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음악천재-547화 (547/603)

547화

조성현은 곧바로 작업실로 돌아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잠깐 나갔다 온 것 같은데, 이미 몇 시간이 지나 있는 상황.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악상을 노트에 적어두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화되듯 사라질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빠르게 작업에 집중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틀이 짜인 곡이었고.

그 곡에 디테일을 추가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디테일에 어떤 요소들을 넣으면 좋을지 노트에 적어두었기에 사실상 뷔페에서 음식을 골라 먹듯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작업실을 조용히 울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조성현은 멈칫하며 몸을 돌렸다.

“네, 들어오세요.”

그의 답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장현아가 빼꼼 얼굴을 들이민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바쁘세요?”

“아뇨, 괜찮아요.”

조성현이 힐끗, 작업 모니터를 바라보았다가 답했다.

어느 정도 윤곽도 잘 잡혔고 사실상 이제 다듬는 과정만 남았다.

다듬는 거야 시간이 걸릴 뿐이지, ‘창작’이라기보단 ‘노동’에 가까운 일이라 괜찮을 듯싶었다.

조성현의 허락에 장현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들어와 눈치를 봤다.

“그, 어젯밤에는 죄송했습니다. 원래 잘 안 취하는데…”

“안 취하는 것 치고는…”

“제발요. 선배.”

장난스럽게 말하는 조성현의 말에, 장현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조성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안 놀릴게요.”

그의 답에 심호흡을 한 번 한 장현아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다시 한번 죄송하고… 앞으로는 취할 때까지 안 마시겠습니다.”

“예. 잘 조절하면서 마시는 거로 하자고요.”

조성현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장현아는 ‘으으’하고 신음을 흘렸다.

“조금 어려우시겠지만, 어제의 일은 잊어주세요…”

“저는 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아씨는 영상까지 촬영했잖아요. 그건 어떻게 됐어요?”

“…아직 협상 중이에요.”

장현아가 이를 악물며 말한다.

조성현은 ‘협상 중’이라는 표현에 웃음을 터트렸다.

장현아는 그의 웃음을 더 이상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에효’하고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애써 주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아, 저건 뭐에요?”

장현아가 슬쩍, 조성현의 작업 모니터를 가리키며 묻는다.

“오늘 작업한 곡인데, 꽤 잘 나온 것 같아서 만족하는 중이에요.”

“와, 선배님이 만족했다고 하면 진짜 좋은 곡일 텐데. 들어보고 싶네요.”

“음, 완성하고 나서 들려줄게요. 아직은 미완성이라.”

조성현은 장현아의 요청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이번 곡은, 완성한 후 채윤이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다.

장현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채윤이에게 들려준 후에야 그녀에게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성현의 답에, 장현아는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완성하고 들려주세요. 곡 작업하시는 건… 앨범이나, 공연 같은 건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될까요?”

장현아는 조성현이 다음에 들려주겠다는 말에 곧바로 수긍하고는, 자신이 해야 할 업무 이야기로 넘어갔다.

조성현이 곡을 만들면 그걸 어떻게 대중들에게 공개할지 논의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와 현실적인 부분을 해결하는 게 장현아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성현은 장현아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난밤, 장현아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살짝 생각해둔 게 있긴 하다.

그러나 당장 무언가 말하기에는 조성현 자신도 생각이 구체화되지 않아서 조심스럽긴 했다.

“아직은 논의해볼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곡을 몇 개 더 만들어보고, 지금이다 싶을 때 먼저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냥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장현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조성현이 어떤 형식으로 곡을 공개하겠다고 해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성현은 그런 장현아의 모습에 안심하며, 미소 지었다.

“채윤이는 여전히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인데…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간단하게 해결할까요? 채윤이가 무리하는 건 당연히 싫긴 한데, 그래도… 뭔가 아쉬움을 남기고 싶진 않네요.”

평소였다면, 당연히 채윤이가 무리해서 연습하는 것을 반대했겠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무려 베를린 국제 콩쿨의 본선 2차 무대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이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인 만큼, 조성현은 자신이 강제로 아이를 쉬게 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그와 비슷한 압박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조성현의 마음이 느껴진 탓인지 장현아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샌드위치로 준비할게요.”

“항상 고마워요. 현아씨.”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장현아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조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픽 웃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무서운 속도로, 그는 다시 한번 곡 작업에 집중해 나갔다.

* * *

순식간에 며칠이 흘렀다.

채윤이와 조성현의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그렇다고 여유롭진 않았다.

아이는 매일같이 열몇 시간 동안 연습, 혹은 곡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조성현도 비슷했다.

곡 하나를 계속 다듬고, 또 다듬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성현의 곡은 완성되어 갔고.

채윤이의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드디어, 본선 2차 날이 밝았다.

채윤이는 그날 아침부터 말을 아꼈다.

그런 아이를 존중하며, 조성현이나 장현아, 한아름은 채윤이에게 굳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채윤이의 온 신경이 본선 2차 무대에서 할 연주에 쏠려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어서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채윤이는, 한아름과 함께 대기실로 향하며 조성현에게 인사했다.

산책하러 가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무대에서 연주할 곡에 집중하고 있어서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긴장한 건 아닌 모양.

조성현은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는, 관객석으로 향했다.

“긴장한 것 같진 않았죠?”

“편안해 보이던데. 집중은 엄청 했나 봐요.”

“그러니까요. 진짜, 어떻게 저런 집중력을 보일 수 있는지… 대단한 것 같아요.”

장현아가 작게 감탄을 흘리며 자리를 잡고.

조성현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채윤이의 차례는, 4번째.

이번 타임에 8명이 연주하는 것을 생각하면, 딱 중간이다.

조성현은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먹으려 노력하며 무대에 시선을 돌렸다.

채윤이가 산책을 하듯 편안히 갔으면, 조성현도 편안히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이 콩쿨이 채윤이의 인생 전부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져서.

조성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무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로 올라와 연주를 시작한다.

이미 본선 2차 무대인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참가자의 연주는 정말 훌륭했다.

지금 이 연주가 수백, 수천의 관객을 동원한 연주회에서 연주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진짜… 엄청나긴 하네요.”

그걸 느낀 것인지, 장현아도 첫 번째 참가자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속삭였다.

조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전 세계에서 음악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한 명 한 명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

다음 참가자도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고, 듣기에 너무 좋았다.

다만… 조성현은 미묘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진짜 누가 더 잘하냐를 가리는 게 아니라 누가 실수하는지를 보는 것 같아요.”

장현아가 옆에서 말을 하고.

조성현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묘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뭔가 좀 아쉽네.’

연주 자체는 훌륭했는데, 어쩐지 음악을 접한 느낌은 아니었다.

음악을 들으며 음악을 접한 느낌이 아니라니.

누가 들으면 이상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조성현의 진심이었다.

다들 그냥 기계적으로 연주한 뒤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채윤이가 지난번 무대 때 조성현에게 자유로움과 해방을 종용했던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다들, 그냥 똑같은 연주를 펼치고 있었으니까.

흠 잡힐 곳 없는 연주를 하는 게 목적인 사람들처럼 연주한다.

조성현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 또한 느낄 수 있었는데…

채윤이는 이런 연주를 선보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그냥 보여주기 위한 연주를 하진 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덧 세 번째 참가자가 무대 위에 올라오고 있었다.

그 참가자를 보며 조성현이 눈을 빛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지난번 본선 1차 무대의 지정곡을 받을 때 봤던 남자아이.

제임스 스튜어트.

아이는 숨을 후우 내뱉고는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성현은 오늘 처음으로 연주를 들으며 감탄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두 참가자가 보여준 연주도 훌륭했지만, 그들의 연주가 보여주기식 연주였다면…

이번 연주는 전혀 달랐다.

‘같은 형식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참가자들이 보여주기식 연주를 하는 것과는 다르게, 적어도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런 연주에서 벗어나려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냥 훌륭한 연주, 음악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넘어갔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지금 조성현의 눈에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연주자는… 알을 깨부수고 나오려 몸부림치는 봉황으로 보였다.

이미 조성현이 알을 깨고 나온 상태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난다.

‘확실히, 재능 넘치는 사람들이 많구나.’

조성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참가자를 보면서 아쉬우면서도 안심이 되었는데.

지금,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주를 보니 안심할 수 없겠다.

조성현은 채윤이의 아버지였지만, 솔직히 이야기해서…

제임스와 채윤이의 연주 중 어떤 것이 더 대단하냐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쉽게 답할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는 정말 묘한 감정을 느끼며, 무대를 끝내고 고개 숙여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제임스 스튜어트를 향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우고, 진정될 때쯤.

옆에 앉아 있던 장현아가 긴장했는지 숨을 살짝 들이켰다.

다음 차례는.

채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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