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68
단목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라, 우리는 이후에도 한동안 전음으로 수다를 떨었다.
초반에는 주로 무공에 관련된 얘기를 나눴는데, 중간부터는 단목세가의 늦둥이인 단목연과 송풍장의 늦둥이인 송유림 얘기로 흘러갔다.
늦둥이들 둘 다 한창 귀여울 나이다 보니 서로 얘기할 게 많았다.
전음으로 대화하는 중에도 나는 계속 관도들을 관찰했다.
다들 경공술 수준이 기대 이상인데, 곡양정과 호연주의 경공 실력이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편이었다.
한데 그 두 사람 다음으로 부족해 보이는 이가 다름 아닌 갑반의 여규상이었다. 역시나 처음에 내가 관도들의 기도를 통해 예상했던 경지가 대강 맞았던 모양이다.
여규상의 위는 맹운표고 그 위는 안소극인데, 둘 다 경공에 대한 이해도가 제법 높아 보인다.
단순히 주입식으로 무공을 익히기만 해서는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배운 무학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 알맞게 적용, 활용,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맹운표와 안소극은 그러한 자세가 갖춰진 듯하다.
즉, 인재들이다.
경공 실력이 가장 좋은 이들은 역시 능우희와 견수암이다.
단목지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능우희의 경공이었고, 나를 놀라게 했던 건 견수암이었다.
일단 능우희의 경공은 미끄러지는 듯하다.
흔히 고수들이 부드러우면서도 빠르게 경신법을 펼칠 때 미끄러지듯 나아간다는 표현을 쓴다.
능우희의 경공은 그것과는 궤가 다르다. 실제로 상하 반동이 극히 적어서,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경공 자체의 특징인 것이다.
전생부터 현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신법을 봐왔지만, 저런 형태의 경공을 본 기억은 없다. 유파가 어디인지 전혀 추측이 안 될 정도다.
쟤는 대체 정체가 뭘까.
다음은 견수암인데, 내가 그로 인해 놀랐던 이유는 경공 때문이 아니다.
물론 경공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경공만 봐도 그가 기재임을 알 수 있으니까.
내가 놀랐던 이유는 그의 내공 때문이다.
활성화된 기운의 성질이, 내가 아는 길초량의 기운과 비슷하다. 같은 내공을 익힌 것이다.
달마하원이라고 했던가.
견수암은 그곳의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로 견수암이 차고 있는 저 강화곤 안에서 검이 뽑혀 나올 가능성 또한 매우 커졌다.
길초량과 무슨 관계일까.
예전에 혈교의 대규모 거점 타격 작전 시, 특수작전조는 동굴 안에서 달마하원의 전대 고수인 탁연광과 마주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점에 길초량이 달마하원의 제자임을 알아차렸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탁연광을 처치한 직후, 길초량이 직접 내게 전음으로 밝히기도 했었다.
지하 공간에서 생존하여 남궁설과 함께 잠룡관으로 복귀한 후에도, 길초량과 둘이서 실컷 술을 마시며 달마하원에 관련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날 길초량은 자신이 달마하원의 차기 원주로 내정된 장문제자라는 사실까지 밝혔었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견수암은 길초량의 사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중에 길초량 얘기를 꺼내면 견수암이 뭐라고 둘러댈지 기대된다.
이후에도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관도들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대강 파악이 되었다.
곡양정과 호연주는 일류의 초중반에 다소 못 미치는 듯하고, 여규상, 맹운표, 안소극은 일류의 초중반에서 중반 사이인 듯하다. 그중에서 안소극은 일류의 중반에 더 가깝다.
견수암과 능우희는 일류의 중반쯤인데, 둘의 경지는 내 예상보다 더 높을 가능성도 일부 있어 보인다.
한동안 경공을 펼치며 달리던 어느 순간, 추소륵이 한 손을 들어 조원들을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전방의 고지 쪽에, 신호인 것 같소.”
그 말에 먼 전방을 확인해 보니,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구 조에서 작고 하얀 깃발을 천천히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식 신호구려.”
내가 대꾸하자 추소륵이 본인의 행낭 옆에 결속해둔 깃발을 꺼내 들었다.
곧 그가 자세를 낮춘 채 근처의 커다란 바위 쪽으로 이동하더니, 바위의 남쪽에 숨어서 천천히 깃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신호를 알아들었다는 의미다.
우리의 이동 경로상, 적의 첩보조는 우리의 북쪽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커다란 바위의 남쪽에 몸을 숨긴 채로 깃발을 흔든 것이다.
그러자 먼 전방의 고지에서도 확인의 의미로 또다시 깃발을 천천히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한 후, 등에 메고 있던 큰 행낭을 벗어 놓으며 조원들에게 말했다.
“잠시 휴식이다. 몸을 숨긴 채로 쉬어야 한다. 쉬는 동안에도 경계는 필요하니 휴식 시간마다 두 명씩 번갈아 경계를 세울 거야. 처음에는 내가 갈 생각인데 누가 같이 가면 좋을까…….”
고민하는 척 말을 늘이며 관도들을 훑다가, 일부러 견수암의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래. 이번에는 견수암이 같이 가지.”
“예.”
견수암이 대꾸하며 행낭을 내려놓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향했다.
나뭇가지들을 딛고 꼭대기 쪽으로 올라가는 중에도, 나를 따라 도약하며 올라오는 견수암의 모습을 관찰했다.
가지들을 가볍게 디디며 솟구쳐 오르는데, 그 모든 과정이 가볍고 깔끔했다.
더 중요한 점은 자연스럽게 길초량을 떠올리게 하는 경신법이라는 사실이다.
뭐, 이 정도면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나무의 상단에 오른 우리는 나무 기둥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높이의 가지에 섰다.
[경신법이 깔끔하네?]
내가 미소를 보이며 전음으로 묻자 견수암이 대꾸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 대꾸를 듣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갔다.
[달마하원과는 무슨 관계지?]
견수암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다.
누가 봐도 정곡을 찔린 표정이다.
한데 견수암은 의외로, 금세 놀람을 거두더니 다시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감과 눈썰미가 귀신 같으시다고 들었는데 역시 들은 대로군요.]
길초량한테서 들었을 것이다.
녀석에게 말했다.
[이렇듯 단번에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송유겸 선배님을 대할 때는 어설프게 머리 굴릴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들었거든요. 그냥 솔직해지는 게 가장 현명한 태도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훌륭한 조언자로군.]
견수암이 씩 웃었다. 내가 방금 한 말이 길초량을 두고 한 말임을 아는 것이다.
또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길 형의 사제인가?]
[아, 사숙입니다.]
[벌써 길 형의 아래 항렬도 있나 보군? 길 형에게 사숙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사숙입니다.]
이에 나는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견수암의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표정의 의미를 알았는지, 견수암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사부님께서 길 사질의 사숙조십니다. 길 사질의, 사조 되시는 분의, 막내 사제가 바로 제 사부님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저와 길 사질의 정확한 관계는, 사문 내의 종숙과 종질 관계라고 해야겠지요.]
[아.]
이제야 관계가 제대로 이해가 간다.
흔히 쓰는 말로 당숙과 당질 관계라는 뜻이다.
이 경우는 당숙의 나이가 어리고 당질의 나이가 많은 경우다.
[하지만 사문에서는 그런 관계도 그냥 사숙과 사질로 치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사숙인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견수암이 말을 덧붙였다.
[제 사부님께서는 원래 제자를 들이지 않을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다가 느지막이 저를 거두시다 보니 사문의 배분 관계가 다소 불편하게 된 겁니다. 다행히 사부님의 제자가 저뿐이라, 사질들이 불편을 겪을 일이 더는 없었지요.]
나는 길초량의 친우인데 녀석이 길초량의 사숙이라니.
강호에서는 배분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중요시되며, 백도에서는 더욱 중요시된다.
그렇다 보니 이 어린 녀석에게 계속 하대해도 되나 싶다. 괜히 나 때문에 길초량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될 정도로 길초량은 내게 소중한 친우다.
[덕분에 우리 사이의 배분도 좀 이상해지는군.]
내 말에 견수암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개의치 마십시오. 선배님께서는 실제로 잠룡관의 선배신 데다가, 송풍장의 장주시기도 하잖습니까.]
견수암이 바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길 사질과 저는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어린 제가 사문에 처음 입문했을 때부터 길 사질이 저를 가까이에서 챙겨줬거든요. 편한 사이다 보니 길 사질은 제게 호칭만 사숙으로 쓸 뿐, 평소에는 하대합니다. 저 또한 길 사질에게 호칭만 사질이라고 부를 뿐, 공대합니다. 사문의 어른들이 계실 때만 서로 공대하고요.]
둘의 관계를 대강 알 것 같다.
[그렇군. 참고하지.]
고개를 끄덕여준 후,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견수암의 사부가 원래 제자를 들일 계획이 없었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면 느지막이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견수암을 제자로 들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견수암 딱 한 명만을.
견수암의 자질이 별로였다면 그의 사부가 늦은 시기에 굳이 제자를 받았을까?
그럴 리 없다.
빼어난 자질을 알아봤기에 제자로 삼은 것이다.
유일한 제자인 만큼 공을 많이 들여서 키워냈을 테고.
견수암이 어린 나이에도 저런 실력자인 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잠시 말없이 있는데 견수암의 전음이 들려왔다.
[길 사질은 잠룡관 재학 시절에 본원으로 꾸준히 안부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제 앞으로도 꼬박꼬박 한 통씩 보내줬지요. 서신을 통해 유명하거나 빼어난 관도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송 선배님 관련 내용의 비중이 매우 커지더군요.]
[길 형이 욕은 안 써놨기를 바라고 싶군.]
[하하, 욕은 없었습니다. 재미있고 매력적인 친우이며, 보면 볼수록 놀랍고 대단한 친우라고 했습니다. 그런 친우와 절친한 사이다 보니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고 든든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길초량 생각이 나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견수암이 전음을 이었다.
[길 사질 덕분에 송 선배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이 생겨서, 언젠가는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한데 실제로 이렇듯 뵙게 되고 함께하게 되니 매우 설렙니다.]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물었다.
[길 형은 탄자결 위주로 수련했다고 들었는데, 후배도 그런가?]
[사부님께서는 탄자결과 쾌자결을 병행해서 수련하신 분이고, 제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쾌자결을 수련해왔다면 속도도 제법 빠를 것이다. 더 믿음직하다.
[그 곤에서도 검이 뽑혀 나오나?]
내가 묻자 견수암이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혹시 암기술도 하나?]
[철비정술을 합니다. 몇 년 전에 길 사질이 익혀두면 유용할 거라며 추천해줬습니다.]
신룡대원으로서, 실전에서 암기술 활용 여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추천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견수암은 길초량이 신룡대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길초량이 사문의 수뇌부에게만 알렸을 수도 있으니, 신룡대에 관해서는 굳이 먼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후에도 나무 위에서 잠시 더 전음을 주고받다가 내려왔다.
휴식 후에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단목지와는 충분히 대화를 나눈 만큼, 이후부터는 나도 추소륵과 함께 일 열에 섰다. 자연스럽게 단목지가 능우희와 함께 마지막 열이 되었다.
전방에서는 한 시진쯤 달리면 휴식 신호를 보내왔고, 그렇게 일각쯤 쉬고 나면 다시 이동 신호를 보내왔다.
계속 그런 과정이 반복되었다.
정오에 가까워지자 앞서 있는 구 조로부터 또 다른 신호가 전달되었다.
이동을 마무리한다는 신호였다. 은밀히 이동해야 하니 지금부터 자고, 어둑해지면 다시 이동하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구 조에게 보낸 후, 현재 위치 근처에 머물 자리를 잡았다. 이후에도 전방에서 언제 또 신호를 보내올지 모르는 만큼, 방금 신호를 주고받은 위치 근처에서 항시 번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번 순서를 정했다.
반 시진씩 번을 서기로 했고, 나와 추소륵과 단목지는 중간 순번을 맡기로 했다.
번을 설 때 가장 피곤한 순번이 중간 순번이다. 자다가 중간에 깨어나서 번을 선 후에 다시 자야 하기 때문이다.
관도들은 녹초가 되어, 초번을 맡게 된 곡양정을 제외하고는 곧장 곯아떨어졌다.
저럴 만도 하다.
경공술로 장거리를 이동해본 경험이야 다들 있겠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산지로만 이동해본 경험은 거의 없을 테니까.
솔직히 나는 딱히 피곤하지 않기에 더 오랜 시간 동안 번을 서줄 수 있지만, 일부러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배려해주면 애들 버릇만 나빠진다.
전장에서는 전투뿐만 아니라 이동조차도 이렇게 고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볼 필요가 있다.
저녁 무렵에 일어난 우리는 앞선 구 조의 신호를 따라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증원 전력과 귀주 수복 전단은 귀양 남쪽의 산지를 타고 멀리 돌아 귀양의 서부 산지로 향한다고 한다. 중간에 구 조의 전령이 와서 전달해준 내용이다. 귀양은 귀주의 도읍이자 무림맹 귀양지부가 있는 곳이다.
운남은 귀양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 귀양지부의 적들이 철수할 때도 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들의 퇴로 쪽에 은밀히 자리 잡은 후, 그곳에서 체력을 보충하며 귀양지부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모양이다.
체력 보충이 끝나는 대로 귀양지부를 기습하게 될 것이고, 혹시라도 그전에 귀양지부의 적들이 퇴각하려는 징후가 포착되면 매복하여 타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