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들리는 소문이 있던데.
“여기 진짜 조용해서 좋다.”
차선빈이 딸기 스무디를 마시며 말했다.
지금 테이블 위엔, 주문한 음료가 저마다 한 가지씩 놓여있었다.
“그러게. 조용하니까 좋네.”
“역시 쉬는 건 이렇게 해야 돼.”
그렇게 말하던 안지호가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안지호는 어느새 자신의 음료를 다 비운 상태였다.
확실히 좋네.
사람도 없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카페 안에 손님이라고는 우리들 밖에 없었다. 아직 점심시간이라 그런가. 새삼 시간을 잘 잡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여기 음료 진짜 맛있다.”
“딸기 스무디 괜찮아?”
“응. 괜찮아.”
대답을 마친 차선빈은 딸기 스무디를 다시금 드링킹하기 시작했다.
커피도 맛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달한데 적당히 쓴맛도 나고.
한마디로 입맛 저격이었다.
숙소에서 멀지만 않았어도 자주 올 텐데.
아쉬운 마음에 커피를 한잔 더 들이켰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각자 지금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런 한가로움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근데 그래도 분량은 나와야 하지 않나?
“근데 우리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거야?”
“왜, 뭐가.”
“분량 말이야. 뭘 찍긴 찍어야 하잖아.”
“찍었잖아. 먹는 거, 쉬는 거.”
그게 재밌을까.
진짜로 먹는 거 쉬는 것뿐인데.
“애초에 재미를 생각했으면 이런 식으로 일정을 짜면 안 됐지. 우리는 그냥 우리가 정한 플랜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뭐,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좀만 더 쉬자.”
이후 안지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붙였다.
나무늘보가 따로 없구나.
그러던 안지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한 잔 더 시킬까.”
“뭘?”
“퐁 크러쉬.”
제대로 빠졌구만, 아주.
그 뒤로 안지호는 정말로 음료를 한 잔 더 시켰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먹는 듯 싶더니, 곧 다시 여유를 즐겼다.
“이제 가자.”
사실 여유를 즐기는 건 좋지만, 막상 음료를 다 마시니 슬슬 일어나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생각보다 카페에서 시간이 안 가네.
그리고 다른 멤버들 역시 그렇게 느낀 건지 그런 나의 말에 동의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가게 안 테이블에는 여전히 우리뿐이었다.
그렇게 안지호와 차선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려고 하자, 알바생 분이 그런 우리를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해주셨다.
“안녕히 가세요!”
그런데 그때 나온 목소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컸던 건지 알바생은 순간적으로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난 그런 알바생 분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여전히 눈을 마주친 채로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감사였다.
음료도 맛있게 제조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배려해 일부러 모른 척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
그 외 등등. 정말 여러 가지 의미였다.
그런 나의 감사인사에 알바생 분은 잠시 놀란 듯 하시더니 이윽고 고개를 숙여버리셨다.
[“X친. 너무 다정해······.”]
이번엔 내가 모른 척을 할 때였다.
* * *
다음 코스였던 만화방에서는 그야말로 만화만 실컷 봤다. 규모가 상당히 큰 만화방이라 그런지 웬만한 만화는 다 있었다.
“어, 이 만화. 이거 아직 있네.”
“아, 그거. 난 그거 바다섬에서 멈췄는데.”
“다시 봐. 요즘 재밌대.”
그런 내 말에 안지호는 다소 심드렁하게 반응하더니 이윽고 다른 책을 꺼내 갔다.
그 뒤로 만화책 보고, 밥 먹고, 그러다가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저녁에는 앞서 말했듯이 백은찬 일행과의 합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은찬과 신하람은 만나자마자 자신들의 방탈출 모험기를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방탈출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무슨 방이었는데?”
“공포방이요.”
음, 그래. 공포방이면 그럴 만하지.
역시 안 가길 잘했다.
저녁은 한강에서 치콜을 하기로 했다.
치킨과 콜라.
치킨엔 역시 콜라지.
“내가 또 오기 전에 미리 주문을 해놨지.”
백은찬의 센스에 새삼 놀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따릉이를 탄다며 백은찬과 신하람이 뛰쳐나가고, 도운이 형은 노을 사진을 찍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되다보니 어느새 자리에는 나와 안지호, 차선빈 셋만이 남아있었다.
‘카메라 한 대는 백은찬이 찍는다고 가져갔고, 남아 있는 건 한 대인가.’
나는 곧바로 남아 있는 카메라를 들고 옆에 있던 차선빈과 안지호를 촬영했다.
두 사람은 뭔가를 서로 열심히 말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아까 만화방에서 봤던 만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차선빈은 여전히 차분했고, 안지호는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 있었다.
멀리서 지는 노을과 그 사진을 찍는 도운이 형. 그리고 주변에서 따릉이를 타는 백은찬과 신하람.
이처럼 나는 모든 멤버의 그 순간을 카메라에 하나씩 담고 있었다.
* * *
데이릴리의 한유미는 오늘 오랜만에 라디오 스케줄에 나갔다. 얼마 전, 자신의 솔로 앨범이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데이릴리도 이제 연차가 차면서 그룹 활동보다도 혼자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 한 라디오도 그러한 활동의 일부.
하지만, 그래도 역시 멤버들이 없는 대기실은 심심하지 그지없었다.
“유미 누나!”
그때, 한유미의 대기실로 오늘 라디오 DJ이자 DR 엔터 소속 그룹 티어로브의 멤버 신윤우가 찾아왔다.
“어, 윤우야.”
“누나, 저녁은 드셨어요?”
“당연히 먹었지. 밥도 안 먹고 일할까.”
“혹시 못 드셨나 해서요. 누나 앨범 나와서 한창 바쁠 때잖아요.”
“그래, 알아주니 고맙다.”
데이릴리와 티어로브는 소속사는 다르지만, 비슷한 연도에 데뷔해 비슷한 활동 기간을 거쳤다.
비록 소속사는 다르지만, 나이대도 비슷해서 두 그룹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다.
물론 외부에서는 두 그룹이 서로 친분이 있는 줄 모르고 있지만. 아무래도 남녀 아이돌이다 보니 조심해야 할 게 많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어?”
“무슨 일이긴요. 누나 혼자 심심할까 봐 왔죠. 대기실도 큰 데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렇긴 하지.”
쓸데없이 크기만 하지.
물론 작은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아, 근데 누나. 저 요즘 그거 잘 보고 있어요.”
“뭐?”
“누나네 소속사에서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요. 플레이 온 더 스테이지.”
“아.”
한유미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우리 노래 나온다 해서 본 건데, 보다보니 꽤 재밌더라고요.”
“아, 맞다. 거기 티어로브 노래 나왔었지?”
“네. ‘뒤엎어’요.”
한유미가 기억하기로는 2차 미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선빈이네 팀이었지.
“처음엔 영상 클립으로만 봤는데, 그것만 봐도 다들 실력이 좋더라고요. 요즘 연습생들은 진짜 실력이 다 상향 평준화된 거 같아요.”
그 말엔 한유미 역시 동감이었다.
요즘 연습생들은 정말 실력들이 다 좋았다. 물론 우리 애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요즘도 재밌게 보고 있어요. 나중에 생방 때는 투표도 할까 생각 중이라니까요.”
“오, 그 정도로 애청자야?”
“맞아요. 애청자예요. 저.”
오오.
한유미가 그런 신윤우를 향해 엄지척을 해주었다.
“누나도 보고 있죠?”
“당연하지. 나 거기 나왔었잖아.”
“맞다. 심사위원으로 나왔었지.”
마치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제는 까마득하게 옛날이 되어버렸다. 그때 꽤 재밌었는데.
“그래서 우리 멤버들도 그 프로그램 다 보잖아.”
“오, 데이릴리 멤버들도 다 봐요? 저희도 다는 아니지만, 저 말고도 보는 사람이 있긴 해요.”
“티어로브가 본다는 게 더 놀라운 거 같은데. 보통 이런 거 잘 안 보잖아.”
“재미 앞에서는 다 똑같죠, 뭐.”
그건 또 그렇지.
그건 인정이었다.
“누나는 누가 원픽이에요?”
“나? 난 원픽 따로 없어. 다 우리 애들인데, 뭘.”
“에이. 그래도 있을 것 같은데? 다 소중해도 특별히 더 챙겨주고 싶은 연습생은 있을 거 아니에요.”
“진짜 없다니까 그러네.”
“오, 그래요?”
하지만 신윤우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한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있어요. 원픽.”
“누군데?”
“누나도 안 알려줬으니 저도 안 알려줄래요. 나중에 데뷔하면 알려줄게요.”
“하, 얘 봐라. 사람 궁금하게. 힌트라도 줘.”
그 말에 신윤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힌트는 노래를 잘해요.”
“힌트가 너무 포괄적인데.”
“이런 건 원래 이렇게 줘야죠. 애매하게.”
하지만 애매해도 너무 애매했다.
노래 잘하는 연습생이 한 둘인가.
물론 그중에서 실력이 최상위라 할 수 있는 연습생은 한 명이긴 했다.
더불어 일반적으로 플레이 온더 스테이지에서 ‘노래’라고 했을 때 떠올릴 만한 인물은 분명······.
“그 연습생, 그냥 잘하는 게 아니지?”
“······대답 안 할래요.”
반응보니 내가 생각한 그 연습생이 맞는 모양이네.
“아, 나 알 것 같은데.”
“누나,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어딜 도망가려고.”
“들켰네.”
그렇게 신윤우는 자신을 붙잡는 한유미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근데 전 누구라고 진짜 말 안 했어요.”
“그래. 알겠어.”
누구라고 안 해도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근데 굳이 숨길 이유가 있어?”
“아니, 그냥 나만 알려주면 손해 보는 것 같으니까.”
“별 게다.”
이쯤 되면 그냥 즉석에서 원픽을 만들어서라도 알려 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아, 근데 누나.”
“응. 왜?”
“그 우세현 연습생 말인데요.”
“와, 역시 우세현이었네. 원픽.”
“그 얘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렇게 이야기하는 신윤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알겠어. 응. 우세현 연습생이 왜?”
“우세현 연습생이 우도현 선배님 동생 맞죠?”
“응. 그렇다 알고 있는데. 방송 봤다면서 몰랐어?”
“아뇨. 당연히 알고 있죠.”
“근데 그게 왜?”
“음······.”
그러한 한유미의 물음에 신윤우는 뭔가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뭔가를 고심하는 것도 같고.
“뭔데, 그래?”
“그거 관련해서 항간에 이런 얘기가 많이 돌더라고요.”
“무슨 얘기?”
“둘 사이가 엄청 안 좋다는 얘기요.”
“뭐?”
순간 한유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둘 사이가 안 좋다고?
“그건 어디서 들은 얘긴데?”
“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거긴 한데 최근에는 인터넷에서도 좀 도는 것 같더라고요.”
아니, 인터넷에서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는데?”
“이곳저곳 들리는 말은 다르지만, 결국 맥락은 비슷해요. 두 형제가 사이가 엄청 나쁘다고요.”
그리고 신윤우는 덧붙였다.
“그래서 프로그램 내내 우도현이 얼굴 한번 안 비추는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