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64
잠에서 깨어났다.
아까 반 시진 정도 회회심공을 운기하고 잠들기는 했는데, 일어나니 몸이 아주 상쾌하다. 게다가 기력도 충만하다.
일어났을 때 이런 기분을 느끼는 일이 잦아지는 시기가 있다.
경험상 그런 시기가 지나면 회회심공의 성취가 상승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징조가 아닐지 기대된다.
단목강은 아직 자고 있어, 조용히 간이 막사를 빠져나왔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해가 어디쯤 있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시간을 가늠해 보니 미시 초(오후 1시)쯤인 듯하다.
한낮인데도 사위가 고요하다.
대부분이 아직 취침 중인 모양이다.
산책을 겸해서 뇌산지소를 둘러보려고 내려갔는데, 깨어 있는 무인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여기저기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제의 소문이 쫙 퍼졌는지, 다들 경외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바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인들이 더 몰려들다 보니, 더는 산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에 나는 ‘칠절사군’님의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얼른 다시 뒷동산으로 올라왔다.
뒷동산은 여전히 고요하여, 나는 이제야 산책다운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작고 아담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비 온 뒤의 숲 향기가 가득하다.
텁텁함과 신선함이 공존하는 정취를 만끽하며 한동안 걸었다.
그렇게 반각 정도 걸었을 때쯤, 전방의 먼 숲속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휙-
턱!
암기가 날아가서 박히는 소리다.
아마도 나무 기둥 같은 곳에 박힌 듯한데, 누군가가 암기술을 수련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리로 추정해보면 소비도나 유엽비도나 비수쯤 되는 듯하다.
그 직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많이 발전했네? 열심히 수련했구나?”
포연월의 목소리다.
“열심히 하긴 했는데 정확도를 더 올리는 게 정말 어렵더라구요.”
누군가가 그렇게 대꾸했다. 여인의 목소리다.
포연월에게 공대하는 걸 보니 잠룡관 후배인 듯하다.
호기심이 일어서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숲속의 작은 공터에 다다랐다.
포연월의 모습과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십 대 중반의 소녀가 막 소비도를 털어내는 중이다.
휙- 턱!
소비도가 암기 수련용 목인木人의 복부 상단에 박혔다.
심장으로부터 반 뼘 남짓 벗어난 위치다. 아마도 심장을 노리고 던진 게 빗나갔을 것이다.
그즈음, 포연월이 측면에서 다가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며 외쳤다.
“조교님!”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줬다.
“산책하는데 이쪽에서 네 목소리가 들리길래.”
“아.”
“일찍 일어났네? 수련 중이야?”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수련 중이라기보다는 후배의 소비도술을 좀 봐주고 있었어요. 잠룡관에서 친해진 동생인데, 제가 소비도술 수련하는 걸 보더니 배우고 싶다고 해서요. 그 뒤로 조금씩 가르쳐주고 있거든요.”
“아.”
포연월은 몇 년 전부터 내게서 소비도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천재성을 보이며 두각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수준급의 실력자가 되어 있다.
포연월이 소녀에게 말했다.
“어제 봐서 알지? 우리 송 조교님이야. 인사해.”
그러자 소녀가 내게 공손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유명한 동천비룡 소협을 직접 뵙게 되어 너무도 영광입니다. 저는 동부지맹 잠룡관 계반 초년 차인 양순영이라 합니다.”
눈이 매우 맑은 느낌의 소녀인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소곳하고 차분하다.
그나저나 남궁찬이 말하길, 잠룡관 전투지원대는 최소 일류고수 이상의 관도들로만 선발했다고 했었다. 즉, 계반 초년 차라는 저 양순영도 일류고수인 것이다.
벌써 범상치 않다.
물론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여러 명 있기는 하지만.
“반갑소. 송유겸이오.”
내가 대꾸하자 양순영이 말했다.
“아, 동부지맹 잠룡관의 선배님이시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이에 나는 미소만 지어 보인 후에 포연월에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도 실력 좋은 관도들이 계속 계반으로 들어오고 그러나? 그거, 유행 안 끝났어?”
“사대지맹 공히, 유행이 끝나기는커녕 더 퍼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동부지맹 잠룡관이 특히 심하다고 하구요.”
“미치겠구만.”
“조교님과 길 조교님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설 언니와 린 언니의 영향도 커요. 남궁세가의 금지옥엽과 선우세가의 장녀가 계반에서 생활했었다는 얘기도 파급력이 상당해서요.”
그것도 그렇기는 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연월이 말했다.
“올해 초, 개학 전날 밤에 잠룡관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총교관님하고 마주쳤었거든요. 당시에 총교관님 옆에 큰 행낭을 메고 있던 애가 있었는데, 걔가 바로 순영이였어요. 총교관님께서 같은 계반이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시더라구요.”
개학 전날 밤에 큰 행낭을 메고 있었다면 배정받은 거처로 향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즉, 한낱 계반 관도를 노양홍이 직접 거처로 안내한 것이다. 노양홍이 아무에게나 그렇게 할 리 없다.
포연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이좋게 지내라고 해도 막상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순영이도 딱히 다가오려는 느낌이 없다 보니 저도 굳이 신경 안 쓰고 지냈어요. 저야 뭐 추엽이, 휘명이, 세건이, 진금이가 있으니 걔들하고 어울려서 수련하기도 바빴으니까요. 순영이랑은 오다가다 마주치면 서로 살짝 고개 숙여 인사만 하며 지내는 정도였어요.”
포연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가면서 아무리 봐도 순영이가 다른 관도들과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는 거예요. 간혹 어울리는 애가 있기는 한데, 걔랑도 붙어 다니는 건 아니고 그냥 잠깐씩 대화하는 정도더라구요. 그래서 총교관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했죠. 혹시라도 이상한 애인 것 같으면 그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을 생각으로.”
그 말에 양순영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말은 이미 양순영에게도 했었던 모양이다.
“그랬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포연월이 말했다.
“아, 조교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잠시 순영이의 소비도술을 좀 봐주시는 건 어때요?”
그 말에 양순영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담겼다.
“음…….”
내가 침음을 삼키자 포연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교님이야말로 진정한 소비도술의 고수시고, 가르치기도 정말 잘 가르치시잖아요. 그러니 잠깐만 지도해주셔도 큰 도움이 될 듯한데.”
포연월에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네?”
포연월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다.
무리한 부탁도 아닌데, 자신의 친한 후배 앞에서 내가 이렇듯 단호하게 거절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양순영도 다소 당황한 표정이다.
이에 나는 잠시 집중하여 일대의 기척을 한 차례 훑은 후에 포연월에게 말했다.
“내가 네 조교 역할을 처음 맡던 날에 그랬지? 네 출신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설령 네 이름이 가명이라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나는 얼굴도 모르는 애를 지도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다. 양순영 저 고얀 것은 현재 면구를 쓰고 있는 상태다.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최상품이다.
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포연월이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양순영을 바라봤다.
역시나 포연월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양순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얘야, 그러다 그 예쁜 눈알 튀어나오겠다.
그나저나 양순영은 알까? 포연월도 면구를 쓰고 다닌다는 사실을?
아마 모를 것이다. 포연월의 면구도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최상품이니까.
뭐, 포연월의 면구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밝힐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재미있는 상황이다.
둘 다 서로의 본래 얼굴도 모른 채로 지금껏 친해졌다는 거니까.
“남들에게는 함구하겠소. 소생은 그럼 이만.”
양순영에게 그렇게 말한 후에 돌아섰다.
저 고얀 것이 반응을 보이면 조금 더 상대해 주고, 아니면 이대로 그냥 산책이나 계속하면 되겠지.
느긋하게 여덟 걸음째를 옮겼을 때쯤, 뒤에서 양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협.”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소협’이라는 호칭은 부담스러우니 그냥 평범한 호칭을 써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여유롭게 걸음을 멈추며 신형을 돌린 순간, 나는 내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순영이 고개를 숙인 채로 면구를 뜯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쭈우우우욱-
저건 내 예상 범위 밖의 반응이다.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정면 대응해올 줄이야.
덕분에 오히려 내 쪽이 살짝 당황스러워졌다고 할까.
어쨌거나 나 때문에 면구를 뜯는 것이니, 만에 하나 드러난 얼굴이 추하다고 해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양순영이 면구를 뜯는 동안 나는 다시금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곧, 양순영이 면구를 완전히 떼어 내더니 고개를 들었다.
포연월이 놀란 표정으로 양순영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감탄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잠룡오화급의 미모이기 때문이다.
대체 얜 또 어디에서 튀어나온 미소녀냐.
애당초 이놈의 백도에는 저렇듯 압도적인 미인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저 정도 급의 미인들을 기준으로, 그 오랜 세월 천마신교에서 봤던 수보다 지난 몇 년간 백도에서 봤던 수가 훨씬 많다.
“가만히 있어 봐.”
포연월이 그렇게 말하더니 양순영의 얼굴에 붙어 있는 굳은 연고를 떼어주기 시작했다.
양순영이 대꾸했다.
“고마워요, 언니.”
그쯤에서 나는 공력을 일으켜 주변에 방음막을 형성했다.
내 경지에서 내 역량으로 이 정도 기술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처럼 범위가 좁을수록 더 쉽고.
포연월과 양순영도 내가 공력으로 방음막을 쳤음을 알아채고는 한 차례씩 나를 일별했다.
포연월이 물었다.
“아니, 순영이 너, 이 정도로 미인이었던 거야?”
“과, 과찬이세요.”
양순영이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미소를 머금으니 훨씬 더 예쁘다.
싱그러우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미녀다.
이른 아침 첫 햇빛을 받은 이슬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저대로 화폭에 담아놓고 싶다.
양순영이 포연월에게 말했다.
“본의 아니게 속인 게 돼버린 것 같아요. 미안해요, 언니.”
“면구가 꼭 속이기 위해선가?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지.”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그럴 거 없어. 실은 나도 면구거든.”
포연월이 대꾸하자 이번에는 양순영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저, 정말요?”
포연월의 면구도 최상품이니 양순영도 몰랐을 수밖에 없다.
“응.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보여줄게.”
“아, 네.”
둘 다 내 방음막을 믿고 편하게 대화하고 있다.
포연월이 말했다.
“참고로 송 조교님은 이미 보셨어. 네 면구를 금방 알아채셨던 것처럼, 내 면구도 금방 알아채셨거든.”
“와…….”
양순영이 탄성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스승님께서 이 면구는 누구도 못 알아챌 거라고 하셨는데.”
포연월이 대꾸했다.
“응, 우리 사부님도 그러셨어.”
훗. 차라리 귀신을 속여 이것들아.
곧 포연월이 양순영의 굳은 연고 자국을 모두 제거했다.
“됐다.”
그러자 양순영이 내게로 신형을 틀었다.
그쯤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말은 편하게 하지.”
“아, 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소협’이라는 호칭 듣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야. 딱히 협객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지도 않고, 마음속에 협의나 정의감을 품은 채로 살고 있지도 않거든. 그래서인지 양심에 찔린다고 할까.”
그러자 양순영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배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은 오랜만에 봅니다. 대부분은 대협이나 소협이라고 부르면 오히려 좋아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아, 선배님이라는 호칭은 괜찮으시겠지요?”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양순영이 의복을 살짝 정돈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다시금 포권하며 말했다.
“송유겸 선배님께 다시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양순영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었습니다. 제 본명은 민화영입니다.”
그러자 포연월이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민화영, 민화영, 민화영……. 분명히 들어본 이름인데.”
이에 나는 미소를 지은 채 포연월에게 짧게 대꾸해줬다.
“성수곡.”
“아! 맞다! 성수곡……!”
포연월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즉시 민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너어……! 그럼 네가…….”
민화영이 대답 대신 포연월을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렇다.
민화영은 현 성수곡주 경현옥의 셋째 제자다.
대형 후기지수일 것이라 예상은 했었지만, 성수곡주의 제자는 내 예상 범위 밖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성수곡은 서부지맹 소속이기 때문이다. 성수곡주의 제자면 당연히 서부지맹 잠룡관으로 입관했어야 한다.
뭐, 면구를 써서 용모를 바꾸고, 가명까지 써서 동부지맹 잠룡관에 입관한 걸 보면 나름의 사정은 있겠지만.
민화영에게 말했다.
“이대로 남들에게도 정체를 드러내고 다닐 마음이 아니라면 슬슬 다시 면구를 착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민화영이 대꾸하자 포연월이 식수가 든 죽통을 들고는 뚜껑을 열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자 민화영이 신형을 돌리더니 허리를 숙이며 양손을 모았고, 포연월은 그 양손 위에 물을 따라줬다.
민화영이 그 물로 얼굴을 씻었다. 면구를 다시 붙이려면 얼굴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민화영이 세면하고 나서 소매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자 포연월이 면구 착용을 도와줬다.
문득, 몇 년 전에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했던 때가 떠오른다.
어쩌다가 통합 잠룡대전에 따라가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나는 원래 대전에 참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관전만 할 생각이었다. 괜히 주목받아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찬, 제갈수광, 남궁벽, 선우훤 등이 내기에 큰돈을 걸고는 은근히 나를 부추긴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결승까지는 진출해야 했다.
그러나 우승까지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는 관심 집중도가 매우 다른 탓이다.
그런데도 내가 우승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우승 보상이 성수곡의 소성심단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절정에 진입하는 게 목표였다 보니, 내공을 늘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렇듯 성수곡의 제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런 것도 일종의 연緣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