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음악천재-504화 (504/603)

504화

여름이 슬금슬금 지나가고.

나무들이 색을 바꾸는 계절이 다가왔다.

한국의 날씨가 참 묘해, 여전히 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정신없이 일하던 조성현은 결국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었다.

서예나의 앨범을 발매했고.

뮤즈의 앨범도 발매 준비가 끝났다.

적어도, 조성현이 해야 할 일은 없는 상태.

중요한 날이기에.

오늘은 채윤이는 학교를 빠졌다.

“아빠, 얼마나 남았어?”

“이제 거의 다 왔어.”

조성현이 웃으며 아이에게 말한다.

채윤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조성현은 그런 채윤이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어주었다가 운전에 집중했다.

작년의 오늘.

채윤이는 같은 길을 아이의 할머니와 함께 왔었다.

그동안 조성현과 채윤이의 삶은 꽤나 많이 바뀌었다.

지금 조성현은 불행하지 않았고, 채윤이 또한 행복했다.

그래.

오늘은 조성현이 돌아온 지 딱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즉.

아이 엄마의 기일이다.

채윤이는 묘하게 차분한 표정을 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끗 아이의 얼굴을 보았던 조성현도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저 멀리, 납골당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 왔다.”

“응. 다 왔어.”

채윤이의 말에 조성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주차하고, 조성현은 채윤이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제법 무거워졌다.

요즘은 아이에게 무겁다 하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도 했기에.

조성현은 채윤이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아이 엄마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근처에 다가가자, 채윤이가 버둥거리며 조성현의 품에서 벗어나 빠르게 걸음을 옮겨 아이 엄마에게 다가갔다.

조성현이 그런 채윤이의 뒤를 따랐다.

채윤이는 한참 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건, 조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가만히 서서 아이 엄마를 바라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채윤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아빠.”

“응 채윤아.”

“엄마한테 노래 들려주고 싶어.”

“그럴까?”

채윤이의 말에 조성현이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는 이번에 아이와 함께 만든 앨범을 재생시켜 앞에 놓았다.

“나 완전 열심히 만들었어 엄마.”

채윤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에 보이는 해맑은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어쩌면 조금, 억지로 보여주는 해맑음은 아닐까.

조성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채윤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앨범이 흘러나온다.

아이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아이 엄마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성현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채윤이는 이번 앨범으로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정말로 잘 지낸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아빠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웃으면 좋겠다고.

음악인은 결국 음악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임을 채윤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껏 만들었던 모든 작업물을 하나씩 들려주며, 곡을 통해 말을 토해낸다.

조성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신 또한 앨범 작업을 하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채윤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당신의 딸은, 우리의 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라고.

조성현은 그런 이야기를 녹였다.

마지막으로 채윤이의 피아노로만 이루어진 곡이 끝나자마자, 채윤이는 고개를 들어 조성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자 아빠.”

“그래….”

아이의 말에 조성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손끝으로 대리석을 훑었다.

“또 올게.”

다시 자신의 아내를 찾았을 때는, 또 한 번 성장한 채윤이와 함께 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으로.

조성현이 그런 생각으로 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차에 올랐을 때.

우웅.

조성현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장현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장현아: 선배님,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조성현은,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 * *

“실례하겠습니다.”

장현아가 조심스럽게, 조성현의 집에 들어선다.

채윤이가 현관까지 나와서 장현아를 반겼다.

조성현은 김치찌개를 올려둔 불을 끄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장현아가 채윤이와 인사를 하며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양손에 가득 뭔가를 들고 있는 장현아의 표정은 약간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네 선배님. 아, 이거… 사 왔는데. 저녁 메뉴하고는 안 어울리겠네요.”

장현아가 작은 종이백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와인을 사 온 모양.

조성현은 픽 웃었다.

“그냥 먹으면 되죠 뭘.”

“어, 케이크도 작은 걸로 사 왔는데. 케이크 먹으면서 같이 먹어도 되고요.”

“그것도 좋죠.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이것저것 사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날이 날인데 제가 괜히 실례한 건 아닌지….”

“좋은 날 왔는데 왜 실례에요.”

조성현이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장현아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조성현이 그녀가 들고 있는 케이크와 와인을 받아 들었다.

“일단 앉으세요.”

“넵.”

장현아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식사는 금방 시작되었다.

딱 때맞춰 온 장현아였기에 알맞은 시간에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만 오갔다.

“잘 다녀오셨어요?”

“네. 갔다가, 이번 앨범 들려주고 왔어요.”

“…멋지네요.”

장현아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한다.

서예나의 앨범 성적에 대한 이야기와, 뮤즈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예나씨는 오늘도 1위네요.”

“네. 괜히 서예나가 서예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내셨죠.”

“그러게요.”

“선배님도, 프로듀서로서 다시 한번 증명하셨고요.”

“예나씨가 잘한 거죠. 뮤즈 쪽은 좀 어때요?”

“아, 뮤비 촬영 중이라고 오늘 연락받았었어요. 이쪽도 곧 발매할 것 같아요.”

장현아의 말에 조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다 잘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밀려 있는 일도 딱히 없고.

이제 좀 숨을 돌리면 될 것 같다.

조성현 개인적으로는, 당분간은 앨범 작업이나 작곡도 조금 접어두고 바이올린 연습을 조금 하고 싶었다.

채윤이가 이번 앨범에 수록한 마지막 곡.

그건 아이가 작곡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굉장히 잘 해냈지만, 그것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직접 연주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채윤이는 해냈다.

결국 자신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있기에 그런 작곡도 가능했던 것.

조성현도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에 조금 더 욕심이 생긴 것이다.

‘사실, 당분간이라고 해봐야… 길어야 한 달 정도려나.’

그 뒤로는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겠지.

조성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식사를 끝내고, 케이크를 식탁 중앙에 두고는 채윤이의 앞에는 요구르트가, 조성현과 장현아의 앞에는 각각 잔 하나씩이 놓였다.

케이크를 잘라 한 조각씩 두고, 건배했다.

채윤이가 기분 좋은 얼굴로 요구르트병을 와인 잔에 툭 하고 친다.

채윤이가 요구르트를 두 병째 비우고.

조성현과 장현아의 잔도 새로 채워졌을 때.

그제서야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배님 작업도 이제 다 끝나셨고… 저도 준비가 됐거든요.”

“2차 관문에 도전할 준비요?”

“아, 네.”

조성현의 말에 장현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면서도 묘하게 입꼬리가 굳어 있는 게, 약간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고, 긴장을 하는 걸까.

“편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진짜 무슨 최종 보스도 아니고.”

조성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자, 장현아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선배님의 선택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현아씨의 결심인데, 제 선택이 제일 중요하다고요?”

“어쩌면, 채윤이의 선택이 제일 중요할 수도 있고요.”

장현아가 힐끗 채윤이를 바라보며 답한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케이크에 달려 있던 초콜릿 장식을 먹으려던 채윤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선배님은 일단, 제 배경을 아시니까… 이해하시긴 쉬울 텐데. pan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열심히 일했고, 회사의 성장에 어느 정도는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많은 기여를 했죠.”

사실상, 최근 회사의 성장이나 나아가는 방향성에 있어서 장현아가 손을 뻗고 있는 부분이 절반은 되지 않을까.

미튜브에 관한 부분도 그렇고, 그 외에 전체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팀장급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민이 없었거든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게 좋아서 그냥 딱 일만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네.”

“아빠가, 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는데 한 번 나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아. 해외….”

Pan 엔터테인먼트는, 국내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기획사였다.

해외로 눈을 돌린 지는 꽤 오래됐고, 딱히 실적이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통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상황.

장판석 대표는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노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딱 이 무렵이긴 했지.’

과거에도 비슷한 시점에 장판석 대표는 같은 결정을 내렸었다.

다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결실을 맺었다.

“고민을 진짜 많이 했어요. 갈까, 말까.”

“결론은… 어떻게 나왔어요?”

“가려고요. 결국에는 나가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

“사실,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거든요. 몇 년 정도는 더 한국 시장에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요. 근데.”

장현아가 거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이어나갔다.

“아, 내 이런 생각이 어쩌면 한국 시장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아티스트의 길을 막는 걸 수도 있겠구나. 한국이라는 무대가 작은 아티스트에게는 좋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장현아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조성현은 미소를 지었다.

장판석 대표는 몇 년 동안의 시간을 인내하고 나서야 성공한 해외 시장이다.

근데, 장현아가 있으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잘 결정했네요. 응원할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선배님.”

“네 현아씨.”

조성현이 장현아를 바라보고.

장현아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더니 조성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이 가시는 건, 어떠세요?”

“……?”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장현아가 말한다.

조성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1년 전 오늘.

그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조성현과 채윤이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 한 번.

하나의 단락이 끝나고,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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