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은 음악천재-570화 (570/603)

570화

제임스 스튜어트가 무대 위에 올랐다.

조성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연미복을 입고 있는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채윤이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도 않는데, 조금은 더 어른스러운 듯한 모습이다.

내면의 성숙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뭐, 내면이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지.’

제임스와 대단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거의 인사만 한 게 전부인 사이였기에 제임스 스튜어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모른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나이보다 더 성숙해 보이는 편.

채윤이는 딱 나이만큼 귀여운 면이 있지만,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아이의 생각이 깊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스튜어트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보기만 해도 ‘아, 저 사람은 꽤 성숙할 것 같다’라고 생각할 법한 인상을 풍겼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매번 새로운 연주를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였다.

채윤이도 항상 새로운 연주를 선보이고는 하지만, 아이와는 또 느낌이 다른 새로움이다.

기본적으로 채윤이는 확실하게 자신의 연주가 뭔지 알고,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듯한 새로움을 선보여준다면.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를 통째로 바꿔버리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의 새로운 연주를 선보이고는 한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조성현은 고대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손을 무릎 위에 올렸고.

그 순간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주는 시작되었다.

따란. 따라란.

베토벤의 곡이다.

모두에게,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곡.

클래식? 그게 뭔데?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은 분명 알 것이다.

그만큼 친숙하고, 익숙한 곡.

세간에 ‘엘리제를 위하여’라고 알려졌지만, 전문가들은 그 당시 베토벤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테레제 말파티’라는 여인을 위해 쓴 곡으로 추측하고 ‘테레제를 위하여’라고 쓴 것을 잘못 읽은 것이라 추측하는 곡이기도 했다.

얼마나 슬픈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약 전문가들의 추측이 진실이라면, 베토벤은 자신이 사모했던 여자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그녀를 위해 쓴 곡은 후대의 사람들이 이름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상황 아닌가.

조성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따란따란 따라라라란.

익숙한 멜로디,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은 흔히 듣던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와는 조금 달랐다.

아니, 어쩌면 조성현에게만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정석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 정석과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물론 그 정석적인 느낌에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피아니스트를 온전히 담아낸 것은 대단한 일.

다만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는 과정에서 본인의 감정까지 담겼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가질 수 있는 두근거림, 그리고 이어지는 설렘.

한 걸음씩 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향해 다가갈 때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정말 사랑스러운 곡이지만, 그 곡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괜히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숨을 잠시 참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퍼엉’하고, 꽃들이 만개하는 환상처럼 긴장감을 터트리며 제임스 스튜어트가 생각하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다다른 순간’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

하지만 그 표현 속에서도 약간의 불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뭐가 불안한 것일까.

조성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주는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임스 스튜어트가 고개를 숙여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더니 무대에 내려갔다가, 얼마 있지 않아 금방 다시 올라온다.

이번에는, 오늘 무대를 했던 모든 연주자들이 함께 올라왔다.

채윤이도 함께 하고 있었고, 모두가 함께 인사를 끝내고 나서야 연주회는 막을 내렸다.

박수 소리가 그들을 뒤덮었다.

조성현은, 무대를 내려가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연 오늘 제임스 스튜어트가 무대에서 표현해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러니까… 제임스 스튜어트만의 ‘엘리제’는 무엇이었을까.

피아노? 아니면 음악 그 자체? 그것도 아니라면 전혀 다른 무언가…?

그게 무엇이든.

제임스 스튜어트는 결국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저렇게 좋은 연주를 선보인 연주자가 강렬히 원하는 것이라면,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결과는 모른다.

만약 제임스 스튜어트의 ‘엘리제’가 자신이 갈망하는 ‘여인’이라면… 글쎄.

“베토벤과 같은 결말을 맞을 수도 있겠지 뭐.”

조성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 * *

연주회가 마무리되고.

채윤이가 조성현에게 달려왔다.

드레스 차림의 채윤이가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달려오는 것을 본 조성현은 웃으며 아이를 안았다.

“고생했어.”

그렇게 말하니, 채윤이가 고개를 흔들며 재미있었다고 답한다.

“이렇게 특별 무대까지 하니까, 2위로 입상했다는 게 더 실감난다.”

옆에서 촬영하던 한아름이 채윤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장현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 정도면 국제 콩쿨들 골라 다니면서 도장 깨기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한아름이 슬쩍 시선을 움직여 조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과 함께 돌아간 카메라에 조성현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채윤이가 베를린 국제 콩쿨에 입상할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요인이 다양하게 작용해서죠. 국제 콩쿨들을 도장 깨기 한다는 말 자체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도장 깨기라니, 표현 자체는 꽤 재미있었다.

그러나 조성현은 채윤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콩쿨에 참가하여 한아름의 말처럼 ‘도장 깨기’를 하고 다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물론, 채윤이가 이번 베를린 콩쿨 기간 동안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도 잘 알기 때문에 아이가 하겠다고 하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몇 주 동안 채윤이는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조성현이 채윤이를 살피니, 다행히 아이는 당장 다른 콩쿨에 참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채윤이는 한아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제임스 스튜어트도 연주 진짜 잘했죠.”

조성현과 함께 채윤이의 시선을 따라간 장현아가 작게 말한다.

그녀의 말에 조성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채윤이는 ‘응’하고 무심결에 답한다.

“감정 표현도 너무 잘했고… 건반 터치도 좋았어.”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제임스 스튜어트 쪽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이들이 건네는 인사를 하나씩 화답하다가, 채윤이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 순간, 제임스 스튜어트가 멈칫하고.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채윤이와 조성현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다가와 인사 한마디 정도만 건네려는 의도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일까.

제임스는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그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는데…

조성현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이내 미간을 좁혔다.

왜일까.

방금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주했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떠오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향해 다가가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드러난 연주. 거기에… 마침내 앞에 섰을 때 터지는 사랑스러움.’

조성현은 속으로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주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손가락을 떨며 다가오는 제임스 스튜어트.

그는 채윤이의 앞에 서서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평범하게.

“연주 잘 들었습니다. 조채윤 피아니스트.”

“저도 잘 들었어요.”

채윤이가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네?”

“정말 잘 들으셨는지, 궁금해서요. 혹, 부족한 제 연주에 실망하진 않으셨을지.”

마냥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니긴 했지만, 정말로 잘 들었는지 물어오는 제임스의 모습에 채윤이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어, 진짜 잘 들었는데… 제가 들은 연주 중에 가장 좋았어요.”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시선을 피하듯 슬쩍 조성현을 보았다가, 이내 주변을 살피고는 입을 열어 답했다.

채윤이가 들은 연주 중 가장 좋았다는 말에 제임스 스튜어트는 숨을 작게 토해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안도의 한숨 같은 것처럼 보였다.

저게 연기라면 어린 나이에 사람 대하는 법을 잘 배웠으니 대단한 거고, 아니라면… 그만큼 채윤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다행이군요. 열심히 연주했는데, 조채윤 피아니스트에게 부족하게 들렸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진심으로 듣기 좋았으니, 걱정 마세요.”

“…”

채윤이의 말에, 제임스 스튜어트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그런 제임스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고.

제임스가 어렵게 입을 뗐다.

“듣기 불편하지 않았다면, 혹시 기회가 될 때… 같이 연주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같이… 연주요?”

채윤이가 당황해서 되묻는다.

아니, 저건 당황한 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온 것에 가까워 보였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제안에 조성현은 물론 함께 있던 장현아와 한아름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임스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채윤이가 꽤 여러 번 했었으니까.

근데 상대가 먼저 제안을 해오다니.

놀랄 일이었다.

“예, 미튜브 등 활동을 하느라 바쁘신 건 알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함께 연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시작하고 난 이후로 제 음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좋아요.”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설명하려 했는데.

채윤이는 제임스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얼른 답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제안을 회수하기로 하면 큰일 난다는 듯 급히 답한 채윤이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자신이 선보인 ‘엘리제를 위하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긴장감이 녹아내리고, 그 속에 있던 것이 환상처럼 터져 나온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프로포즈에 성공한 사람이 보일 만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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