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다음 날 아침.
조성현이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것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채윤의 얼굴이었다.
“헤헤.”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모습.
조성현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줬다.
“채윤아,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요정님이 소원을 들어줬어요!”
“그래?”
조성현은 기억을 더듬어 아이가 인어공주 꿈을 꾸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꿈에 인어공주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줬어?”
“응! 채윤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막 인어공주가 나와서 노래 불렀어!”
채윤이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는 정말로 인어공주 꿈을 꿨다는 것이 너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조성현은 차분히 아이의 말을 들어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채윤이를 안아 들고, 준비를 전부 마쳤을 때도 아이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성현은 피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채윤아.”
“네에?”
“나중에는 요정님한테 아빠 꿈도 꾸게 해달라고 소원 빌어볼까?”
“헤에….”
채윤이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웃는다.
그런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조성현은 카페로 갔다.
지난주부터 하던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오늘 가지고 온 책은, ‘피아노포르테 기법 연구’.
시작부터 어려운 용어가 잔뜩 있는 책이었지만, 조성현은 무리 없이 공부해나갈 수 있었다.
조성현은 한참 공부하다가 메모를 하던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기지개를 켠 뒤,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곤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쉽게 지친다.
이 나이 들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더 걱정인 건, 이렇게 공부하고 나서 채윤이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는 거지.’
완전히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채윤이는 조성현을 보고, 여러 가지를 배우니까.
아이가 부모가 하는 걸 배운다는 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조성현이 열심히 배워두면 채윤이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긴 할 거다.
하지만, 채윤이에게 그런 도움이 과연 필요할까?
그게 문제였다.
지금 당장 채윤이에게 필요한 게 뭘까.
조성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공부해서 채윤이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게 틀에 박힌 교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이라는 건 있는 법이니까.
만류귀종이라 했다.
결국 어떻게든 끝에 가면 같아지니,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연주회 다녀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연주회를 다녀와서 채윤이가 ‘같이 낙엽놀이 할래?’를 연주할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가 왜 바꿔야 하냐고 이야기했을 때.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깨달았고, 세상이 생각하는 ‘기본’과 채윤에게 필요한 ‘기본’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조성현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채윤이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음악적인 기본보다, 그냥 단순한 삶의 경험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일 때만 가능한 것들.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과 경험이 있으니까.
물론 호수공원에 다녀오는 것이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윤이가 조성현과 함께 호수공원에 다녀와서 느낀 감정들과 즐거움은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도 분명 포함이 되어 있었다.
채윤이의 시각으로 바라본 가을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자신보다 커다란 낙엽이 있었고, 다른 아이와 함께 타야지 아빠랑 같이 시소를 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할 것이다.
노래하는 분수대를 바라보며, 정말로 분수의 요정님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원을 빌었던 걸 기억하고.
또, 분수의 요정님이 지난 밤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건 분명히 그 나이대에만 경험할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아빠로서 할 게 많네.”
조성현은, 많은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자신이 아빠로서 할 일이 많다는 것.
채윤이는 음악을 일이나 공부로 접근하지 않고 그냥 일종의 놀이로 접근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빠로서 함께 놀아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음악만 할 수는 없으니 다른 경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것도 아빠로서 할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함께 할 생각에 조성현은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됐다.
조성현은 결국 언젠간 다시 복직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럼 그때 채윤이는 어떻게 할까.
‘채윤이가 충분히 클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확률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조성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마음에 안 들어, 쯧 하고 혀를 찬 조성현은 다시 책에 집중했다.
채윤이에게 알려줄 수 있든 없든, 아이와 같이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아이와 비슷한 수준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아이와 말도 통하고, 그러겠지.
조성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펜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그가 펜을 다시 들고 얼마 되지 않아.
우우웅. 우웅.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조성현은 힐끗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별거 아니면 그냥 무시하려 했는데, 그냥 무시하기에는 애매한 상대였다.
장현아.
Pan 엔터테인먼트 신입 매니저, 그리고… 동시에 Pan 엔터를 이끌고 있는 수장의 딸.
조성현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
고작 일주일 정도였지만, 그래도 함께 일했던 사이인데.
오는 전화를 거절할 정도는 아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전화 너머로 장현아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이제 입사한 지 3주 정도일 장현아다.
그래도 막 입사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목소리에 여유가 있었다.
“네 현아 씨. 오랜만이에요.”
조성현이 인사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도 애매했지만.
-잘 지내고 계시죠?
“저야 잘 지내죠. 현아 씨는요?”
-저는 진짜 미치겠어요. 일은 점점 바빠지고, 선배님이 안 계시니까 자꾸 실수하는데 이거 수습하느라 일은 더 많아지고. 완전 악순환의 연속이라니까요.
장현아가 푸념하듯 말했다.
조성현은 피식 웃었다.
자신도 신입 때 정말 많은 실수를 했었다.
그걸 어떻게든 수습해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중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너무 혼자 수습하려고 하지는 마요. 실수해서 일 터졌으면, 그냥 팀장님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예요.”
박중원 팀장이 상당히 일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웬만큼 큰일이 아니면 박중원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리고 박중원의 바로 옆에 붙어서 자신이 실수한 것들이 해결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또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말이다.
-안 그래도 안 되겠으면 바로 팀장님한테 달려가서 SOS 청해요. 괜히 혼자 수습하려다가는 일이 커지더라고요.
“잘하고 계시네요.”
-선배님이 얼마나 잘 가르쳐주셨는지 진짜 하루하루 깨닫고 있다니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장현아가 감사 인사를 했다.
조성현은 그녀의 감사 인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 건 맞긴 한데, 그거 말고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아씨. 그래서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 그냥 고맙다고 전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헤헤… 다름이 아니고, 선배님 덕분에 이번에 유미씨 미튜브 채널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다행이네요.”
유미의 미튜브 채널을 하기로 했으면,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는 미튜브를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하니까.
박중원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근데 아무래도 채널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컨텐츠가 중요한 거잖아요?
장현아는 이미 시장의 흐름을 잘 읽고 있었다.
박중원이 경험 많지만, 미튜브 같은 트렌드에 조금은 뒤처진다고 한다면 장현아는 경험은 없지만 트렌드를 잘 따라가고 굉장히 감각적이다.
둘은 잘 맞는 콤비였다.
조성현은 장현아가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말하자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네, 그래서요?”
-그래서 우리 채윤이가 함께 해주면 정말 좋은 모습이 될 것 같은데… 채윤이가 유미씨 채널 첫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인공은 유미씨여야죠.”
-아, 네. 그러면 첫 게스트…?
조성현의 말에, 장현아가 급하게 표현을 바꿨다.
피식 웃은 조성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장현아가 전화해서 이런 제안을 했다면 곧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아직 채윤이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으니까.
유미가 미튜브 채널을 만들었는데, 첫 번째 게스트가 채윤이라면 아이에게 쏠릴 관심은 상당할 것이었다.
조성현은 그 관심이 조심스러웠고, 그렇기에 바로 거절했을 텐데….
‘조금, 고민되네.’
어쩌면 이런 것들도 전부 채윤이에게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미 한 번 경험하지 않았나.
부정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던 채윤이의 음악이, 한 번의 소풍으로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뀌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여러 걱정스러운 요소들이 있다고 해도 채윤이가 그 정도로 즐거운 경험을 다시 할 수 있고, 아이의 음악에도 다시 한번 변화가 생긴다면….
그리 나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머뭇거리며 답하지 못하자, 장현아가 조심스럽게 설명해나갔다.
-유미씨랑 채윤이가 친하니까 촬영하면서 어렵거나 그러진 않을 거고요, 혹시 힘들다고 하면 바로 쉴 수 있도록….
“현아씨.”
-네, 선배님.
“현아씨가 생각하는 유미씨 첫 번째 게스트로 채윤이가 꼭 나와야 하는 이유는 뭐예요?”
이건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조성현의 질문에 장현아는 아무런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웃긴데, 유미씨랑 채윤이랑 캐미가 확실히 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일상적인 부분도, 음악적인 부분도요.
조성현은 그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채윤이와 유미는 은근 잘 어울린다.
-다른 유명 게스트를 섭외하면 화제성은 있겠지만… 유미씨가 묻힐 겁니다. 하지만 채윤이와 함께 나왔을 경우에는 둘 모두 확실하게 자신들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현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조성현은 흐음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이제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입이었고, 조성현이 그녀를 직접적으로 안지도 딱 그 정도밖에 안 됐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어느 정도 신뢰하는 편이었다.
조성현이 생각했던 것과 많은 부분 일치를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성현은 대답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현아씨, 이 부분은 제가 고민해보고 이번 주 안에 답을 드려도 될까요?”
-넵. 선배님.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장현아가 그렇게 말을 했고, 조성현은 자리를 정리하면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채윤이의 하원 시간이었다.
내 딸은 음악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