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400
동갑도의 동굴에서 이 여인과 같이 사라졌던 사내의 기운도 기억하고 있다.
감각을 매우 불쾌하게 만드는 기운.
아득한 피의 광기가 느껴지는 기운.
사파놈들의 기운처럼 성질은 탁하지만, 사파놈들과 달리 흐름 자체는 상당히 잘 정돈된 기운.
나는 그러한 기운을 가진 자들을 여러 명 처치한 바 있다.
기형거검을 쓰던 덩치.
마차를 쓰던 키 큰 놈.
박도를 들고 있던 왜소한 놈.
월아산을 쓰던 뚱뚱이.
왜도를 쓰던 뱁새눈.
호수구를 쓰던 부리부리.
이 여인과 함께 동굴을 빠져나갔던 사내의 기운도 내가 죽였던 그자들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운이 혈교의 기운임을 안다. 이 여인과 같이 동굴을 빠져나갔던 사내도 당연히 혈교 쪽의 인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인의 대답에 최소한의 성의가 담겨 있기를 바라고 있다.
만약 말도 안 되는 대꾸를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인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내와의 관계도 있을 테니 여러모로 고민되는 모양이다.
애초에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던 만큼, 굳이 재촉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기다렸다.
의자가 반쯤 누울 수 있는 형태의 안락하고 푹신푹신한 의자라서 편안하게 기다릴 수 있다.
잠시 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와 관련된 정보를 당신에게 발설했다는 게 그쪽에 알려지면 나는……, 그들에게 죽어.”
“첫째, 얘기를 안 하면 귀하는 어차피 그전에 나한테 죽소.”
내가 대꾸하자 여인이 몸을 한 차례 떨었다.
“둘째, 귀하와 나는 애초에 만난 적도 없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으로 하면 되오. 생각해 보시오. 귀하조차 내가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잖소. 한데 우리가 만났다는 걸 누가 알겠소? 참고로 나는 입이 매우 무거운 사람이오. 이건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요.”
강서의 성자현에 있다는 그녀의 다른 은신처로 이동할 때는 면구를 착용하면 된다. 나는 항상 하나를 챙겨 다니는데, 여인도 당연히 면구가 있을 것이다. 면구가 있어야 도둑질하기에도 편하니까.
즉, 우리가 같이 이동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혹시라도 그쪽에 들켰을 경우에 당신이 내 신변을 보호해줄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그들로부터 추적당하면서 맘 졸이며 살아야 한다고.”
“나를 많이 얕잡아보고 있는 모양이구려. 지금 귀하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니.”
내가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하자 여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귀하가 다른 은신처에 있다고 주장하는 그 잘난 영약에 내가 환장한 줄로 알고 있다면 그건 오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소. 물론 그걸 취하면 좋기야 하겠지. 그러나 귀하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내가 어린 나이에 이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이오.”
그녀를 향해 바로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해보시오. 내가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기연이 많았다고 해도, 오로지 기연만으로 공력이 이만큼 늘었겠소? 나는 남들보다 공력을 훨씬 빨리 모을 수 있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영약에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더 빨리 경지가 상승할 수 있다는 뜻이오.”
냉막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를 짜증 나게 하지 마시오. 억지로라도 귀하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니. 쓸데없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나는 지금껏 사파인들과 마인들 수천 명을 죽인 사람이오.”
묻는 말에 토 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라는 협박이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여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잠시 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이름은 여구민. 혈교의……, 대공자야.”
혈교의 대공자라.
나는 그 사내가 혈교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여인의 저 대답은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여구민.
복성으로, 성이 여구씨고 이름이 민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 여구민이라는 자와 귀하는 어떤 관계이기에 같이 움직였던 것이오?”
“그다지 관계없어. 당시에 동갑도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일 뿐이야.”
“그런데도 중요한 순간에 같이 빠져나가셨다?”
“사유 어른이 우리 할아버지와 친했다 보니 나를 특별히 신경 써준 것뿐이야. 그래서 여구민 공자에게 상황이 불리해지면 나를 데리고 빠져나가라고 부탁하신 거고. 육지에 다다른 후에는 오래 지나지 않아 헤어졌어.”
딱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믿지 않는다는 의미로 피식 웃어줬다.
잠시 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대공자라면 혈교에서 교주에 이어 이인자일 것이고.”
여인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몇 살이나 되오?”
“면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연령대는 큰 의미가 없겠지. 나이를 직접 말한 적은 없어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얼핏 듣기로는 삼십 대 후반이라는 것 같았어.”
지금은 육 년이 지났으니 대강 사십 대 중반 즈음일 것이다.
“그자의 무공 경지는 어느 정도요?”
과거에 동굴을 빠져나가던 그의 기운을 느끼기는 했으나, 정확한 경지까지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의 내 경지는 갓 절정에 오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몇 년 전의 일이니, 그간 그 사내의 경지도 적잖이 상승했을 것이다. 혈교의 대공자라면 이런저런 지원을 많이 받을 테니까.
여인이 대꾸했다.
“그가 본인의 경지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이 얘기하는 투로 볼 때 이미 최절정인 듯했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삼십 대에 이미 최절정에 올랐다면 무당파의 진허자를 넘어, 남궁찬 못지않은 무공 천재라는 의미니까.
또한, 지금은 몇 년이 지난 시점이니 제법 원숙한 최절정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으로 마주친다고 가정할 때, 그의 경지를 최소 최절정의 중상위권 이상으로 상정하고 전투에 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인에게 물었다.
“증운생이 귀하를 동갑도로 초대한 목적은 무엇이었소?”
“사교 목적이었어.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 될 사람들이 많다면서 꼭 들러달라고 하셨어.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는데, 사유 어른을 뵌 지도 오래됐고 해서 할 수 없이 갔던 거야.”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 될 사람들이라…….”
“그건 당신도 잘 알 텐데. 그때 그곳에서 백도인들에게 다 죽었을 테니까.”
당시에 죽은 사파의 고수들을 말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다른 질문을 했다.
“여구민과 증운생의 위계 관계는 어때 보였소? 누구의 서열이 더 높아 보였소?”
“그냥 서로 동등한 관계로 보였어. 다만…….”
“다만?”
“사유 어른이 좀 더 대공자의 눈치를 살피며 기분을 맞춰주려고 하는 느낌이었어. 손님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물었다.
“그 두 사람은 주로 무슨 얘기를 나눴소?”
“나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친교를 위한 일상적인 대화들을 주로 나눴어. 중요한 대화는 아마 둘이서 따로 하지 않았을까.”
“하면 여럿이 대화를 나눌 때의 주된 대화 주제는 무엇이었소?”
“당시 동부 해안 쪽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어. 동부 해안에서 백도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백도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며 우려하는 분위기였어. 그리고…….”
“그리고?”
“그때 백도인들이 동갑도를 급습한 걸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해서 당황한 분위기였어. 사유 어른도 너무 방심했다며 자책했었고.”
당시에 우리는 밤에, 뱃길을 우회하여 동갑도와 부속 도서들을 급습했었다. 우리가 은밀하고 치밀했기에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다시 물었다.
“귀하가 느끼기에 그 여구민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 같았소? 언행이나 성격 같은 거 말이오.”
“혈교의 대공자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나도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의외로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어. 그냥 봐서는 누가 저 사람을 혈교의 대공자라고 생각할까 싶은 정도랄까? 아마 그가 기운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면 사람들 대부분이 학자나 선비라고 생각할걸?”
그 여구민이라는 자, 내가 추측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혈교는 천마신교와 연합한 상태인데, 위지광 그 자식이 여구민이라는 자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그 머저리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계략에 걸려들어서 천마신교를 혈교에 갖다 바치는 건 아닌지 몰라.
참고로 나는 위지광 포함, 사부님 시해에 가담한 자들이 파멸하는 걸 보고 싶은 거지, 천마신교 자체가 파멸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천마신교는 내 뿌리니까.
사부님과의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니까.
여인에게 물었다.
“여구민이라는 자의 외모나 신체 특징 같은 건 어떻소?”
“외모에 대해서는 아까 말했잖아. 면구를 쓰고 있었다고.”
“아, 참.”
하긴, 여구민의 입장에서도 굳이 본인의 본래 용모를 드러내고 다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키는 사내들의 평균보다 약간 큰 편이고 체격은 평범해. 특징이라면, 눈동자가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야. 충혈된 게 아니고 눈동자의 색 자체가 붉은 거였지. 미약하게 붉은 정도라서, 가까운 곳에서 봐야 드러나는 정도지만.”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돈다니, 어떤 현상 때문일지 궁금하다.
“그 눈동자를 직접 보면 다소 무섭겠구려.”
“아냐. 그게 무서운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예쁘다는 느낌이야. 그래서 나도 신기했어.”
여인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꾸하는 중이다.
저러한 태도는 일단 참작해줄 만하다.
뭐, 앞선 내 협박이 통했다고 봐야겠지만.
어쨌거나 가장 궁금했던 사안들에 대해서는 거의 다 물어본 듯하다. 다른 질문이 생각나면 그건 차후에 물어봐도 될 것이다.
일어서서 여인에게 다가가 점혈 상태를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했다.
여인이 움찔하며 물었다.
“왜, 왜 그래……?”
겁에 질린 표정을 보니 오해가 있었던 듯하다.
들을 대답을 다 들었으니 이제 본인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이에 살짝 헛웃음을 지은 후에 말했다.
“저 의자가 편해서 한숨 자려고 귀하의 점혈 상태를 확인한 것뿐이오. 미리 눈 좀 붙여놔야 이따가 귀하가 잘 때 나는 깨어 있을 것 아니오.”
그 말에 여인이 의문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내게 사로잡혔다고 해도, 귀하도 잘 때만큼은 편하게 자야 할 것 아니오. 그래서 귀하가 잘 때는 점혈을 풀어줄 생각이오.”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 정도로 배려해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누가 봐도 파격적인 배려이긴 하다.
그녀에게 말했다.
“내 질문에 성의껏 대답해줬다고 느꼈소. 그에 대한 보답이오. 그러나 점혈을 풀어주는 대신, 나는 근처에서 귀하를 감시하고 있을 수밖에 없소. 그러니 귀하가 선택하시구려. 점혈된 채로 찌뿌둥하게 잘지, 아니면 나한테 감시받더라도 잠만큼은 편하게 잘지.”
“펴, 편하게 잘래!”
여인이 빠르게 외쳤고,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현명한 선택이오.”
내가 대꾸하자 여인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제대로 잘 수 있겠어? 만약 당신이 생각보다 늦게까지 자고, 그동안에 혹시라도 내 점혈이 먼저 풀리면 어쩌려고?”
이에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되면 부디 편히 보내주시구려. 지금껏 나도 귀하에게 최소한의 배려는 보였으니, 귀하도 나를 고통 없이 보내주는 정도의 배려는 해주시리라 믿겠소.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여인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에 나는 안락한 의자로 가서 반쯤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낯선 환경에서도 조금만 노력하면 잘 잘 수 있다. 흑풍대 시절부터 아무 데에서나 자는 데는 익숙했던 탓이다.
나는 이내 잠들었다.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여인이 눕혀져 있던 곳을 확인했다.
그대로 누워있다.
눈을 감고서.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서너 걸음을 떼자 그녀가 눈을 떴다.
“일어났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또렷하다. 눈만 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시오?”
“대충 세 시진 반(7시간)쯤일 거야.”
“어라? 내가 그렇게나 오래 잤단 말이오? 정말이오?”
“못 믿겠으면 밖에 한 번 나갔다 와보든가.”
“아니오. 귀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편하게 자는 그 모습만 봐서는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 당신 집인 줄 알았어.”
“으음, 저 의자가 편해서 그랬나?”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대꾸했을 때쯤이었다.
꼬르르륵- 꼬륵-
여인의 복부에서 그 소리가 났다. 소리가 매우 컸다.
여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민망해할 것 같으니 굳이 쳐다보지 말자.
그녀가 시장을 봐 왔던 행낭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화로에 불 피워도 상관없소? 연기를 따로 신경 써야 하냐는 말이오.”
“안 써도 돼. 연기가 거의 안 나는 숯이거든. 그런데 왜? 당신이 요리라도 해주게?”
“그럴 생각이오.”
“요리, 할 줄은 알고?”
“아주 잘하지는 못해도 먹을 만은 할 것이오. 그렇다고 귀하에게 맡길 수는 없잖소. 내가 먹을 요리에 뭘 탈지 모르니.”
그러자 여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적어도 먹을 것 가지고는 장난 안 쳐.”
“나도 귀하가 그러리라 믿소. 그래도 귀하가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보시오. 이 상황에서 요리를 귀하에게 맡기고 싶을지.”
여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내가 식자재를 꺼내는 사이에 여인이 말했다.
“좋은 재료들로 고른 거야. 부디 망치지 말아줘.”
“다시 말씀드리지만 먹을 만은 할 것이오.”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해 보인 후, 여인에게 주방 도구와 조미료 등을 물어보며 요리를 시작했다.
참고로 나는 몇 가지 요리에는 자신이 있다.
흑풍대 시절, 작전 때문에 두어 달간 신입 숙수로 위장한 채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양념을 만들어서 돼지고기 야채 볶음을 만들고, 생선도 튀겼다. 여인이 사 왔던 만두는 소량만 쪘다.
탁자에 모든 식사 준비를 마쳐 놓은 후에 여인의 점혈을 풀어줬다.
점혈이 풀리자 여인이 신체를 이리저리 돌리고 비틀며 몸을 풀더니 의자에 앉았다.
여인이 젓가락을 들어서 돼지고기 요리를 한 차례 맛보더니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제법이네?”
“먹을 만은 할 거라고 말했잖소.”
“그 이상인데?”
“고맙소.”
내가 대꾸하자 여인이 말했다.
“술 한잔하고 싶은데, 마셔도 돼?”
이에 내가 여인을 잠시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내 처지를 봐. 술 한잔 마시고 싶을 만도 하잖아. 어차피 이후에는 잘 텐데, 술 한잔 마시면 잠도 더 잘 올 테고.”
술병들은 탁자의 아래 구석에 있다.
식사하면서 종종 반주를 즐겨왔던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그녀가 바로 상체를 숙이더니 탁자의 아래에서 술 네 병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 두 병, 나 두 병.”
“괜찮소. 나는 안 마실 거요.”
“아, 그래? 그럼 내가 다 마시지, 뭐.”
이 여인도 상당한 술꾼인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음식을 입에 넣자, 여인이 빠르게 술병의 마개를 따더니 본인의 잔을 채웠다. 그러더니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었다.
술잔을 털 때 손목을 꺾는 각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여인도 내가 아는 주당들 못지않은 주당이다.
식사를 이어가던 중에 여인이 물었다.
“잠은 편하게 자게 해준다고 했으니 나도 오래 자도 되는 거지?”
“그렇소. 내 시야에 있는 한은.”
“많이 심심할 텐데. 아까 당신 자는 동안 혼자 가만히 있으려니까 엄청 심심하더라고.”
“글쎄. 딱히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소.”
“평소에 혼자서도 잘 노는 성격이야?”
“놀기는 무슨. 무공 생각하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그러오.”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무공 생각……?”
“내가 알고 있는 무공들을 머릿속으로 연구하기도 하고, 근래 봤던 무공들을 분석해 보기도 하고.”
“근래 봤던 무공을 분석한다고? 그러니까, 남들의 무공 같은 거?”
“그렇소.”
“잠깐 본 것만으로도 분석이 돼?”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가면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소. 당장 아까 귀하의 보법 같은 경우에도…….”
그러자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내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내 보법? 그거라면 잠깐 봤던 것뿐이잖아. 그런데도 분석이 된다고?”
이에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할 때, 보폭을 조금 줄여서 한 보를 더 딛는 게 좋아 보이오. 방향 전환 시의 마지막 일 보 전에 일 보를 끼워 넣어서 발목을 바깥쪽으로 살짝 꺾으면서 디뎌 보시오. 그 뒤 마지막 일 보를 디디며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오. 아마 그렇게만 해도 귀하의 보법은 훨씬 더 유려해질 거요. 방향 전환의 속도도 더 빨라질 테고.”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반응을 보니 아마 그녀도 보법의 그 부분에 대해 모종의 불편함 내지는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