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조성현은 묘하게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채윤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조성현에게 다가와 안긴다.
채윤이를 안아 들고, 조성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쑥쑥 크는 채윤이는 이제 정말 조성현이 계속 안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학교 정문을 빠져나와, 아이를 내려준 조성현은 채윤이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음… 좋았어.”
아이가 답을 하는데, 애매한 뉘앙스였다.
좋긴 좋은데, 그렇다고 대단히 완벽한 날은 아니었던 모양.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친구들이 엄청 많이 물어봐.”
“뭘?”
“독일 어땠냐고. 자기도 독일 가고 싶다고.”
하긴, 요즘은 학부모도 정보가 빠르지만 또래 아이들도 장난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더 정보가 빠를지도 모른다.
항상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고, 학교 친구들도 미튜브 구독을 하고 있을 테니.
독일에 가서 베를린 국제 콩쿨에 입상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겠지.
“채윤이가 베를린 가서 국제 콩쿨에 입상하고 왔으니 그런가 보다.”
“응. 입상 한 번 했다고 갑자기 친구들이 엄청 몰리니까 조금…”
“불편해?”
아이가 혹시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많이 힘들어할까, 조성현이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하지만 채윤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귀찮아. 맨날 친구들이 모이니까 영준이랑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고, 한율 오빠랑도 인사만 겨우 했어.”
채윤이가 고개를 흔들면서 답한다.
딱히 마음이 불편하거나 힘든 건 아니고, 말 그대로 귀찮은 정도인 모양.
그러던 채윤이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세라가 조금…”
“세라?”
이름이 익숙해서, 고개를 갸웃하던 조성현은 ‘아’하고 짧은 탄식을 흘렸다.
조금 전 학교 앞에서 만나 찝찝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세라의 어머니였다는 게 기억나서였다.
조성현은 채윤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왜? 세라가 뭐라고 해?”
“자기도 이번에 콩쿨 나갈 거래.”
그 말에 조성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 세라의 어머니가 세라가 콩쿨에 나갈 거라 과외를 해줬으면 한다고 요청했었지.
“그래서, 뭐라고 해줬어?”
“힘내라고 말 했지. 콩쿨은 원래 열심히 연습하고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래?”
“응.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보기도 했어.”
“자기가 콩쿨에서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고? 그래서 채윤이는 뭐라고 답해줬는데?”
조성현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콩쿨에서 우승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개인적으로 조금 불편하긴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어머니에 그 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친구들 사이에 서로 물어볼 수 있는 질문들이니까.’
대중 음악계에서도 음반 내면 몇 위할 것 같냐, 얼마나 팔릴 것 같냐는 질문을 서로 던지고는 한다.
그 정도 수준의 질문이었으니, 크게 무례하지도 않겠지만.
조성현은 이미 세라의 어머니에게 제안을 받고 거절한 터라 조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
채윤이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못할 것 같다고 했지.”
“어, 그래?”
조성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되묻는다.
저런 질문을 들으면 보통 예의상이라도 열심히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정도의 답을 하는 편이니.
하지만, 채윤이는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아이다.
분명 확실한 이유가 있으니 못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응. 세라는 그냥 뽐내려고 피아노를 하는 거야. 재미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를 대하는, 음.”
채윤이는 답을 하다가 말고, 잠시 입을 다물고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이 고민할 때 자신의 표정과 같아서, 조성현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채윤이가 고민하다가, 말을 잇는다.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가 별로야.”
“태도가? 조금 의외인 대답이네.”
“그치만 진짜인걸. 진지하게 피아노가 좋고, 피아노로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잘하는 것 같으니까 하려고 하는 느낌이야.”
채윤이는 그런 피아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으니.
채윤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거기다가.”
“응.”
아이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는 듯, 말을 끊었다가 슬쩍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한율이 오빠도 그 콩쿨 나간다고 했어.”
“아.”
“그럼 한율 오빠가 우승하지, 세라가 어떻게 우승을 해.”
어림도 없다는 듯, 채윤이가 말한다.
조성현이 풀썩 웃음을 흘렸다.
그치, 한율이 나가면 우승은 어렵겠지.
어쩐지 묘한 불쾌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아 조성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찝찝함은 여전했다.
‘요즘은 학부모들 선에서 뭉쳐서 학생들끼리도 다툼이 일어난다던데.’
학부모들끼리 사이가 안 좋으면, 학생들끼리도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게 보통.
세라의 어머니는 누가 봐도 영향력이 꽤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나서서 괜히 채윤이를 배척하기 시작하는 건 아닌가.
그런 불안감이 생겨났다.
조성현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들려는 그때.
우우웅.
그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이름이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조성현은 힐끗 채윤이를 바라보았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예나씨. 안녕하세요.”
-한국 돌아왔죠?
“며칠 전에 돌아왔네요.”
-그럼 시간 좀 내줘요.
대뜸, 서예나가 요청했다.
조성현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에 픽 하고 웃었다.
처음 서예나와 통화할 때가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예, 좋습니다. 언제 시간 내면 될까요?”
-오늘, 지금 어때요.
“…지금이요?”
-한국 돌아왔으면 채윤이 하교 시간일 텐데. 채윤이랑 같이 봐요.
“어…”
말을 흐리며 채윤이 쪽을 다시 바라보니, 아이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나 언니가 같이 보자고 하는데?”
“언제?”
“지금.”
“어… 나는 좋아.”
지금이라는 말에 채윤이도 잠시 당황하나 싶더니, 이내 긍정적인 답을 한다.
아이의 답에 조성현이 통화를 이었다.
“네, 예나씨. 그럼 어디서 볼까요?”
-성현씨 집 쪽으로 갈게요. 근처 카페에서 보죠.
“예, 그럼 집 앞에 플러스라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보시죠.”
-좋아요. 이따 봐요.
서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항상 느끼지만, 용건이 있을 때 전화를 하고 용건을 말한 후 바로 끊는 스타일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을까.
조성현은 밀려오는 궁금증에 걸음을 서둘렀다.
* * *
조성현의 집 근처, 카페.
서예나는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규모가 그리 큰 카페는 아니었는데, 거기에 서예나가 떡하니 앉아 있으니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서예나에게 시선이 꽂혀서 떨어질 줄 몰랐다.
조성현은 그 광경에 헛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다가갔다.
“숨길 시도도 안 하시고 그냥 오셨네요.”
“뭐, 선글라스 꼈어요.”
서예나가 자신의 선글라스를 톡 하고 건드리며 말한다.
태연한 서예나의 태도와는 반대로,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남자는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니저분이세요?”
“한 달 전부터 같이 다니고 있어요.”
서예나가 말하고.
남자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조성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은수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조성현입니다. 근데, 말씀을 많이 들으셨다고요?”
“넵. 예나씨가 워낙 자주 말씀해 주셔서.”
“예나씨가요?”
조성현이 힐끗 서예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한지, 서예나도 박은수를 응시하고 있었고.
“예, 항상 뭐만 하면 넌 왜 성현씨처럼 못하냐고…”
“잡담은 그만하지? 은수, 놀러 왔어?”
서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간에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박은수는 서예나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하다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올라와 있는 게, 서예나가 마냥 나쁘게 대하는 것은 아닌 모양.
조성현은 뭐만 하면 자신이 비교 대상이 된다는 말에 조금은 황당했으나, 그저 웃으며 넘겼다.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던 건가요?”
“있긴 한데, 왜 이렇게 급해요. 채윤이도 오랜만에 봤으니, 느긋하게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그렇긴 하죠.”
조성현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
옆에 있던 박은수는, ‘나한테는 놀러 왔냐면서’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서예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태연하게 채윤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간간히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꽤나 즐겁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선물은, 어떤 거 가지고 싶어?”
“선물?”
그 말에 채윤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서예나는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려 베를린 국제 콩쿨 준우승인데, 언니가 선물 하나 해줘야지. 가방…은 아닐 것 같고. 뭘 해줘야 좋을까?”
축하 선물을 해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채윤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일까.
서예나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조성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채윤이 축하 선물도 안 준건 아니죠?”
“…음. 제가 생각을 못 하긴 했네요.”
솔직히, 진짜로 생각을 못 했고.
그렇기에 선물을 챙겨준다는 서예나의 말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뭐, 그럴 수 있죠. 그래도 학교 친구들이 선물 하나씩 줬을 테니까.”
“선물… 하나도 못 받았는데. 친구들은 축하한다면서 이상한 것들만 잔뜩 물어봤었어요.”
“이상한 거?”
서예나가 더 말해보라는 듯 채윤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네, 자기도 콩쿨 나가는데 우승할 것 같냐는 거.”
“뭐 그런 질문을 한다냐. 성현씨도 설마 주변에서 그런 질문 받고 그래요?”
“비슷하죠. 저는 무슨 이번에 딸이 콩쿨에 나가는데 과외를 해주면 안 되겠냐는 제안도 받았습니다.”
조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서예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해봐요.”
그녀의 말에 조성현은 한숨을 삼키며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가 설명하는 중간에 채윤이도 놀랐다.
세라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아이도 처음 듣는 것이었으니.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 그냥 무시해버려요.”
“네, 안 그래도 제안은 거절했고… 걱정인 건 그냥 괜히 학부모들 사이에서 말이 나돌까 봐.”
“영향력 있는 사람이에요?”
“글쎄요?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익숙한 걸 보면 꽤 영향력 있으신 것 같긴 하던데.”
조성현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사소한 이야기 정도로 넘어가듯 말하려 했는데, 서예나 입장에서는 꽤 관심이 갔던 모양이다.
“화장품? 어딘데요?”
“어…”
거기서 조성현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화장품 브랜드니까.
화장품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선사하는 연예인인 서예나에게 말하는 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
하지만 서예나는 얼른 말해보라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조성현을 바라보았고, 결국 조성현의 입이 열렸다.
“‘로안’이라는 브랜드요.”
“로안? 오케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박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가 불안한 얼굴로 서예나와 눈을 마주하고.
“뭐해?”
“예?”
뜬금없이 뭐하냐고 묻는 서예나의 물음에 박은수가 눈을 껌뻑거리고.
“로안에서 협찬 요청 들어온 거 거절해야지.”
박은수의 당황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서예나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은 음악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