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15
과거에 나는 조중렴의 검을 왕철양에게 넘기며 그 쇠붙이를 이용해서 어검술용 검을 제작해 달라고 주문했었다.
한데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에 왕철양이 단검 하나를 더해서 검을 제작하자고 제안해왔었다.
내가 건넸던 최상급 쇠붙이들에 섞여 있던 단검인데, 철의 질이 매우 좋아서 조중렴의 검과 섞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더 좋은 검을 만들어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기에 승낙했었다.
그렇게 해서 검이 완성되었는데, 과연 명품이었다.
마음에 쏙 들었다.
검의 이름은 ‘섬혼閃魂’으로 지었다. 여기에 쓰인 ‘섬’은 천섬무의 ‘섬’이다.
섬혼검의 검신은 일반적인 검에 비해 두께는 더 두껍고 폭은 약간 좁으며 길이는 짧다.
검집은 길초량의 무기를 참고해서 제작했다.
겉으로는 나무 막대기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손잡이 부분이 분리되며 검이 뽑혀 나오는 방식이다.
참고로 검집에 꽂혀 있을 때 길초량의 무기는 두툼한 곤의 형태가 되는데, 내 무기는 매끈한 단봉의 형태가 된다.
저녁 식사 후, 서재의 집무 탁자 옆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검술을 수련하기 위함이다.
내가 섬혼검에 정신을 집중하자,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이 꾸역꾸역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평으로 한 뼘 정도 떠오른 검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뒤로 심하게 출렁거렸다.
내가 더 집중하자 출렁거림이 잦아들었고, 나는 그 상태에서 검을 이동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섬혼검이 수평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섬혼검이 수평 이동한 거리가 한 뼘에 이르렀다.
평상시에는 이쯤에서 검이 심하게 떨리다가 추락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다지 떨리지 않고 있다.
이건 느낌이 좋다.
이대로라면 신기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욱 집중했다.
그렇듯 모든 집중력을 섬혼검에만 쏟은 상태에서 검극이 전진하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똑똑똑.
“공자, 계십니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영평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집중력이 분산되며 섬혼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챙그렁-
후우…….
낮게 한숨을 내쉰 후,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후, 섬혼검을 집무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예. 들어오십시오, 총관님.”
곧 유영평이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작고 꼬깃꼬깃한 종이 두 장을 겹쳐 들고 있다.
전서다.
유영평이 말했다.
“공자, 난리 났습니다.”
“난리요?”
내가 묻자 유영평이 손에 들고 있는 꼬깃꼬깃한 종이들을 내밀며 말했다.
“무림맹 남창지부와 연주상단 남창지점에서 온 전서입니다. 내용은 비슷합니다만, 남창지부의 전서가 더 자세합니다.”
이에 나는 전서들을 받아 들고 그 안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글자들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급보. 광서, 운남, 귀주에 각각 수천 명씩에 달하는 적도들 출현.>
첫 구절을 읽은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친정군이 전멸하고 황제마저 사로잡히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무림맹에서는 빠르게 대처하여 서부지맹에 정예 전력을 집중시켰다. 본맹과 남부지맹과 동부지맹에서 정예 전력을 더 끌어모아 서부지맹으로 보낸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이면서도 당연한 대처였다.
천마신교에서 밀고 내려오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 조성되었고, 그 경우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지역이 바로 서부지맹 권역의 청해, 감숙, 섬서, 사천 같은 곳들이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 부랴부랴 지원 전력을 파견하느니, 전력을 미리 보내어 처음부터 방비를 탄탄하게 해두겠다는 판단이었다.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한데 엉뚱하게도 중원의 남서부인 광서, 운남, 귀주 지역이 적습을 받은 것이다.
<밤중에 공격해온 적도들에 의해 광서의 합산지부와 운남의 곤명지부가 제압됨. 두 곳 모두 초반에는 적의 규모를 가늠하지 못하고 맞서 싸우다가, 나중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퇴각하기 시작함. 그로 인해 피해가 더 커짐.
합산지부는 지부장을 포함한 지휘부의 생존이 확인됨.
곤명지부 지휘부의 생사는 불분명.
광서의 잠림보와 남녕무문, 운남의 단리세가와 점창파도 적의 기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음. 소수의 인원만이 겨우 탈출하여 도주 중.>
잠림보와 남녕무문은 광서를 대표하는 백도 세력이고, 단리세가와 점창파는 운남을 대표하는 백도 세력이다.
백번 양보해서 광서의 잠림보와 남녕무문은 그렇다 쳐도, 운남의 단리세가와 점창파마저 적도들에 당했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점창파는 백도의 구파일방에 속하는 거대 문파고, 단리세가는 세가 서열에서 이십 위 안에 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귀주의 범정검문과 뇌공문도 적도들에 의해 초토화됨.>
범정검문과 뇌공문은 귀주를 대표하는 백도 문파들이다.
범정검문은 강구현 북쪽의 범정산에, 뇌공문은 개리현 동남쪽 뇌공산에 자리 잡고 있다.
<무림맹 귀양지부와 남부지맹도 적도들에 의해 동시에 기습당함.>
무림맹 귀양지부는 귀주의 도읍인 귀양에 있으며, 남부지맹은 귀주 중북부의 준의현에 있다.
<귀양지부 궤멸. 지휘부의 생사 불분명.
남부지맹의 피해는 더 심각함. 대규모의 적도들이 남부지맹을 기습했고, 극소수의 인원들만이 생존하여 도주 중.
남부지맹주 여중익은 부하들을 퇴각시키는 과정에서 단신으로 적도들의 추격을 막아섬.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남부지맹마저 무너지면서 광서, 운남, 귀주 무림이 완전히 적도들에게 장악됨.
모든 적습은 기습의 형태로, 같은 밤 같은 시각에 이뤄짐.>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세상에, 남부지맹이 무너지고 남부지맹주가 죽다니.
참고로 남부지맹주 여중익은 청성파 장문인의 사제로, 청성삼검 중 일인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으니 청성파도, 무림맹도 충격이 엄청날 것이고, 나아가 백도 전체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적도들의 구성은 반 정도가 천마신교의 마인들로 여겨지며, 나머지 반은 혈교의 잔당들과 사파의 잔당들로 여겨짐.
귀갑강시공을 익힌 자들이 많았음.
수준급의 무음시를 구사하는 궁수들이 모든 전투에서 확인됨.
적도들 대부분의 경지가 일류 이상이었다고 전해지며, 절정고수와 최절정고수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됨.>
전서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후에 연주상단 남창지점에서 보내온 전서도 확인해 봤는데, 무림맹 남창지부에서 보내온 전서와 내용이 비슷했다.
적도들 대부분이 일류 이상이었고, 그중 다수가 귀갑강시공을 익혔고, 수준급의 무음시를 구사할 수 있는 궁수들 또한 여럿 동행했다면, 광서, 운남, 귀주가 그렇듯 쉽게 밀린 것도 납득이 된다.
가뜩이나 근래 연이어 정예 무인 차출이 이뤄진 통에, 무림맹의 각 지부도, 여러 문파와 세가들도, 모두 정예 무인의 수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중에서 특히 남부지맹 권역과 동부지맹 권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라고 여겨져 더 많은 정예 전력이 차출됐었다.
즉, 이 사안의 전체적인 구도 자체가, 백도 쪽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던 것이다.
참고로 광서, 운남, 귀주는 산지와 구릉지가 엄청나게 많은 지역이라, 애초에 구석구석 정찰하기가 쉽지 않은 곳들이기도 하다.
근래에는 정찰력 자체도 부족했을 테니, 남부지맹 측에서도 적들의 존재를 미리 눈치채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영평에게 말했다.
“제갈 교관님께도 알리고 같이 상의해야 할 사안이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전서를 확인하자마자 딸 아이를 제갈 교관님에게 보냈습니다. 곧 이곳으로 모셔올 겁니다.”
“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영평이 말했다.
“전서를 보니 연주상단 남창지점의 정보 수집 능력도 보통이 아니더군요. 물론 무림맹 남창지부에서 보낸 전서만큼 내용이 자세할 수는 없지만, 굵직한 내용은 모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거대 상단의 정보력이 좋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조금 더 일찍 도착한 것도 연주상단 남창지점의 전서였습니다.”
“그랬군요.”
나와 청여홍의 관계가 워낙 가깝다 보니 우리는 연주상단 남창지점으로부터 여러 정보를 받고 있다. 참고로 청여홍도 일전에 잠룡관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연주상단 남창지점의 총책임자가 되어 있다.
유영평이 말했다.
“우리가 받은 전서 외에도 많은 전서들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여러 공자, 소저들의 본산이나 본가에서 날아온 전서들입니다. 아마도 이번 일에 관련된 전서들이겠지요.”
친우들은 각자의 문파와 세가에서 중요한 신분들이다. 큰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전서가 날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밖에서 인기척이 있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유겸, 안에 있나?”
“예, 교관님.”
곧 제갈수광이 문을 열었는데, 그의 뒤로 유단금의 모습이 보였다.
“수고했어, 단금 소저.”
내가 웃으며 짧게 인사를 건네자 유단금이 미소를 보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돌아갔다. 유단금은 처음 봤을 때는 낯을 많이 가렸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갈수광이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고, 나는 들고 있던 전서를 그에게 건넸다.
“확인해 보십시오.”
제갈수광이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전서를 받아 들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제갈수광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서에서 시선을 뗐다.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대꾸했을 때쯤, 문밖에서 여러 개의 인기척이 있더니 곧 황보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 형, 안에 계시오?”
“아, 들어오시오.”
내가 대꾸하자 황보충을 필두로 친우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실을 겸하는 넓은 서재가 금세 북적북적해졌다.
제갈수광이 방금 들어온 이들을 향해 말했다.
“소식들 들었나 보군.”
“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가운데 남군호가 말했다.
“소식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광서, 운남, 귀주 무림이 전체적으로 큰 피해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희생되셨다고……. 심지어는 남부지맹주이신 여 대협마저…….”
악미조의 말에 제갈수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제갈건이 입을 열었다.
“무림맹의 수뇌부의 입장도 매우 곤란할 겁니다. 당연히 광서, 운남, 귀주 지역을 수복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쪽으로 제대로 된 정예들을 투입해야 합니다. 한데 현재 무림맹과 백도에 가용한 정예 전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제갈건이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전력을 긁어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지원 요청이 오겠지요.”
제갈수광이 대꾸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확인이 필요할 것 같군. 이번 일로 문파나 세가에서 복귀 지시가 내려온 인원들 있나? 상황이 급변한 만큼 복귀령이 내려왔을 수도 있으니 묻는 것이다.”
하지만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수광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물었다.
“한 명도 없나?”
추소륵이 대꾸했다.
“저희 본산에서는 그냥 이곳에 머물며 제갈 교관님의 지시에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대답이 이어졌다.
“저희 세가에서도 같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저도…….”
“저두요.”
방금 대꾸한 이들은 모두 북부지맹과 동부지맹 출신의 친우들이었다. 이쪽 친우들의 문파와 세가에서는 제갈수광의 역량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다. 기동타격조 활동 당시에 제갈수광이 보였던 빼어난 지휘 역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제갈건이 말했다.
“저는……, 아버지가 그냥 당숙을 따라다니라고…….”
그러자 선의림과 풍세학도 차례로 입을 열었다.
“저희 본산에서도 복귀할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한 명 있고 없고가 본산에 딱히 영향을 미칠 상황이 아니라며, 이곳에 남은 친우들과 함께 제갈 교관님의 지시에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보아하니 다들 남는 모양입니다만…….”
“저희 본산의 뜻도 비슷합니다. 그냥 이곳에서 제갈 교관님과 송 공자와 함께 움직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갈수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두를 향해 말했다.
“건이가 말했듯 조만간 지원 요청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다들 돌아가서 행낭 미리 싸놓고 체력 비축하며 대기하고 있도록. 언제든 바로 움직일 수 있게끔.”
“예.”
모두가 거의 동시에 대꾸한 후 서재를 나섰다.
“저는 가서 정보를 더 알아보고 있겠습니다.”
유영평도 그 말을 남기고 서재를 벗어났다.
둘만 남자 제갈수광이 말했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근래 원 선배님과 촉 선배님의 기운이 예전 같지 않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느꼈겠지.”
원을태와 촉홍결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점점 노쇠해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
“그래서 이번에는 노선배님들을 모시고 가지 않을 생각이다. 아이 엄마인 영 매와 이세옥 교관도 남겨둘 거고.”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노선배님들과 영 매와 이세옥 교관이 남게 되면 이곳도 최소한의 방비는 되겠지. 이곳의 창궁검대원들 다수가 찬 아우를 지원하러 간다고 가정해도 말이야. 왕철양, 심산화, 공은림, 하조혁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고.”
왕철양, 심산화, 공은림, 하조혁이 무조건 이곳에 남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제갈수광에게 대꾸했다.
“음……, 철양이와 산화는 본인들이 원하면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제갈수광이 살짝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정말인가? 물론 나도 그 두 아이의 신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네가 가르쳤으니 실전 실력도 양호하겠지. 그렇다 해도 녀석들의 경지는 아직 일류의 초반 내지는 초중반에 불과하다. 치열한 상황에서는 버겁지 않겠나?”
“여차하면 숨어있으라 하면 됩니다. 산화는 말할 것도 없고 철양이도 은잠술에 능하니까요. 전체적으로는 둘 다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우리의 발목을 잡을 일은 딱히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아이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너지. 네 판단에 맡기겠다.”
“예.”
내가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말했다.
“송유하도 이곳에 남겨두는 것으로 하지. 물론 송유하가 전력에 포함되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네가 투입되는 마당에 송유하까지 포함시키고 싶지는 않군.”
“예.”
“이 정도면 대강 정리가 된 듯하군. 나도 이만 가 볼 테니 너도 준비하고 있도록.”
제갈수광이 그렇게 말한 후 서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