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413화 (413/416)

내 안에 마교있다 413

연회는 인시 정(새벽 4시)이 지나서야 끝났다.

운천흠이 복귀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하자 연회도 자연스럽게 마무리된 것이다.

다들 차례대로 운천흠 앞으로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다가간 이들은 송천광, 이청오, 유영평이었다.

송천광이 굽신거리며 말했다.

“아이고오, 맹주님, 이렇게 금방 헤어지려니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또 뵙고 싶으나 저희 같은 사람들이 뵙고 싶다고 해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니 더욱 아쉽군요. 그저, 바쁜 일이 마무리되시거든 꼭 다시 한번 이곳에 방문해주십사 간곡히 부탁드릴 뿐입니다.”

연회 내내 운천흠과 송천광이 같이 있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다행히 운천흠은 송천광을 꺼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호감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상대가 무림맹주라서 그런지 송천광도 여러모로 조심하고 절제하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그 덕분일 것이다.

“허허헛, 초대해주셔서 고맙소. 그러나 요새 중대한 일들이 많다 보니 다시 방문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듯하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송천광이 아쉽다는 투로 대꾸하자 운천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다고 하시니 더 빨리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소. 내가 업무가 많기는 해도 며칠에 한 번씩은 쉴 틈이 있으니, 그 시간에 맞춰서 송 장주를 본맹으로 초빙하는 방법이오. 이곳에서는 어차피 뱃길을 이용하면 오가기도 쉬우니.”

“오오오! 저저, 저 같은 사람이 보, 본맹에……! 아이고,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송천광이 반색하며 대꾸하자 운천흠이 말했다.

“송풍장은 이미 무림맹의 중요한 일원이오. 송 장주는 송풍장의 어른이니 본맹에 올 자격은 충분하고도 넘치시고.”

“자, 자격……. 아이고, 그렇습니까. 허허! 허허허허!”

아주, 입이 귀에 걸려 있다.

운천흠이 이청오와 유영평에게도 말했다.

“두 분 총관님들도 같이 오시면 좋을 것이고.”

“감사합니다, 맹주님. 불러만 주시면 장주님을 모시고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저도 언젠가 한 번쯤은 본맹을 견학해보고 싶었는데, 맹주님 덕분에 그 소망을 이룰 날이 가까워지겠군요. 감사합니다.”

운천흠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운천흠이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구려. 다들 들어가서 쉬시오. 여러분의 무운을 빌겠소.”

그러자 남궁찬이 운천흠을 향해 정자세를 취하더니 주먹을 가슴에 대며 낮게 외쳤다.

“맹주님께, 추웅!”

공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

장원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이니,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저런 식으로 선창한 것이다.

“충!”

무림맹의 정식 조직에 속한 인원들도 다 같이 가슴에 주먹을 대며 ‘충’을 복창했다. 역시나 다들 공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다.

무림맹의 조직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인원들은 운천흠을 향해 포권했다.

운천흠도 주먹을 가슴에 대며 작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충.”

잠시 후 그가 주먹을 내리더니 말했다.

“자, 이제는 정말로 헤어집시다. 나는 주독을 좀 몰아낸 후 선원들과 같이 떠날 테니.”

운천흠이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남궁찬과 나를 일별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운기 중에 호법은 우리 화산의 식구들과 창천쌍룡이 서줬으면 좋겠는데, 수고 좀 해주겠나?”

이에 남궁찬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찬은 살짝 놀란 기색인데, 그의 눈에 비친 내 기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산의 식구인 윤단영과 선의림에게만 호법을 맡겨도 될 텐데, 굳이 콕 집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까지 부탁한 탓이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남궁찬과 내가 차례로 대꾸하자 운천흠이 내게 물었다.

“건물 외부에서 추천할 만한 장소 있나? 운치 있는 장소로.”

“운치라면 아무래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쪽이 괜찮긴 합니다만…….”

“그리로 가지. 앞장서게.”

“예.”

이에 내가 앞서서 걷자 네 사람이 내 뒤를 따랐다.

본채의 내원을 나서서 걸어 절벽에 도착했다. 저녁때 관산영과 같이 석양을 구경했던 절벽이다.

“오오, 확실히 운치가 있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운천흠이 적당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에 우리 네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운천흠에게서 멀어져 적당한 위치에 섰다.

자리를 잡은 후부터 나는 운천흠이 운기하는 모습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그가 우리에게 호법을 부탁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운천흠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이는가 싶더니, 강인한 기운이 그의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폭풍처럼 거친 기운이 아닌, 거대한 파도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기운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운천흠의 전신에서 서서히 수증기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으으-

수증기는 한동안 계속해서 발산되며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주향이 났다. 주독이 빠져나와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더 이상 수증기가 빠져나오지 않게 되자, 거세게 펄럭이던 운천흠의 머리카락과 옷자락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웅장하게 휘몰아치던 그의 기운도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다.

그 후부터 운천흠의 본격적인 운기조식이 시작되었다.

특별한 게 없다.

아무리 집중해서 파악해봐도 특별한 게 없다.

흔한 일이류 무인들의 평범한 운기조식 같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저 운기조식이 평범해 보이는 이유는, 운천흠이 발산하는 기운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조화라는 건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운기조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인위인 탓이다.

그렇기에 저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심법 경지가 매우 높아야 함은 물론이고, 삼라만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깨달음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최절정을 넘어 초절정에 이르러야만 저런 식의 운기조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운천흠이 화산의 제자들 외에 나와 남궁찬에게도 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우리 두 사람의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초절정에 오를 가능성을.

한순간, 나는 눈을 비비며 운천흠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옅은 붉은 기운이 운천흠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한 탓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매화를 연상케 하는, 포근한 느낌의 분홍색이었다. 그 분홍색 기운이 운천흠을 중심으로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주변 대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놀라서 남궁찬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윤단영과 선의림도 놀란 표정이다.

화산의 심법이 만들어내는 현상 같은데, 화산의 제자인 저 두 사람도 저런 광경은 처음 접하는 눈치다.

그 분홍색 기운이 점점 더 퍼져나가는 가운데, 얼핏 매화 향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에 즉시 후각에 집중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 매화 향이었다.

화산의 심법이 지고한 경지에 이르면 그윽한 매화 향이 인근으로 퍼진다고 듣긴 했는데, 그 현상을 실제로 접하게 될 줄이야.

우리 네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또다시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운천흠의 운기조식이 어느새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대지를 덮었던 분홍색 기운도 다시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윽했던 매화 향도 점점 옅어져 갔다.

가만히 그 광경을 관찰하던 나는 일순간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분홍색의 기운이 감쌌다가 사라진 대지의 풀들이 잎사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십일월 하순 무렵이라, 이곳에 자라나 있던 풀들도 모두 누렇게 마른 상태다. 한데 그 마른 풀들이 이 순간만큼은 생기를 머금은 것이다.

너무도 신비로워서 경외감마저 든다.

참고로 나는 사부님이 야외에서 운기하시는 모습도 여러 차례 지켜봤었는데, 저러한 현상을 본 적은 없었다. 사부님이 운천흠보다 더 높은 경지의 초절정고수셨는데도.

결국 저 현상은 운천흠이 백도의 정통 내공을 익힌 초절정고수이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윽고 운천흠의 운기조식이 완전히 마무리됨에 따라, 잠시 일어섰던 마른 풀잎들도 다시 힘을 잃으며 점점 아래로 처졌다.

운천흠이 눈을 뜨더니 일어섰다.

이전의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생동감이 넘치는 얼굴이다.

그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네 사람 모두 고맙군.”

남궁찬이 대꾸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건 저희인 것 같습니다. 안계를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감사 인사를 건넸다.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저 또한 감사드립니다.”

운천흠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남궁찬에게 물었다.

“남창지부를 오래 비웠지? 그래, 언제 복귀하려는가?”

“아, 복귀하자마자 또다시 업무에 파묻힐 테니 이왕이면 며칠 더 농땡이를 치다가 복귀할 계획입니다.”

이, 이보쇼! 대놓고 농땡이를 피우겠다니, 지금 그게 조직의 최고 상관에게 할 소리요? 적당히 둘러대는 노력이라도 하시란 말이오!

운천흠이 대꾸했다.

“허허. 부럽군그래. 모쪼록 편히 쉬다 가시게.”

당신도 지금 부러워할 때요? 점잖게라도 주의를 주든가 해야 할 것 아니오! 언제 정마대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런 중대한 시국에, 무림맹의 최고 결정권자라는 사람이 하부 조직을 이런 식으로 관리해도 되느냔 말이오!

“하핫, 알겠습니다.”

남궁찬이 대꾸하자 운천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네. 선원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미리 배에 가서 좀 쉬고 있어야겠어. 그러니 자네들도 들어가서 쉬게.”

그러자 윤단영이 대꾸했다.

“배가 출발하기 전까지 제가 말벗해드릴게요, 사숙.”

“허허, 괜찮다. 사질이야말로 애 키우느라 늘 피곤한 시기일 텐데, 가서 쉬어.”

“아니에요. 오랜만에 사숙을 뵀고, 언제 또다시 뵙게 될지 모르잖아요. 이런 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야죠.”

그러자 선의림도 말했다.

“그럼 저도 사숙조님과 사고를 따르겠습니다.”

윤단영과 선의림은 취기가 올라 있기는 해도 만취하지는 않은 상태다.

“허헛, 거참…….”

못 말린다는 듯 반응한 운천흠이 남궁찬과 내게 말했다.

“그럼 화산의 식구들끼리 대화 좀 나누다 갈 터이니 두 사람은 들어가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저들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남궁찬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곧장 운천흠에게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나도 인사말을 보탰다.

“오늘 뵙게 되어 너무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맹주님.”

운천흠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래. 창천쌍룡의 무운을 비네. 또 보세.”

말을 마친 운천흠이 나루터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윤단영과 선의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운천흠이 떠나갔다.

* * *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창문 밖을 확인해 보니 사시 정(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세안하러 가기 위해 거실로 나왔는데 송유하가 계단을 통해 이 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세안하고 온 모양새다.

“일어나셨어요?”

“응. 누이도 일찍 일어났네?”

“네. 새벽에 취기를 몰아내고 잤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운천흠을 배웅하고 본채의 이 층으로 올라왔을 때 송유하가 운기하는 기운을 느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유하가 말했다.

“아, 참. 잠시만 이곳에 계세요. 드릴 게 있어서.”

말을 마친 송유하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한 손에 작은 목갑 하나를 들고나왔다.

그녀가 목갑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연회 때 맹주님이 말씀하신 포상이래요. 새벽에 은림이가 제 방으로 와서 오라버니 몫까지 맡기고 갔어요.”

소청명단일 것이다.

“아.”

내가 목갑을 받아서 품속에 넣자 송유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오라버니에게 부탁이 있는데…….”

“어, 말해 봐.”

“내일 새벽에 그거 복용하려는데, 옆에서 지켜봐 주셨으면 해서요. 오라버니가 같이 계시면 마음이 더 안정돼서…….”

“그래. 알았어. 오늘은 운기조식 열심히 하고, 푹 쉬어 둬.”

“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준 후 송유하를 지나치자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지금 아침 겸 점심 먹으러 가려는데, 혹시 같이 드시겠어요? 드신다면 제가 먼저 가서 오라버니 몫까지 챙겨두려구요.”

“아, 그럴까? 일찍 먹고 쭉 쉬는 것도 좋겠지. 세안하고 옷 갈아입은 후에 갈게.”

“네.”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송유하가 자리 잡은 창가 쪽의 탁자 외에는 사람이 없다.

다들 오늘 새벽까지 술을 마셨으니 아직 자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식사 시간도 아니고.

단, 식당 이용자는 송유하와 나 외에도 두 명이 더 있다. 그 두 명은 송유하와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상태다.

“송 오라버니!”

“어서 와요.”

두 여시, 선우린과 남궁설이다.

“누이들, 일찍 일어났네?”

내가 다가가면서 묻자 남궁설이 대꾸했다.

“린아가 어제 같이 자자면서 제 방으로 쳐들어왔거든요. 근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서 깼더니 너무 일찍 일어나버렸지 뭐예요.”

“무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코 같은 거 안 골거든?”

선우린이 당황한 채로 내 눈치를 살피며 항변했다. 얼굴도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상태다.

남궁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풋! 안 골기는 무슨. 자다가 귀청 떨어지는 줄 알고 깼다고 했잖아.”

“어머어머어머? 얘가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그, 그러는 너야말로 자고 일어나서 방귀 뀌었잖아!”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설이 당황한 채로 내 눈치를 한 차례 살피더니 말했다.

“바바, 방귀라니……! 미쳤나 봐! 없는 소릴 지어내고 있어! 나, 나 방귀 같은 거 안 뀌거든?”

아주, 서로 폭로하면서 알아서들 망가지고 있다.

코골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풋! 그렇게 고약한 냄새를 풍겨놓고 안 뀌기는 무슨?”

“내, 냄새라니……! 나 방귀 냄새 같은 거 안 나거든? 아……!”

순간적으로 그렇게 대꾸하던 방귀쟁이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발끈해서 말을 내뱉긴 했는데, 이로써 방귀를 뀌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코골이가 씩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쪽으로는 코골이가 더 고단수다.

코골이가 말했다.

“이쯤 할까? 더 가면 우리 둘 다 송 오라버니 앞에서 여자로는 끝이야.”

“그, 그럴까?”

방귀쟁이가 대꾸하자 코골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송 오라버니, 우리가 방금 한 얘기, 재밌으라고 지어낸 얘긴 거 아시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지어내긴 개뿔. 그렇게 사실적일 수가 없던데.

하여튼 얘들하고 같이 있으면 심심할 일이 없다.

어쨌거나 이럴 땐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상책일 것이다. 둘 다 부끄러운 상황일 테니까.

“응? 뭔가 얘기했었어? 잠시 딴생각하고 있었거든. 미안.”

내가 대꾸하자 두 여시가 씩 웃었다.

‘역시’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선우린이 송유하에게 물었다.

“아, 참! 송 언니는 언제 복용할 거예요? 소청명단.”

“나? 내일 새벽에. 린이랑 설이는?”

“저도 오늘 잘 준비해서 내일 아침쯤에 복용하려구요.”

선우린이 대꾸하자 남궁설도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안 정했어요. 린아가 자기 걸 복용하고도 절정에 오르지 못하면 린아에게 줄 생각이에요. 린아가 절정에 오를 경우에는 그냥 제가 복용할 거고.”

“우와! 정말?”

송유하가 놀라며 되묻자 남궁설이 대꾸했다.

“네.”

답변이 단호하다.

아무리 절친한 친우 사이라고 해도 소청명단 정도 되는 영약을 양도할 생각을 하고 있다니.

쟤는 대체 얼마나 대인배인 걸까.

돌이켜 보면 남궁설은 몇 년 전에도 선우린에게 은설영지와 삼령천선초를 챙겨다 준 적이 있었다.

선우린을 그 정도로 소중하게 여긴다는 거겠지.

남궁설이 말했다.

“저는 그걸 복용한다고 해도 경지가 소폭 상승할 뿐이지만, 린아는 절정에 오르게 되잖아요. 제 경지가 소폭 상승하는 것보다 린아가 절정에 오르는 편이 우리의 전력 강화를 위해서도 훨씬 낫겠죠. 린아가 절정고수가 되면 제가 전투 중에 린아 신경을 덜 써도 되니 집중력도 더 좋아질 거구요.”

그러자 선우린이 내게 말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설아가 계속 고집을 피우네요. 그래서 제 것만 복용하고도 절정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어요.”

선우린은 현재 일류의 극후반으로, 언제 절정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에 있다.

그녀 몫의 소청명단만 복용해도 절정에 오를 것이라 예상되지만, 못 오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그러나 설령 못 오른다 해도, 남궁설 몫의 소청명단까지 복용한다면 절정에 오를 게 거의 확실하다.

선우린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운기할 때는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잡념으로 작용하지 않게끔 조심해야 해. 평온한 정신 유지. 알지?”

“네. 명심할게요.”

“오늘 하루는 운기조식 열심히 한 후에 푹 쉬고.”

“네.”

대꾸한 선우린이 남은 차를 마저 마시더니 말했다.

“실컷 수다 떨고 싶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일어서야겠어요. 가서 일단 좀 쉬어야, 오후 내내 운기조식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송유하도 자신의 찻잔을 정리하며 선우린에게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남은 하루, 잘 준비하자, 린아.”

“네, 송 언니.”

이에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각자의 거처로 흩어졌다.

* * *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송유하가 앉아 있었다.

[얼른 세안만 하고 올게.]

자고 있을 길초량을 생각해서 전음으로 말한 것이다.

[네. 제 방으로 오세요.]

[응.]

곧장 일 층으로 내려가서 세안한 후 송유하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송유하가 서탁을 앞쪽에 두고 정좌한 채 앉아 있다.

서탁 위에 놓여 있는 건 소청명단이 들어 있는 목갑과 물잔이다.

“새벽부터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신경 쓰지 마.”

“감사해요.”

“그럼 시작할까? 마음 편하게 갖는 거, 잊지 말고.”

“네.”

대꾸한 송유하가 물을 반 모금쯤 마시더니 곧바로 목갑을 열었다. 서서히 약 향이 퍼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녀가 약을 감싸고 있는 종이 포장을 벗겼다.

곧 송유하가 소청명단을 복용하더니, 잘 씹어 삼킨 후 이내 운기를 시작했다.

광서로 출발할 당시 송유하의 경지는 일류의 중반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일류의 중후반에 이르러 있다.

광서 수복전과 귀주 수복전을 거치며 내공 활용 능력이 높아지고 무공 전반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지가 상승한 것이다.

치열했던 실전에서 살아남은 보상이라고 할까.

아쉬운 점은, 현 상태에서 송유하가 소청명단을 복용해도 일류의 후반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일류의 중후반에 도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송유하는 연속해서 운기조식을 하며 소청명단의 기운을 흡수했다.

그렇게 한 시진 남짓 지났을 때쯤, 송유하가 운기조식을 모두 마무리하고는 내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끝난 것 같아요.”

“수고 많았어.”

“오라버니가 지켜보느라 더 수고 많으셨죠.”

송유하의 표정이 밝다.

“만족스러운 모양이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평정심도 잘 유지했구요.”

마지막 운기조식 때 파악해보니 역시나 아직은 일류의 중후반이었다. 단, 일류의 후반에 매우 가까워진 건 확실해 보였다.

참고로 일류의 후반만 되어도 전투 시에 훨씬 여유가 생긴다.

일류의 후반이라는 건, 절정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이니까.

이쯤에서 나는 품속에 넣어뒀던 물건을 꺼내어 송유하에게 내밀었다.

“자.”

송유하의 두 눈의 휘둥그레지고 있다.

내민 물건이 내 몫의 소청명단이기 때문이다.

“왜, 왜 이걸…….”

“어제 밥 먹으면서 설 매가 했던 얘기, 기억나지? 우리도 똑같다고 보면 돼. 내가 복용하면 효과가 미미하지만, 누이가 복용하면 훨씬 큰 성취 상승을 볼 수 있지. 그게 결국 우리 전력에도 더 큰 도움이 될 테고.”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건 절대 못 받아요.”

“스읍. 그냥 받아.”

“그럴 수 없어요. 그거 하나의 효과는 오라버니에게 미미할지 몰라도 그런 게 누적되면서 오라버니의 성취도 상승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전력 얘기를 하셨는데, 차라리 오라버니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게 우리의 전력에는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 이제는 저도 잘 알아요.”

저것이 실전을 같이 겪더니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기세를 보니 여간해서는 뜻을 굽힐 것 같지 않다. 송유하는 나한테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납득시키기도 귀찮고 해서 말했다.

“아마 우리는 머지않아 또다시 전장으로 향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누이가 그걸 복용하면 전장에 데려가고, 복용하지 않으면 떼어 놓고 갈 생각이야.”

송유하의 눈이 커지고 있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지? 내가 안 데려간다고 하면 누이는 못 가. 부모님도, 다른 어른들도, 교관님들도, 내가 안 데려가겠다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실 테니까. 누이가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겠지.”

내가 씩 웃으며 말을 마치자 송유하가 억울함과 당황스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그건 너무 불합리한 것 같아요.”

“어. 불합리하지. 근데 인생이란 게 원래 불합리투성이야.”

송유하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하지 못하고 입만 벙끗거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이래서 강호인들이 명셩, 명성, 하는 거고.”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해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후에 송유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한은 오늘 유시 정(오후 6시)까지. 그때까지 답이 없으면 누이는 전장으로 가지 않고 장원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생각할게. 누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 거야. 이곳을 지키는 일도 매우 중요한 임무거든.”

그렇게 말한 후 문으로 다가가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갈 때쯤, 뒤에서 송유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 복용할게요.”

이에 내가 뒤돌아서 빙그레 웃자 송유하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송유하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어차피 복용해야 하는 거면 그러는 게 낫겠죠.”

곧 송유하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내가 건넨 소청명단을 입에 넣었다.

그때부터 또다시 운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송유하에게 소청명단을 양도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송유하가 일류의 후반이 되면 우리의 전력에 매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송유하의 궁술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테니까.

둘째, 어차피 나는 ‘대지 요정의 눈물’을 통해 적잖은 공력 상승을 기대해볼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허죽신이 와서 청심단 다섯 개를 주고 가기까지 했다. 재고를 다시 비축하는 기간이라 다섯 개밖에 못 가져왔다고 미안해하면서.

셋째, 이 세상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단 한 명 꼽으라면, 그 사람이 바로 송유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청명단 하나쯤 송유하에게 줘도 전혀 아깝지 않다.

한 시진 남짓 지났을 무렵 운기가 모두 마무리되었고, 그렇게 송유하의 경지는 일류의 후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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