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안녕하세요. 성현씨.”
“어? 안녕하세요.”
버스나 지하철로 가기 복잡할 것 같아서 일부러 택시를 타고 왔는데, 도착해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유재균과 정미원, 그리고 영준이가 다가왔다.
영준이는 호다닥 달려와 채윤이와 인사를 나눈 후, 조성현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영준이 안녕? 잘 지냈지?”
조성현의 인사에, 영준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답한다.
아이의 신경은 채윤이에게 가 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조성현은, 아이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 매표소로 향했다.
입장권을 받은 후.
“여기서 손 먼저 씻을까?”
동물들을 직접 만질 수도 있도록 해놨고, 그렇기에 꼭 손을 먼저 씻고 들어가 달라는 안내문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발판도 있어서, 어린 아이들이 손을 씻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채윤이 손을 잘 씻는 것을 확인한 조성현은 그 또한 손을 씻고, 동물원 안쪽으로 향했다.
2층 건물 하나를 통째로 다 쓰고 있는 동물원은,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우리가 있었다.
토끼와 아기 고양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뛰어다니는 게 보인다.
“우와! 토끼다!”
영준이가 외치고, 채윤이도 신이난 건지 밝은 얼굴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토끼!”
아이는 그렇게 외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토끼 우리는 아이들의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에,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한쪽에는 들어갈 수도 있게 문이 있었고.
토끼와 고양이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조성현도 이런 곳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고양이랑 토끼가 아이들을 물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고.
‘애들이 토끼랑 고양이를 다치게 할 확률이 더 높겠지만.’
조성현이 속으로 생각하며, 채윤이와 영준이가 달려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토끼와 고양이가 있는 우리에 들어가고 싶어서 문 앞에서 조성현과 유재균을 기다렸다.
얼른 열어달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채윤이의 모습.
조성현은 푸흐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은, 보통 좋아하는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 나오는데….
‘진짜 얼른 들어가고 싶었나 보네.’
조성현이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채윤이 조성현의 손을 잡고 우리 안으로 들어간다.
토끼들이 십 수 마리 있고, 아기고양이들도 서너 마리가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채윤이는 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꺄르륵 웃었다.
“한 번 만져 볼까?”
“흐이이….”
채윤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미간을 좁혔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토끼에게 손을 뻗었다.
토끼가 폴짝하고 뛰어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힉.”
채윤이는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이가 넘어질 것 같아서, 조성현은 채윤이의 등을 잡으며 허리를 폈다.
그가 잡아서, 채윤이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준이는 이야기가 달랐다.
영준이는 토끼에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놀라는 채윤이를 보며 웃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고 민망했는지 벌떡 몸을 일으킨 영준이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아야 안 했어?”
채윤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준이에게 물었고.
영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어, 나는 이런 걸로 안 아파 해.”
“또 넘어져서 아프면 채윤이가 호 해줄게!”
아이가 말했다.
조성현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넘어져서 아프면 호 해준다고?
영준이한테?
“어림도 없지. 어딜….”
조성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영준이를 바라보는데, 영준이는 약간의 후회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프진 않지만, 차라리 아프다고 할 걸 하는 얼굴이랄까.
조성현은 뻔히 속이 보이는 그 표정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엽고, 채윤이를 좋아해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인데…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아직 꼬맹이일 뿐이지만, 남자애라서 그런가 약간이지만 경계가 되는 것이다.
채윤이는 다행히 금방 토끼들에게 익숙해졌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토끼에게 손을 뻗었고, 토끼가 다시 폴짝 뛰더라도 놀라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가 등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부드럽다….”
채윤이 홀린 듯한 얼굴을 하며 토끼를 계속 쓰다듬었다.
토끼는 채윤이가 쓰다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도 않고, 도리어 몸을 돌려 채윤이가 있는 쪽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채윤이는 토끼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만져주면 좋아?”
조성현은 처음에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고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아이는 토끼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채윤이는 아빠가 이렇게 이렇게 해주면 완전 좋아.”
“…….”
“아빠가 안아주는 것도 좋은데. 채윤이가 안아줄까?”
채윤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토끼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토끼를 양손 가득 끌어안고, 토끼가 자신의 품에 기댈 수 있게 만든 후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아이는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결국 조성현이 채윤의 팔을 받쳐 준 후에야 아이는 일어날 수 있었다.
“성현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성현은 고개를 돌렸다.
정미원이 스마트폰을 들고 옆으로 살짝만 비켜달라는 제스쳐를 보이고 있었다.
채윤이가 토끼를 들고 있는 사진을 찍으려는 모양.
조성현은 빠르게 한 걸음 물러나 정미원이 사진을 수월하게 찍을 수 있게 해주었다.
“와, 너무 이쁘게 잘 나왔다. 이따가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조성현이 웃으며 정미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신나게 놀고 있는 영준이와 채윤이를 돌아보았다.
영준이는 슬금슬금 다가와 채윤이가 안고 있는 토끼를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 토끼를 안고 있던 채윤이가 영준이에게 토끼를 넘긴다.
토끼는 잠시 발버둥쳤지만, 다행히 영준이의 품에 잘 안겼다.
영준이가 신기해하며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정미원은 그 광경도 찍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조성현은 자리를 비켜주었고, 결국 정미원이 토끼 우리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기 시작했다.
조성현과 유재균은 슬쩍 빠져나와 우리 밖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채윤이 예선 통과한 거 축하드려요.”
“덕분이에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예선이 정말 형식적인거였어서 그런 거죠. 본선때 선 보일 곡은 정하셨어요?”
“후보가 있던데, 무슨 곡이 좋을지는 아직 못 정했어요. 채윤이한테도 들려줬었는데, 딱히 하고 싶은 곡이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고요.”
“음… 그건 일단 거기서 제시해 둔 곡들을 일단 한 번 다 쳐보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요. 듣기만 해서는 모르는 것들이 있으니까.”
유재균은 꺄르륵 웃는 채윤이를 바라보면서 조언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피아노 전문가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짧게나마 채윤이 피아노를 들어봤을 때는… 사실 채윤이가 막 굉장히 형식적으로 피아노를 치거나 그러는 편은 아닌 것 같거든요.”
“형식적으로요?”
“그러니까… 틀에 맞춰서요.”
조성현은 유재균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틀에 맞춰서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피아노에 틀이 있다는 건가?
물론 피아노를 치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들은 있다.
근데 지금 유재균이 말하는 건 그런 규칙들이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지금까지 모두가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런 형식이 만들어진 건데, 채윤이는 그런 게 없더라고요.”
“아… 안 좋은 건가요?”
“그냥 피아노를 치는 거면 절대 나쁜 건 아니죠. 어쩌면 완전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수도 있는 기회니까. 근데, 이건 그냥 피아노를 치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음….”
“기본적으로 콩쿨이기 때문에 더 지켜줘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하면 콩쿨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어요.”
유재균이 어떤 걸 말하고자 하는지는 안다.
조성현이 클래식 음악을 했던 사람이 아니기에 음악적으로는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정해진 규칙이 있는데 채윤이는 거기에 맞춰진 연주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연주는, 콩쿨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든 거고.
“이해했습니다. 약간 교과서적인 연주를 원한다… 이런 거죠?”
솔직히, 이해는 하지 못하겠다.
조성현으로서는 채윤이의 자유로운 피아노가 가장 듣기 좋았으니까.
물론 그냥 단순히 자신의 딸의 연주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교과서적인 연주가 좋으면 그냥 모차르트의 음반을 듣지 왜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의 생각이 짧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조성현은 형식적인 연주보다는 자유로운 연주가 더 좋았다.
하지만 콩쿨은 결국 시험과도 같은 거다.
유재균의 말처럼 틀이 확실히 있는 연주가 더 좋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다.
“아, 네. 그렇죠. 교과서적인 느낌.”
“참고할게요. 감사합니다.”
조성현이 웃으며 답했다.
딱, 참고만 할 생각이다.
그는 채윤이가 교과서적인 연주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채윤이가 원하는 대로 연주를 했으면 좋겠다.
아이가 교과서적인 연주를 하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는 거고, 그런 게 아니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
조성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콩쿨에서 좋은 결과를 받기 힘들 거라고?
그럼 그냥 수긍하면 되는 거다.
채윤이의 연주가 콩쿨과 맞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지금도 채윤이는 콩쿨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조성현과 함께 놀러 가서 피아노를 치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채윤이는 물론 그걸 즐기고 있었지만… 그걸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인생에 지대한 문제가 생기는 건 전혀 아니었다.
“돼지다!”
한참 동안 토끼 우리에서 놀던 채윤이는, 정미원과 함께 우리에서 나와 다른 동물들을 둘러보다가 한쪽에 있는 돼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돼지는, 다행히 조성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정말 딱 채윤이만한 크기의 돼지는 생각보다 귀여웠고, 채윤이는 종종 걸음으로 돼지에게 다가갔다.
돼지는 기니피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채윤이는 우리로 들어가 돼지를 조심스럽게 찔렀다.
“꺄하하.”
아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조성현은 아이가 즐겁게 웃는 것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다.
교과서적인 피아노, 채윤이의 자유로운 피아노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조성현은 그저, 채윤이가 피아노를 치며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뿐이니까.
그는.
아이의 저 즐거운 웃음을 계속해서 보고 싶을 뿐이었다.
내 딸은 음악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