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면접까지 끝내고, 조성현은 그날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유미를 찾아가 볼까 싶었지만,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팀장님.”
“엉?”
“저 퇴근 하겠습니다.”
“어, 그래라.”
박중원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조성현은 그런 그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내일부터 장현아씨 출근하는 건가요?”
“일단 그렇게 말해놨어. 오겠지 뭐.”
조성현의 물음에 그제서야 모니터에서 시선을 움직여 조성현을 바라보는 박중원.
“그럼 장현아씨 출근하면 오전 중에는 업무 알려주고….”
“오후에는 유미한테 다녀와라. 유미 내일 4시에 티저 사진 촬영 있으니까 그거 스케줄 소화하면서 장현아씨 소개도 좀 해주고.”
“넵.”
박중원이랑 생각이 맞았다.
다른 업무들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결국 이 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티스트랑 같이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 아닌가.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엉.”
휙휙 손을 흔드는 박중원.
다른 팀원들의 부러운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조성현은 퇴근했다.
그는 곧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슬쩍 유리 너머로 반 안쪽을 살피니 채윤이 인어공주 인형을 안아 들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딱히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거기가 지정석인 것처럼 항상 피아노가 있는 쪽에 머무른다.
조성현이 가만히 채윤을 바라보고 있는데, 민은정 선생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채윤이 아버님.”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혹시 잠깐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아, 네네. 가능하죠.”
조성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은정 선생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당연히 채윤이와 관련된 이야기일 테니, 혹시 오늘 인형을 가지고 가서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는 일일까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원장실로 들어갔고.
민은정은 작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서 조성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건 아니고, 채윤이 때문에요.”
“네네.”
사실 유치원 교사와 학부모가 나눌 이야기가 뭐가 더 있겠는가.
당연히 아이 이야기지.
“채윤이가 운동회 날 영준이한테 청포도를 던지면서 화를 냈었잖아요.”
“네, 그랬었죠. 그날 영준이가 사과도 하고, 채윤이가 젤리도 줬었는데…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조성현이 빠르게 말했다.
저도 모르게 조금 흥분해서, 말이 빨리 나왔다.
민은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아, 무슨 일이 있긴 했었네요. 오늘 채윤이가 처음으로 영준이 인사를 받아줬거든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린 것뿐이지만요.”
“아….”
고개를 끄덕거려서 인사를 받은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라고 말할 정도면, 확실히 채윤이 유치원에서 홀로 지냈나 보다.
“채윤이가 누군가한테 그렇게 화를 내거나 하는 모습도 저는 운동회날 처음 봤거든요. 요즘 감정표현이 조금 풍부해진 것 같아요. 물론 화를 내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최근 웃음도 많아져서요.”
“아…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정표현이 풍부해졌다는 건 좋은 신호일 테니까.
근데, 민은정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데, 아버님께서 물론 힘드시겠지만, 계속 채윤이랑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면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아요. 가능하면 채윤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요.”
조성현은 민은정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채윤이랑 앞으로 계속 시간을 같이 보낼 것이다.
다만 문제는, ‘뭘 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낼까.’ 였다.
그렇게 조성현은 민은정과 상담을 마치고 나왔다.
* * *
“아빠 안녕!”
채윤이 조성현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조성현은 채윤이와 인사를 하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채윤아.”
“네에?”
“오늘은 할머니 집에 가서 저녁 먹을까?”
채윤이에게 물으니, 아이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래 채윤아?”
“채윤이는 아빠랑 같이 있을래요.”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채윤.
아이의 말에 조성현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랑 같이 가자.”
“채윤이는 좋아요. 할머니도 좋고 아빠도 좋아!”
그제서야 채윤이 밝게 웃으며 답한다.
조성현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어, 엄마.”
-“응 아들. 왜 전화했어?”
목소리가 밝다.
조성현은 방실방실 웃고 있는 채윤이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채윤이랑 같이 엄마 집 가도 되나 해서요.”
-“언제 허락받고 왔다고. 저녁은?”
“같이 먹어요.”
-“알았어. 언제 올 건데?”
“지금 갈게요.”
조성현은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곧바로 이수현의 집으로 향했다.
며칠 만에 본가로 가니, 이수현이 반겼다.
조성현은 오는 길에 사 온 음료수를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그의 아버지와 인사했다.
“못 보던 인형이다?”
이수현이 채윤이 들고 있는 인어공주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이번에 운동회 가서 상품으로 받아왔어요.”
“채윤이가 잘했나 보네.”
“아빠가 노래 불러서 했어요!”
채윤이가 자랑하듯 말했다.
그 말에 이수현이 고개를 돌려서 조성현을 바라본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조성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노래 잘 부르는 사람한테 상품 주겠다고 해서요. 제가 노래 부르고 받아왔어요.”
“용케 받았네.”
“엄마 아들 노래 생각보다 잘 부르거든요?”
조성현의 말에 이수현이 알았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녀는 금방 저녁 준비를 했고, 다 함께 식사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밥을 먹은 채윤이는 조성현의 집보다 더 넓은 거실에서 마음껏 뒹굴거리다가 지쳤는지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이는 이내 꾸벅꾸벅 졸다가 잠에 빠졌다.
조성현이 아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래서, 오늘 진짜 무슨 일로 온 건데?”
그가 다시 식탁에 앉자마자 이수현이 물었다.
조성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냥, 채윤이 때문에요.”
“채윤이가 왜? 어디 다쳤어?”
이수현이 고개를 돌려 채윤이를 살핀다.
멀쩡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녀는 조성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조성현은 픽 웃었다.
“다치긴 왜 다쳐. 오늘 유치원 선생님이랑 상담했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채윤이가 점점 감정표현도 많아지고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고요.”
“잘됐네. 다행이다. 지 애미 죽고 많이 힘들어했었는데.”
“네. 선생님은 나보고 채윤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시간 같이 자주 보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왔어요.”
“그럼 좋지. 당연히. 애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밝은 얼굴로, 이수현이 말했다.
그녀는 최근 조성현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맨날 바쁘다 뭐다 하면서 자기 딸을 멀리하던 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식간에 우리 딸 우리 딸 하면서 채윤이 없으면 죽고 못 살게 되지 않았던가.
채윤이가 밝아진 것도 이수현은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조성현이 채윤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뭐 하면서 시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막 동화 읽어주기 이런 거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어디 놀러 갔다 오고 그런 거?”
“나쁘진 않은데… 채윤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시간 보내라고 했다면서? 채윤이가 동화 읽어주거나 그런 거 좋아하나?”
그 말에, 조성현은 멈칫거렸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채윤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민은정 선생이 분명히 말했는데.
조성현은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이 딸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동화를 읽어주는 것도, 어디론가 놀러 가는 것도 채윤이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채윤이가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조성현이 해주고 싶은 걸 해주는 건 그냥 자기만족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 머리를 한 대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채윤이는 그냥 네가 평범하게 아빠 노릇 해주길 바라고 있을걸? 그냥 뭘 하던 아빠로서 같이 시간 보내면 좋아할 거야. 물론 채윤이가 좋아하는 걸 같이 하면 더 많이 좋아하겠지.”
이수현이 그렇게 말을 했고, 조성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와중에, 이수현의 옆에 앉아 있던 조성현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그가 입을 열자, 조성현과 이수현이 동시에 시선을 움직여 그를 보았다.
“애가 피아노 잘 친다며? 같이 피아노나 배워보던가. 안 그래도 밥 먹을 때 정신없이 손가락 뚱땅뚱땅 움직이더만. 피아노 치는 거 마냥.”
아버지의 말에 조성현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할 수 있고, 채윤이도 좋아하는 거.
음악이다.
* * *
집에 돌아왔다.
채윤이는 저녁 먹고 조금 자서 그런지,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졸린 기색이 없다.
그런 채윤이를 가만히 보다가, 조성현은 입을 열었다.
“채윤아.”
“네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팔을 흔들고 있던 채윤이, 느릿하게 답한다.
“채윤이는 음악이 좋아?”
“음악?”
“응. 피아노 치는 거나, 노래하는 거나… 그런 거.”
“응! 채윤이는 음악 좋아요!”
채윤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하긴, 아쿠아리움에 가서 인어공주가 노래를 잘한다고 인어공주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하는 아이인데.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같이 피아노라도 배워야 하는 걸까.
조성현이 피아노를 엄청 열심히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은 다 알고 있었다.
작곡하면서 키보드를 사용하는 일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처럼 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채윤이도 뭘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알만한 건 다 아는 것 같다는 것.
아니, 악보 없이 유미의 곡을 몇 번 들은 것으로 곡을 연주하고, 심지어 핸드폰 벨 소리를 연주하는 아이다.
조성현이 뭔가를 가르칠만한 재능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채윤이는 음악 쪽으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고, 이미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채윤이는 천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근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조성현은 순식간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음악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이미 해결되었으니까.
지금 하는 고민은, 조성현이 과연 채윤이의 재능을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채윤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어려웠다.
음악천재인 딸은 처음이라.
고개를 들어 채윤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어공주와 놀고 있었다.
밤은 깊어져 갔다.
내 딸은 음악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