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313화 (313/416)

내 안에 마교있다 313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또다시 해가 바뀌었다.

길초량이 떠났던 게 내가 스물한 살이었던 해, 유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 나는 스물세 살이고 지금은 칠월 중순이다.

길초량이 떠난 날로부터 꼬박 이 년이 지난 것이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길초량과 도예주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몇 달 전에 들었다. 올해 이월에 제갈길의 첫돌을 축하하러 왔던 남궁찬이 얘기해줬었다.

지금은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다섯 달이 지난 시점인데, 두 사람이 여전히 무사하기를 빌 뿐이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원에도 여러 일이 있었다.

일단 아기가 한 명 더 늘었다.

장호산과 이세옥의 아이다. 사내아이로, 이름은 장조휘다. 작년 십일월에 태어났다.

올해 정월 초하루부터는 유영평이 정식으로 송풍장의 총관으로 취임했다.

이쪽에 합류한 후로 유영평은 강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강호 지식이 어느 정도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느지막이 총관직을 권한 것이다.

유영평은 단번에 승낙했다.

정월 중순에는 유진금이 잠룡관에 입관했고, 명호운은 복학했다.

제갈길의 첫돌이 있었던 이월이 지나고 삼월이 되었을 때, 나는 지인으로부터 비룡장을 매입했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지인이 사정상 이 장원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내가 즉시 매입했다고 밝혔다. 연주상단 남창지점에 투자했던 돈이 제법 불어나, 그 돈을 썼다고 둘러댔다.

그 소식에 모두가 기뻐했는데, 가장 기뻐한 건 송천광이었다.

송천광이 매입 비용을 메꿔주겠다며 하도 고집을 피우기에, 나는 할 수 없이 그 돈을 받아야 했다.

그 돈은 모두 총관인 유영평에게 넘겨, 장원 운영 자금으로 쓰게 했다.

지나간 일 년 반에서 이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모두의 무공 상승이라 하겠다.

작년 이월 말에 추소륵이 기어이 절정에 오르는가 싶더니, 작년 구월에는 풍세학이, 작년 말에는 선의림이 절정에 올랐다.

추소륵은 단목강과 남궁설에게 자극을 받아서 독하게 수련해왔는데, 풍세학과 선의림은 그런 추소륵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독하게 수련한 것이다.

추소륵, 풍세학, 선의림은 각각 백도의 삼대 문파인 소림, 무당, 화산을 대표하는 후기지수들이며, 또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데, 결국은 경쟁하듯 비슷한 시기에 절정에 오른 것이다.

추소륵과 풍세학은 스물다섯 살에, 선의림은 스물네 살에 절정에 올랐으니 충분히 훌륭한 성과라 하겠다.

단목강, 길초량, 남궁설 등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것뿐이다.

올해 초에는 종금무가 절정에 올랐다.

종금무는 한동안 동부지맹 잠룡관의 최고 실력자로 통하는 후기지수였으며, 기동타격조 활동을 통해 실전 경험도 많이 쌓았다.

그런 그가 비룡장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수련하며 스물여섯 살에 절정에 오른 게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다.

참고로 황산파의 역사에서는 손꼽힐 만큼 빠른 기록이라고 한다.

제갈건, 황보충은 거의 일류의 끝자락에 와 있어서, 누가 언제 먼저 절정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강하령, 악미조, 모용리가 바짝 쫓고 있다.

강하령이 약간 더 앞서 있다고 생각되지만, 악미조와 모용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 모용리는 재작년에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하며 그 천재성을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당시 악미조도 사강에 들었다.

물론 재작년 통합 잠룡대전은 나, 단목강, 강하령, 남궁설 등이 모두 조기 졸업하거나 휴학하여 무주공산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그렇다 해도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 여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절정에 오를지 궁금하다.

남군호도 점점 일류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는 특히 궁술 실력이 많이 발전해서, 이제는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상당히 정확하게 쏠 수 있게 됐다. 그간 제갈수광에게 열심히 배운 덕분이다.

선우린은 성취가 꾸준히 상승하여 일류의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그녀의 철비정술은 수준급이고, 은잠술 실력도 높아졌다. 비룡장에 온 후부터 배우기 시작한 궁술 또한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명호운은 작년 말에 일류에 올라서 올해 초에 잠룡관의 계반으로 복학했다.

심산화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내공 경지만큼은 일류였고 은잠술과 신법의 수준도 매우 높았었다.

단, 공격 기술인 소검술, 비도술 등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게 문제였던 아이다.

하지만 현재의 심산화는 모든 면에서 어엿한 일류고수다. 전체적인 경지는 일류의 초중반쯤으로 볼 수 있는데, 은잠술 실력이 대단하기에 실전에서 활약할 여지도 많다.

공은림과 하조혁도 처음 봤을 때부터 내공 경지만큼은 일류였던 아이들이다. 다만 내공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초보 수준이라는 게 문제였었다.

하지만 두 아이도 이제는 딱히 부족함 없는 일류고수다.

일단, 주 무공인 암기술의 성취가 몰라볼 정도로 상승했다.

그중에서도 소비도술과 철비정술은 실전에서 충분히 일 인분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정확도와 속도를 갖췄다.

강탄술과 비침술도 익히고 있는데, 그 두 가지는 난도가 워낙 높기에 아직은 수련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점점 숙련도가 늘고 있다.

두 아이의 암기술 실력이 쑥쑥 성장하고 있는 건 역시 임려현과 이세옥 덕분이다.

암기술 전문 교관이었던 이세옥이 정석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나면, 임려현이 실전 활용 능력을 높여주는 식의 교육을 계속해온 것이다.

이 정도로 체계적인 암기술 교육이 가능한 곳은 강호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신룡대와 흑풍대 같은 최정예 조직들이나, 당가처럼 암기술을 주 무공으로 삼는 극소수의 강호세력 정도다.

나는 두 아이의 경신법과 은잠술 교육을 주로 담당했는데, 내 집중 지도 덕분에 보법인 쾌류보와 신법인 쾌류표의 성취도 쭉쭉 상승했다.

녀석들의 주 무공인 암기술이 일정 수준에 다다른 후부터는 보조 무공으로 검술인 쾌류검예도 가르치고 있다.

심산화와 공은림과 하조혁은 처음부터 일류 수준의 내공이 받쳐주다 보니, 배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부터는 발전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 보니 이세옥과 임려현도 가르치는 맛이 난다며 즐거워했다.

그렇듯 가르치는 이들이 신나게 가르쳤기에 아이들도 더 신나게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왕철양은 한 달쯤 전에 일류에 올랐다.

이제 막 일류에 올랐는데도 녀석의 전투력은 어마어마하다.

녀석은 타고난 힘도 힘이지만, 거구임에도 애초에 움직임이 전혀 둔하지 않았었다. 그 상태에서 일류에 오르니 내공 운용이 훨씬 능숙해지며 움직임도 전체적으로 좋아진 것이다.

덕분에 녀석이 휘두르는 부斧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부술에 담긴 위력 또한 엄청나게 강력해졌다.

실제로 연습용 검에 공력을 주입한 후 왕철양이 휘두르는 부에 정면으로 맞서봤는데,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검병을 쥔 손아귀가 적잖이 저렸었다. 비룡수투를 끼고 있었으니 그 정도였지, 비룡수투가 아니었다면 손아귀에 고통이 전해졌을 것이다.

심지어는 녀석이 휘두르는 부를 검으로 비껴내는 것만으로도 손목과 팔에 상당한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녀석의 부는 기본적으로 무게가 엄청나다 보니, 녀석은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은데도 검을 쥔 내 손아귀는 계속해서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압력이 누적되면 좋을 게 없으니, 적의 입장에서 왕철양을 상대하려면 무기끼리 부딪치는 일을 최소화해야 한다.

대신 빠른 속도로 회피하며 역동작과 같은 빈틈을 노리는 게 최선인데, 사실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녀석이 굼뜨지 않기 때문이며, 녀석의 도끼가 한 자루가 아니라 쌍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왕철양을 쓰러트리려면 속도로 완전히 압도해야 한다.

한데 녀석이 익히고 있는 보법과 신법은 다름 아닌 쾌류보와 쾌류표다. 나는 성취가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속도 면에서 우위를 갖도록 쾌류보와 쾌류표를 설계했었다.

심법인 쾌류심결 또한 내가 쾌의 묘리를 담아 창안한 심법이다. 쾌류심결은 체내의 기운이 반응하고 작용하는 속도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성취가 높아질수록 움직이는 속도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준다.

이는 왕철양의 성취가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녀석을 속도로 압도할 무인들의 수는 더 빠르게 줄어든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

나는 괴물을 키우고 있다.

언젠가 이 강호는 왕철양으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송유하도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성취가 쭉쭉 상승하여 일류의 중반에 가까워졌다.

연승휴의 가전 무공이 날렵함을 중시하기 때문인지, 성취가 상승할수록 모든 움직임이 더 경쾌해지고 있다.

검법, 보법, 신법 등 모든 분야에서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제갈수광 덕분에 궁술 실력은 더 많이 늘었다.

현재 송유하는 수준급의 무음시를 날리는 게 가능해졌다. 그 발전 속도에 제갈수광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리고 고천비룡결, 풍우비룡무의 성취 상승과는 별개로 은잠술 실력도 엄청나게 늘었다.

이는 송유하가 은잠술을 좋아해서 스스로 즐겁게 익히고 있는 덕분이다.

절정에 올라 있던 단목강과 남궁설도 경쟁하듯 성취가 상승하여, 이제는 제법 단단한 절정고수의 풍모를 풍기고 있다.

제갈수광, 임려현, 장호산, 윤단영, 이세옥 등, 어른들의 기도도 많이 바뀌었다.

장원에서 지내고 있는 이들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빠르게 상승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 공은림과 하조혁이 끓여주는 차의 영향이 매우 컸다.

공은림과 하조혁은 여러 종류의 차를 끓여주는데, 원기를 북돋워 주는 차도 있고 기운을 맑게 해주는 차도 있으며, 내공 증진에 효과가 있는 차도 있다.

그러한 차들은 한두 번 마셔서는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기 어렵지만, 장복할 때는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참고로 지난 기간 동안 내 성취도 크게 상승했다.

나는 자심행과, 은설영지, 삼령천선초 등을 복용한 덕에 절정의 중후반에 이르렀었는데, 지금은 절정의 후반이다.

사실, 절정의 중후반에 오르고 나서 이삼 년 만에 이렇듯 절정의 후반에 진입하는 건, 정상적인 수련을 통해서는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기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실제로 남들이 모르는 기연이 내게 있었다.

그간 허죽신이 한 차례 장원에 방문하여 청심단을 두 상자나 주고 갔기 때문이다.

허죽신은 공은림과 하조혁을 내게 맡길 당시에도 수업료라며 청심단 두 상자를 줬었다. 총 사십 알이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은 양을 주고 간 것이다.

「크기도, 향도, 모양새도 이전의 청심단과 다를 게 없어 보이겠지만,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본곡에서 생산되는 청심단들보다 약효가 더 뛰어날 게다. 노부가 너를 생각해서 손수, 소량만 제조했느니라. 노부는 네 비밀을 알고 있으니 연단에 더 심혈을 기울였지.」

그 청심단들은 허죽신의 말마따나 약효가 뛰어나서, 확실히 한 알당 증가하는 공력의 양이 많았다. 가뜩이나 나는 회회심공의 성취가 높아졌기에 약효가 체내에 흡수되는 비율도 더 높아진 상태다.

그렇다 보니 예전과 같은 수의 청심단인데도 공력이 훨씬 많이 상승했다.

예전에 두 상자 분량 사십 알을 모두 복용했을 때는 총 이십삼 년 공력이 상승했는데, 이번 청심단 사십 알을 모두 복용하고 나니 삼십 년가량의 공력이 상승했다.

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절정의 후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허죽신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 * *

그간 왕철양의 대장 기술도 발전했다.

무공 상승으로 단조 능력이 더 향상되다 보니 무기 제작 능력도 좋아진 것이다.

참고로 일전에 내가 왕철양에게 연습하라고 줬던 삼분지 일의 쇠붙이들은 현재 포연월, 원추엽, 명호운, 심산화, 공은림, 하조혁, 촉휘명, 유진금 등의 무기가 되어 있다.

질 좋은 쇠붙이들이 왕철양의 빼어난 대장 기술과 만나 명품 못지않은 무기들이 된 것이다.

녀석들의 원래 무기는 평범하거나, 평범한 것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보니, 다들 당장에라도 충성 맹세를 할 것처럼 감격하며 기뻐했다.

이후에 나는 왕철양에게 내가 갖고 있던 쇠붙이들을 또다시 대량으로 넘겼다.

처음에 넘겼던 삼분지 일의 쇠붙이들은 내가 갖고 있던 것 중 하급이었는데, 이번에는 중급 쇠붙이들을 넘긴 것이다.

나는 왕철양에게 똑같은 규격의 검 몇 자루를 만들도록 주문했다. 현재 송유하가 사용하는 검과 같은 규격이다.

왕철양이 몇 자루를 만들어 놓으면, 그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을 송유하에게 줄 계획이다.

오후에 대장간에서 왕철양이 검 제작하는 걸 돕고 있는데 유영평이 찾아와서 말했다.

“긴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이에 유영평을 데리고 대장간 밖의 나무 아래로 향했다.

나무 그늘에 서자 유영평이 내게 말했다.

“와랄부瓦剌部(서몽골 오이라트 부족)에서 여러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장성을 넘었다고 합니다. 침공해 온 겁니다.”

이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많이 알지는 못하나, 수십 년 전에 황실에서 와랄부에 마시馬市(말 시장) 형태의 조공 무역을 허락한 후로 지금껏, 서로의 관계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잘 모르는 척하며 말했지만, 사실 나는 와랄부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다. 와랄부의 영역 중 일부가 천마신교의 영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만, 최근에 무역 분쟁으로 관계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작년에 황실에서 와랄부와의 무역을 제한하자, 와랄부가 불만을 품고 이번에 군대를 일으킨 겁니다.”

이렇듯 최근의 내가 모를 수밖에 없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했다.

“와랄족의 전사들이 용맹하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혹여 소수라 해도 방심하지 말고 잘 막아내야 할 텐데요.”

물론 나는 와랄족의 전사들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천마신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유영평이 대꾸했다.

“실제로 와랄부의 족장이 이끄는 이만 남짓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황군을 패퇴시키며 산서 땅 대동현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쪽이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즉시 오십만 대군을 편성했으며, 황제 폐하께서 그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떠나셨답니다.”

“폐하께서 굳이 친정까지 하실 사안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력 차이가 그 정도로 심하다면 황군이 무난히 방어해내겠군요.”

“저는 오히려 황군이 방어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 병력이 오십만인데 겨우 이만의 적군을 못 막는다니…….”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유영평은 지그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저도 근래 황군의 기강이 전체적으로 해이하고, 군대로서의 역량도 다소 떨어진다는 사실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력 차가 그 정도로 압도적이라면, 설령 황군의 전투 역량이 다소 떨어진다 해도, 머릿수가 알아서 이겨주는 상황이잖습니까.”

물론 소수 정예의 군대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적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역사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특별한 경우들이다.

전쟁에서는 결국 머릿수 자체가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영평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말했다.

“그 오십만 대군은 적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자 황성에서 주장하는 숫자일 뿐, 실제로 모인 전력은 그 반도 안 될 겁니다.”

확신이 담긴 어조였다.

내가 놀라는 사이 유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이 나라의 군역 체계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엉망입니다. 기본적으로 서류에 기록된 병력의 수를 백(百)이라고 가정했을 때, 실제 병력의 수는 오십(五十)도 안 되는 부대가 대부분입니다. 오십은커녕 이삼십이 안 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한데 그마저도 어떻게든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징발한 농민의 비율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유영평이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이들일지언정 훈련조차 제대로 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설령 황군의 병력이 많다고 해도, 그중에서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절대다수가 오합지졸인 겁니다.”

“……황군의 상태가 그 정도라니, 쉬이 믿기지 않습니다. 아, 유 총관님의 말씀을 못 믿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심정이 그렇다는 겁니다.”

내 말에 유영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관직에 있을 때 군역에 관련된 사무를 맡았습니다. 실상을 알고 저도 경악했었습니다.”

“아……!”

이제야 그가 아까부터 확신하듯 얘기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제를 바로잡고자 상부에 보고를 여러 차례 했는데도 전혀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폐하께서 믿고 의지하는 환관들과 그 환관들의 측근인 고위 권력자들이 군역 관련된 재정을 착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허…….”

“제 상관이 제게 사정하듯 말하더군요. 그 일에 대해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동창으로 끌려가서 역모죄를 뒤집어썼다고. 같이 일하던 상관이나 동료들에게도 불똥이 튀어 여럿이 죽었으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조용히 좀 있어 달라고.”

유영평이 왜 벼슬길에 회의를 느끼고 낙향했는지 알 것 같다.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면 자신의 목숨, 일가친척의 목숨, 동료의 목숨, 동료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데 그런다고 해도 부조리가 바로잡힐 가망이 없으니 뭘 어쩌겠는가 말이다.

유영평이 씁쓸한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방금 남창지부로부터 날아온 전서에 의하면, 황실에서 무림맹에 대규모 전력 지원을 요청해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왜 무림맹에 대규모 전력 지원을 요청했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비밀리에 요청한 게 아니라 대놓고 요청한 모양입니다. 이는 혹여 무림맹이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경우,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입니다. 평소 의와 협을 외치던 백도무림맹에서, 정작 나라 지키는 일에는 등을 돌렸다고 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백성들에게 있어 이 땅의 주인은 황제 폐하이니, 그 순간 백도무림맹은 그냥 무뢰배 집단이 되는 거지요.”

“이런 종류의 사안에서는 명분이 무조건 황실 쪽으로 설 수밖에 없으니까요.”

내 대꾸에 유영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결국 무림맹에서도 요청을 수락했답니다. 본맹 천지인대의 일부와 동검대, 서검대, 남검대, 북검대의 일부를 차출해서 파견할 모양입니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으니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정예 전력을 보내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또한 남창지부에서 보내온 전서에 따르면, 혹여 황군의 전황이 나빠졌을 경우 황실에서 무림맹에 더 많은 전력 파견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그때는 정혼대를 구성해야 할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혼대는 무림맹의 임시 무력 조직이다.

상황에 따라 무림맹에서는 맹에 소속된 모든 세력에 고수의 차출을 요청할 수 있다. 사안에 따라 요청하는 고수의 수도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구성되는 게 바로 정혼대다.

가깝게는 사파와의 전쟁 당시에도 정혼대가 구성된 적이 있다.

유영평이 말했다.

“드리고자 했던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이후에도 황군과 와랄족의 전황에 관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하여, 보고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겠습니까.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영평이 내게 간단하게 예를 취했고, 나도 그에게 마주 예를 취해줬다.

유영평이 물러간 후 호수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라도 황군이 큰 타격을 입었을 때 와랄족만큼이나 쾌재를 부를 자가 있다.

바로 위지광이다.

어쩌면 위지광 놈이 와랄족보다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황군의 힘이 약해지면 화약과 강시술을 더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실의 요청으로 백도의 전력이 분산되는 상황은 천마신교에게 호재다.

혹시라도 그러한 전력 분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기미가 보이면 천마신교가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고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 같은 것도 전혀 없지만, 나는 혹시 모를 그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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