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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음악천재-531화 (531/603)

531화

베를린 국제 콩쿨은 당연하지만, 전 세계의 연주자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입상이라도 한다면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으므로, 도전할 수 있는 이는 자연스럽게 도전장을 내밀게 되는 곳.

제임스 스튜어트.

16살.

영국 출신의 어린 피아니스트인 그도 베를린 국제 콩쿨에 참가하기 위해 도전장을 내민 이 중 하나였다.

물론, 썩 진지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냥 참가해보라고 해서 한번 나와본 거다.

솔직히 말하면… 숨 막히는 집구석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도 있고.

자신들이 아직도 귀족이라고 알고 있는 건지, 그의 부모님은 한없이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양으로 피아노를 시작하자마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나이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이미 몇 번의 연주회 경험도 있었다.

대형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하기도 했고, 영국 내에서는 여러모로 얼굴을 알렸다.

제임스의 실력이 뛰어난 덕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의 신분도 한몫했다.

그런 상황이니 제임스의 부모는 더욱 큰 것들을 그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국제 콩쿨도 그 일환.

자의로 내민 도전장인지, 타의로 내밀게 된 도전장인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도련님. 곧 예선전을 치르는 날인데…”

침대에 누워 있는 그에게 집사 겸 매니저인 레이온드가 찾아와 말을 걸어온다.

며칠 후에 베를린 국제 콩쿨 예선을 치러야 하는데, 그냥 누워 있어도 괜찮겠냐는 말이겠지.

눈을 감고 있던 제임스는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층고는 높았지만, 제임스는 천장이 자신의 코앞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집에 있을 때는 어딜 가던 시선이 따라오고, 실수 한 번만 해도 끔찍한 말들을 듣고는 했는데.

베를린에 나와 있는 지금은 그런 감시가 덜 하긴 하지만… 여전히 레이온드가 함께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레이온드만 없애버리면, 완전 자유인 거 아닌가.’

물론, 농담이다.

그는 숨을 후 내뱉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온드가 반색하며 다가온다.

“차를 준비할까요?”

“글쎄.”

“오늘도 연습하지 않으시면… 손이 굳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냥 이틀 피아노 안 친 것뿐이야. 손이 굳기는.”

호들갑 좀 떨지 말라는 듯, 제임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레이온드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겨 발코니로 향했다.

파란 하늘이다.

그는 지금보다 더 어릴 적부터,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시야를 방해하는 것 하나 없는, 맑은 창공.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신동, 때때로는 천재라고 불리는 감옥에서 벗어난 것 같은 착각.

“답답하십니까?”

레이온드가 물어온다.

그의 물음에, 제임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가끔은, 자신의 부모가 자신과는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이고, 규칙에 얽매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나왔을까.

마냥 자유를 외치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다른 조의 예선을 구경하는 건 어떠십니까.”

“가능한가?”

조금은 흥미가 생긴다.

그가 유일하게 부모의 시선에서 벗어난다고 느낄 때는 음악을 할 때였으니까.

물론 그것도 한때고, 이제는 한계가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연주를 듣는 건 좋았다.

“사전 신청을 해야 하지만… 이미 모든 조의 예선을 볼 수 있도록 사전 신청을 해둔 상태입니다.”

레이온드의 말에, 제임스는 몸을 움직였다.

“그럼, 오늘 열리는 예선에 한번 가 보지.”

그냥, 약간의 흥미였다.

자신의 경쟁자들은 과연 어떤 연주를, 어떤 음악을 선보일까 하는.

그렇게 도착한 예선장.

막 새로운 조의 예선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 거기서 거기군.”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저걸 연주라고 하는 건가?

그냥 흉내내기를 하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전부 교과서나 읽다가 온 연주자들 같았다.

“꽤 괜찮지 않습니까?”

함께 예선을 보고 있던 레이온드는 제임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의 말에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매니저로 따라왔으면, 적어도 연주를 들을 줄은 알아야 하지 않나.

어떻게 저걸 보고 꽤 괜찮은 연주라고 할 수 있지?

그래, 기본을 지킨 연주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결코 될 수 없는 연주였는데… 그걸 괜찮다고 평가하는 레이온드를 제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게 무슨 음악이라고.’

경쟁자가 될 사람들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어서 한 번 와 본 건데.

순 형편없는 연주만 해대는 녀석들뿐이니.

시간 낭비를 했다.

‘아니, 시간 낭비는 아닌가.’

그냥 오늘처럼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예선을 치러도 어렵지 않게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 어쩌면 시간 낭비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가지.”

“어? 아직 순서가 두 개나 남았는데…”

“더 볼 필요 없어 보이는데 무슨.”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 했다.

작은 발소리를 내며 무대 위를 올라오는 소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곧바로 일어나 자리를 떴을 거다.

‘…7살? 8살? 아무튼 엄청 어려 보이는데.’

이유식을 먹어야 할 것 같은 꼬맹이가 여긴 어쩐 일일까.

제임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베를린 국제 콩쿨의 예선 참가 자격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명확한 커리어가 있거나, 아니면 심사위원 중 한 명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커리어가 있을 수는 없는 나이, 그럼 추천서인데.’

돈을 써서 심사위원을 매수했나.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누가 봐도 ‘공주님’ 티가 팍팍 나는 아이였으니까.

“귀엽네요.”

레이온드가 옆에서 중얼거린다.

제임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외모가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저 어린 여자애를 콩쿨에 내보내는 부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자신의 부모보다도 더 미친놈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아이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딴, 따라란.

첫 소절이 들리는 순간부터, 제임스는 멈칫하곤 시선을 무대로 고정했다.

많이 들어본 곡이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그도 가끔 연주하는 곡이기도 했다.

흥겨우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곡 중 하나라 좋아했으니.

아이의 연주는… 즐거웠다.

지금까지 다른 참가자들이 보여주었던 연주와는 전혀 다르다.

기교?

형식?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 그냥 즐기고 있다.

“아…”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째서일까.

하얀색 연주용 드레스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가.

창공을 누비는 새처럼 보이는 것은.

“어린 것 같은데, 정말 잘 치네요.”

“…”

옆에서 레이온드가 무어라 말을 했으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란 딴딴.

그저, 아이의 피아노 연주가 천둥소리마냥 귓가에 날아와 울린다.

맑은 웃음소리와 같은 피아노 연주.

몸을 살짝씩 움직일 때마다 따라 흔들리는 연주용 드레스의 주름.

저 모습이다.

제임스가 그토록 원하던 모습이.

“레이온드.”

“예, 도련님.”

“저 아이… 누군지 알아 와.”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쩐지 이번 베를린 국제 콩쿨은,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을 것 같았다.

* * *

조성현과 채윤이, 장현아와 한아름이 머무는 숙소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이틀 뒤가 예선 결과 발표 날이고, 본선 1차 무대에서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하는지도 발표되는 날.

보통은 얌전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결과 발표를 기다리겠지만…

글쎄.

채윤이와 조성현은 당연하지만 ‘보통’의 가족이 아니었다.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장현아와 한아름의 추천, 그리고 채윤이의 강력한 동의로 인해.

그들은 독일의 도시 중 하나인 ‘본’으로 가기로 했다.

본의 다른 것들도 유명하긴 하지만, 조성현과 채윤이의 목적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아빠, 옷은 안 챙겨도 괜찮아.”

채윤이가 자신의 가방에 아이의 옷도 챙기려는 조성현을 말렸다.

“그래?”

“응. 내일 입은 옷은 내 가방에 챙겼어. 내 거 말고 아빠 것만 챙겨.”

채윤이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한다.

아이의 말에 조성현은 채윤이의 옷을 챙기려던 것을 멈추고, ‘음’ 하고 작게 소리를 흘렸다가 노트북을 챙겼다.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일단 챙겨두면 악상이 떠올랐을 때 바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니 괜찮지 않겠는가.

며칠째 작업에 아무런 진척이 없어 답답했던 탓에 그냥 외면해버릴까 싶다가도, 언제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준비 다 됐어?”

“응. 아까부터 준비 다 됐어.”

“그럼 가자.”

채윤이가 얼른 가자는 듯 조성현을 보챈다.

조성현은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방 밖을 나섰다.

마침 장현아와 한아름도 방에서 나오는 길이어서 마주칠 수 있었다.

“바로 역으로 갈까요?”

“시간은 어때요?”

“여유로워요. 지금 바로 출발하면 30분 정도는 남을 거예요.”

“좋네요. 천천히 구경하다가 기차 타면 되겠어요.”

장현아의 말에 조성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힐끗 시선을 움직이니,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아름이 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많이 밝아 보였다.

더 다양한 그림을 촬영할 수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조성현은 눈을 깜빡거리며 멍하니 역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아니, 저는 솔직히 핸리포터에서 나오는 역 같은 걸 생각해서요.”

조성현은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그는 진심으로 핸리포터에서 나오는 역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공항만큼 큰 역사가 떡하니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무지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선배님도 모르시는 게 있네요.”

“저도 사람인데,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훨씬 많죠.”

장현아의 말에 조성현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이번에는 꽤 친숙한 느낌의 실내가 그들을 반겼다.

며칠이나 있었다고 벌써 익숙해진 아늑한 독일식 분위기와 모던한 인테리어가 더해진 역사였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돌아보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되었다.

그들은 예매해둔 기차에 올랐다.

“너무 두근거린다…”

채윤이가 작게 중얼거리고.

치이익.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보자.’

본.

베토벤의 고향으로.

내 딸은 음악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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