알 것 같다.

선우훤이 나를 ‘유겸이’라고 불렀기에 저러는 것이다.

이름을 부를 정도면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뜻인데, 내가 초유명인사인 선우훤과 언제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맺었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송천광이 다시금 선우훤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그저, 뵙게 되어 크나큰 광영일 뿐입니다.”

“허헛. 뭘, 광영씩이나. 어쨌거나 이렇듯 인연이 생겼으니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이,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송천광은 입이 거의 귀에 걸린 듯했다.

소개와 인사가 모두 마무리되었기에 남궁벽에게 물었다.

“이렇듯 갑자기 방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이 찬 형님의 취임식 날인데, 혹여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요?”

“맞아.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지부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니 취임식을 참관하러 간 거였다. 그곳에서 이분들을 만난 것이다. 연회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들 그 짧은 취임식을 축하해주러 오셨던 게지. 묵이도 그곳에서 만났고.”

그러자 선우훤이 농담조로 말했다.

“진짜로 연회가 없을 줄은 몰랐지.”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이런저런 연회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본맹이다. 그 중심부에 있는 선우훤이 연회를 아쉬워할 리 없다.

남궁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찬이 그 녀석이 글쎄, 취임식 후에 우리에게 차 한 잔씩만 내주더니 바로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냐. 연달아 회의가 잡혀 있다나? 우리가 뭐 힘이 있나. 쫓겨날 수밖에.”

표현을 축객령이니, 쫓겨났느니 하는 것이지, 실제로 남궁찬은 정중하게 권했을 것이다.

선우훤이 남궁벽에게 말했다.

“역시 남궁찬이라는 인물은 어딘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 느꼈네. 그렇듯 맺고 끊는 게 분명한 모습을 보니 더욱 믿음직스럽더군. 우리를 상대로도 그런 식이면 누구 앞에서든 똑같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벽이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어쨌거나 내 아들의 취임식을 축하해주러 오신 분들인데 그냥 보내드릴 순 없잖느냐. 그래서 어떻게 대접할까 하다가 이곳으로 모시고 온 것이다. 우리 부부는 원래 취임식 후에 이곳에 들를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들 이곳에 들를 일이 있는 분들이더구나.”

생각해보니 그렇다.

방문객들 모두가 남궁설, 선우린, 단목강, 강하령, 제갈건의 가족이거나 사부다. 애초에 다들 남궁찬의 취임식에 들렀다가 이곳에 들를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 거군요. 잘 오셨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남궁벽이 말했다.

“원래 내가 대접할 계획이었으니 좋은 고기와 고급술을 넉넉하게 주문해뒀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그걸 먹으면 될 게야.”

남궁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천광이 대꾸했다.

“아이고, 가주님, 왜 그러셨습니까. 강호의 명숙들께서 방문하신 기쁜 날이니 당연히 이 송 아무개가 대접하면 될 일을요.”

“안 그래도 송 장주가 그렇게 나올 것 같아서 내가 선수를 친 것이오. 내 아들의 취임식을 축하하러 오신 분들인데 한 번은 내가 대접해야 하지 않겠소.”

“허허…….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맛있게 요리하도록 잘 준비시키겠습니다.”

송천광의 말에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우훤이 말했다.

“나와 아범은 저녁 만찬 전까지 린아와 함께 시간을 좀 보내야겠네. 그러니 다들 이따가 보세. 회포는 그때부터 실컷 풀면 될 테니.”

그렇게 선우세가의 가족들이 자리를 뜨자 제갈신과 문숙경이 차례로 말했다.

“저도 아들 녀석과 함께 이 옆에 있는 사촌 아우의 집에 들를까 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제자와 대화를 좀 나눠야겠어요.”

제갈신과 제갈건, 문숙경과 강하령이 차례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단목진이 송천광에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아들딸 조카와 송 장주님의 아드님 따님이 서로 친분이 깊습니다.”

“아이고, 알다마다요.”

“그래서인지 뵌 적이 없는데도 송 장주님이 친근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렇듯 직접 뵙게 되니 너무도 반가운 마음입니다. 그러니 장주님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저는 장주님과 말씀을 나누며 오후를 보낼까 합니다만…….”

“저야말로 바라던 바입니다.”

송천광이 흔쾌히 대꾸하자 남궁벽이 말했다.

“단목 가주께서 송 장주와 대화를 나누신다니 우리도 가족끼리 시간을 좀 보내야겠구려. 둘째를 오랜만에 보는지라.”

“아이고, 그러십시오.”

“아, 그 전에 송 장주와 유겸이에게 할 얘기가 있소. 잠시만 따로 좀 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송천광이 남궁벽에게 대꾸하자 단목강이 내게 말했다.

“그럼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먼저 본채의 일 층 거실에 가 있겠소.”

그렇게 단목진과 단목강은 본채 쪽으로 향했고, 남궁벽은 송천광과 나를 이끌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작은 나무 아래에서 남궁벽이 송천광에게 말했다.

“상의하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부탁이라고 하시면…….”

“아시다시피 우리 첫째는 남창지부를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소. 남창지부가 관리하는 영역은 매우 넓소. 그리고 그 넓은 지역을 관리하다 보면 사적인 경로로 은밀하게 조사하거나, 사적인 힘을 동원해야 할 사안들이 생길 수밖에 없소. 이전처럼 남창지부가 보유한 전력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지요.”

“그런 이유로 세가의 정예 전력 다수를 은밀히 남창 근처에 상주시키기로 했소. 그래서 그들이 머물 거처를 구하려고 생각하던 중에 이곳이 떠오른 것이오.”

“아이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굳이 거처를 따로 구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곳에 머물면 될 일이지요.”

송천광이 그렇게 대꾸하자 남궁벽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의사를 묻는 것이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자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송천광에게 말했다.

“우리 정예들이 이곳에 머물면 서로에게 좋으리라 생각해서 제안하는 것이오. 이곳은 더 안전해져서 좋고, 우리 정예들은 안정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으니 좋잖소. 설아가 이곳에 있으니 우리 정예들의 마음가짐이 느슨해질 일도 없을 테고.”

“그러믄요, 그러믄요.”

“이야기되었으니 조만간 정예들을 파견하도록 하겠소. 단, 아까도 말했듯 정예들을 은밀히 상주시킬 계획이라, 그들이 이곳에 머물더라도 정체를 감춰야 하오. 그러려면 아무래도 독립된 구역에서 지내는 게 좋을 텐데, 마땅한 장소가 있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유겸이의 지인의 장원이고, 이 옆에 공사 중인 곳이 유겸이의 장원입니다. 그쪽은 이곳보다 부지가 훨씬 넓고, 당연히 독립된 구역도 있습니다. 마침 공사도 대부분 완공되어가는 단계입니다.”

“오, 잘됐구려. 송 장주가 고용한 용병들인 것으로 하고 독립된 구역에서 지내게 하면 될 듯하오. 정체는 설아를 포함해서 소수의 인원에게만 알리면 되겠고.”

“알겠습니다. 한데 파견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일단은 두 조 전력, 서른 명 남짓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 정도면 숙소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내일쯤 직접 한번 둘러보시죠.”

“그럽시다.”

참고로 올해 초부터 이 마을 인근에 머물며 비룡장 쪽을 관찰 중인 남궁세가 측의 정예도 네댓 명 정도 된다. 그들은 작은 집을 구해 거처로 쓰고 있다.

남궁세가에서는 이제 굳이 숨어서 이곳을 관찰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 인원들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남궁세가의 정예 무인들이 이곳에 머무는 건 무조건 환영할 일이다.

근래에는 혈교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해지긴 했으나, 그래도 요즘의 강호는 언제 어디에서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당장 동부지맹 바로 옆이라 안전할 줄 알았던 삼청산에서도 귀령사객을 만났었고, 작년 여름에는 청여홍의 장원에서 평화롭게 합숙하다가 크나큰 위기를 겪지 않았던가.

남궁벽이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멀쩡하던 남창지부가 거의 초토화되기도 했었다.

남궁벽도 그 부분을 의식하고 있기에 서른 명 넘는 정예를 굳이 이곳에 주둔시키려는 것이다.

딸의 안위뿐만 아니라 우리 장원 전체의 안위까지 고려한 결정이라 하겠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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