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95
내면의 뭔가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이 운기 중에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자꾸 들뜨려는 마음을 다잡은 채로 차분하게 운기를 이어갔다.
한 차례 천천히 진행되던 운기를 마치고는 기운을 빠르게 돌리며 고속 운기를 시작했다.
맑고 상쾌한 기분이 느껴진 후부터는 더 이상 내면의 안정성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남아 있는 약 기운을 흡수하기만 하면 된다.
고속 운기조식을 이어가면서 관찰해 보니 운기의 속도가 더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약 기운의 흡수율도 더 증가했다는 게 체감되었다.
확실히 회회심공의 경지가 한 단계 더 올라선 것이다.
나는 좋은 기분으로 계속해서 고속 운기조식을 이어갔다.
어느 순간엔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기분 좋게 몰입해서 운기조식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우선 체내를 관조했다.
더 이상 약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아지경에서 운기하는 동안에 모두 흡수되었을 것이다.
단전은 충만하고 온몸에는 날아갈 듯한 활력이 가득하다.
아까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게 적잖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그 답답함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최절정에 오른 것이다.
세상에, 최절정이라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오르는 경지다 보니 희열이 밀려온다.
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내가 최절정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최절정에 가까워지겠거니 여겼었다.
그런데 최절정에 올라버린 것이다.
단순히 영약을 복용하고 그 기운을 흡수하는 걸 넘어, 운기 중에 발생한 위험한 변수까지 이겨냈기에 이렇듯 더 큰 성과가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진행되던 운기조식을 마저 마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매우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떴는데도 초점이 금방 돌아왔다. 게다가 시야가 이전보다 환한 느낌이다.
왕철양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향해 외쳤다.
“조, 조교님……!”
이에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녀석이 말했다.
“끝마치신 겁니까?”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녀석이 내 쪽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그러더니 빠르게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지하실이라서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점심시간은 지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그렇게까지 많이 지났다니.
대충 미시 초(오후 1시)쯤이라고 가정해도, 꼬박 네 시진 넘게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시간은 밖으로 나가봐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쇠사슬이 모두 풀렸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신체를 이리저리 펴고 돌리고 비틀었다. 몸을 풀기 위해서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으니 몸이 찌뿌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의 멀쩡한 수준이었다.
내공 경지가 한 단계 올라선 효과인가 싶다.
살짝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하나.
땀으로 인한 끈적끈적한 느낌과 옷에서 나는 땀 냄새다.
몸을 풀던 중에 왕철양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왠지 녀석이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움직임을 멈춘 후에 물었다.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예. 그게……, 조교님께서 운기조식을 하시던 중에 너무도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지라…….”
무슨 일이 벌어졌었기에 저러는 걸까.
이에 내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 의미를 읽은 왕철양이 입을 열었다.
“조교님께서는 초반에 더위로 고생하셨고, 그다음에는 추위로 고생하셨습니다.”
“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부채질해주고 옷 덮어줬던 거, 고마웠다.”
“아닙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 어찌 그 정도도 안 하고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어서 말씀드리자면, 그 후로 한동안 조교님의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가 창백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내면에서 열기와 한기가 제어되지 않고 있던 때였을 것이다.
왕철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현상이 반복되던 어느 순간, 조교님의 주변으로 어두운색의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는 처음에는 옅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짙어졌습니다. 어찌나 놀랍던지…….”
“저, 정말……?”
“예.”
나도 놀랍다.
내 주변으로 안개가 피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현상이 벌어진단 말인가.
추측건대, 열기와 한기가 점차 섞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안개가 피어난 게 아닌가 싶다.
한데 안개가 왜 평범한 색이 아니고 어두운색이었을까.
“어두운색이라면, 흑무黑霧?”
“검붉은색이었습니다.”
검붉은색은 마기와 마공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두영산의 약이 마기를 활성화하고 마공을 증진시키는 약이다 보니 그런 색이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웠겠다.”
“솔직히 처음에는 겁도 살짝 났는데, 그보다도 염려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혹시라도 조교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금세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묵묵히 지켜봤습니다. 조교님은 어떤 싸움이라도 이겨내실 분임을 아니까요.”
“하하. 나라고 모든 싸움에서 다 이길 수는 없어.”
그러자 왕철양이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했다.
“어쨌거나 그 안개가 피어나는 동안에 유심히 관찰해보니, 조교님의 피부는 이전에 비해 덜 달아오르고 덜 창백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철양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는 안개가 너무 짙어져서,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데도 조교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시점부터는 조교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면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방해될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조교님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 같아서…….”
신기하다. 그 정도로 짙은 안개라니.
내 내면의 상황이 매우 격렬했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게 아닐까 싶다.
“짙은 안개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됐습니다. 저는 계속 조교님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에 또다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검붉은 안개의 위쪽으로 반투명한 꽃봉오리 하나가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조교님의 머리 위쪽이었습니다. 직접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나도 눈을 휘둥그레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리 위쪽으로 꽃봉오리가 피어났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꽃봉오리라니?”
“은은한 서광이 서린 꽃봉오리였습니다. 어찌나 놀랍고 신비롭던지, 자칫 목소리가 나올까 봐 양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면 조교님에게 방해가 될 테니까요.”
꽃봉오리라고 하니 삼화취정이 떠오른다.
삼화취정은 운기조식을 할 때 머리 위에 세 개의 꽃봉오리가 피어난다는 도가의 경지로, 과거에 많이 쓰였던 경지 개념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세 개의 꽃봉오리가 아니라 하나의 꽃봉오리였지만, 그래도 삼화취정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다고 하니 왠지 신기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돌이켜 보면, 운기 중에 머리 쪽에서 일이 벌어졌던 건 두 차례였다.
첫 번째는 내면에서 우레가 치는 느낌과 함께 폭발의 기운이 뇌리를 때렸을 때였다. 나는 그때 뇌리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상태로, 정신의 끈을 겨우 붙잡고 서서히 운기조식을 이어갔었다.
두 번째는 바로 그 직후였다.
서서히 운기를 이어가던 어느 순간, 갑자기 뭔가가 정수리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이 환해지며 맑고 상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철양이 말한 꽃봉오리가 피어났을 때는 아마 그 두 번째 순간이 아니었을까.
왕철양이 말을 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장의 꽃잎이 서서히 펼쳐지는데, 신기하게도 꽃잎이 펼쳐질수록 조교님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안개가 점점 꽃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마치 꽃이 검붉은 안개를 영양분 삼아서 자라는 듯했습니다.”
왕철양이 바로 말을 이었다.
“검붉은 안개가 모두 빨려 들어가서 사라졌을 때쯤에 꽃이 만개했습니다. 너무나도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이라서 넋을 잃고 봤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신기한데, 직접 보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내 눈에 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다.
“꽃잎이 펼쳐졌다니까 궁금해지네. 무슨 꽃 같았어?”
“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왕철양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모양새가 커다란 영춘화 같았습니다.”
“영춘화…….”
“물론 영춘화와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영춘화와 가장 비슷한 느낌이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당장 꽃잎의 수부터가 일반적인 영춘화와 달리 일곱 장이었고, 꽃잎마다 색도 달랐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서둘러 물었다.
“각각 무슨 색이었는데?”
“그게……, 청색, 홍색, 녹색, 자색이 있었고, 나머지는 황금색, 은백색, 묵색이었던 듯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뇌리에 번뜩 떠올랐던 건 바로 칠채마주였다.
그런데 역시나 방금 왕철양이 말한 꽃잎의 색들과 칠채마주의 색들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다시 서둘러 물었다.
“그래서, 그 후에 꽃은 어떻게 됐어?”
“한참이나 조교님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어느 순간 연기처럼 변하며 조교님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들어보니 칠채마주의 힘이 개입한 게 분명해 보인다.
왕철양에게 물었다.
“그 후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조교님께서는 편안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운기조식을 하다가 방금 눈을 뜨신 겁니다.”
“오랫동안?”
“그 꽃이 사라진 후부터 족히 두 시진은 더 운기조식을 하셨을 겁니다. 물론 이곳이 지하라서 제가 느낀 시간이 정확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부분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쾌한 기분을 느낀 후부터는 내면의 안정성을 염려할 필요 없이 고속 운기를 취했었다.
그러다가 무아지경에 빠졌을 텐데, 왕철양의 말대로라면 거의 한 시진 반쯤은 무아지경 상태에 있었던 게 된다.
내가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무아지경에 있었다니.
어쨌거나 왕철양이 해준 이야기들은 차후에 천천히 정리해봐야 할 듯하다.
왕철양에게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고 있느라 고생 많았다. 고맙고.”
“고생은요. 조교님께서 원하셨던 바를 달성하신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육포가 정말 맛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이에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준 후에 말했다.
“이 방에서 본 것들은 함구하고.”
“당연합니다.”
“그래, 그럼 이제 슬슬 나가볼까?”
“예.”
우리는 각자의 행낭을 챙겨서 수련실을 나섰다.
관리인에게 인사하고 열쇠를 돌려준 후에 면벽수련동을 나섰는데, 왕철양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늦은 오후였던 탓이다.
신시 정(오후 4시)이 지난 시각이니, 이러면 우리가 수련실에 여섯 시진 동안이나 머무른 게 된다.
하루가 총 열두 시진이니, 꼬박 반일(半日) 동안 운기조식만 취하며 보낸 것이다.
* * *
면벽수련동에 갔던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고, 귀양지부에서의 생활은 총 이 주가 지났다.
그쯤 되자 부상이 제법 심했던 이들도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회복되었다.
아무래도 무인들이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운기조식을 하면 회복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잠룡관도들을 상대로 꾸준히 특강을 진행했고, 이틀에 한 번씩은 사엽상과 황호병을 면회하며 지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나흘간 고수 중 그 누구도 내 변화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황호병이나 사엽상도, 단목진이나 문숙경도, 나와 가까운 남궁찬, 남궁묵, 임려현도, 심지어는 제갈수광마저도 내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즉, 내가 최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회회심공은 내공 경지가 잘 드러나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는데, 최절정에 오르면서 그 특성도 더 강화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