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결국 감수해야지.
불어오는 바람에 돌아가는 바람개비, 흩날리는 갈대밭,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인파.
그 속에 사자(使者).
순간적으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그대로 감았던 눈에 번쩍 떠졌다. 떠진 눈앞으로는 익숙한 풍경의 어둠만이 자리했다.
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도 모르게 순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꿈에서까지 사자라니. 미쳤나.’
아무래도 아까 그 창고 일의 영향인 것 같았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이 으스스한 그 창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열렸다가 닫혔던 그 일.
‘그게 뭐라고 꿈까지 꾸고 있냐.’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확실한 것도 없는데 혼자 쫄아 가지고. 아무래도 사자 일이 겹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분명 몸은 피곤한데,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한 느낌이었다.
‘확인, 해 봐야지.’
이대로 서울에 올라가면 곧바로 보컬룸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가서 확인해 봐야지. 제주도에 왔던 게 사실이냐고.
그리고 사실을 확인 받고 나면, 그렇구나 하면 될 일이었다. 그 이상은 정말로 이쪽 영역이 아니니까.
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쉽사리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여기에 어째 갈증도 좀 일었다.
‘물···이나 좀 마실까.’
그렇게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보니 안지호가 곤히 자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뭐야, 왜 일어나 있어?”
백은찬이었다.
“나 잠깐 물 마시러. 그러는 넌 왜···아.”
“이거 마시려고.”
그렇게 백은찬은 눈앞으로 콜라 한 캔을 흔들어 보였다. 장을 봤을 당시에 사 왔던 제로 콜라였다.
“근데 이 새벽에?”
“나도 자다가 갑자기 목이 타서.”
아까 된장찌개가 짰나.
다음엔 물 좀 더 넣고 끓여야겠다.
그리고 그대로 백은찬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내게 건넸다. 방금 전까지 냉장고에 있던 덕에 시원했다.
“혹시 무서워서 깼냐?”
“뭐?”
“너 아까 창고 얘기했을 때 얼굴 안 좋았잖아.”
그때 그렇게 티가 많이 났었나.
하지만 사실이긴 했으니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백은찬.”
“왜?”
“넌 그런 거 안 무서워?”
“그런 거?”
“뭐, 귀신이나 그런 거.”
“응. 별로?”
대답 한번 빨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렇게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었지.
“역시 무서웠구만?”
“···조금 그랬어. 조금.”
“많이 무서웠나 보네.”
백은찬은 그렇게 한 손에 콜라 캔을 든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많이는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있는데.”
“그거?”
“잠깐만 기다려봐라.”
그리고는 그대로 캔을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채로 어딘가로 빠르게 향했다. 방향을 대충 보니 방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이후 얼마 안 가, 백은찬은 무언가를 손에 쥔 채로 부엌으로 돌아왔다.
“자. 이거.”
“이거 뭔데?”
“행운의 토끼.”
행운의 토끼?
갑자기 웬 토끼 인형···아.
“이거 결국 뽑았어?”
“엉. 내가 뽑기왕이라고 했잖아.”
진짜 뽑을 줄은 몰랐지.
앞서 백은찬이 내게 건넨 건 하얀색 토끼 인형이었다. 초록색 클로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
“원래 아까 주려고 했는데, 까먹음.”
“진짜 주는 거야?”
“내가 뽑아준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이거 하나 뽑았으면 아까우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하나만 뽑은 게 아니란다.
그럼 다행이었다.
“근데 이게 왜 행운의 토끼인데?”
“잘 봐. 이거 네잎 클로버라고.”
“아. 그렇네.”
자세히 보니 그냥 클로버가 아닌 네잎 클로버였다. 확실히 깜찍하긴 했다.
“그러니 드림캐처처럼 쓰라고. 악몽 쫓아주기.”
아, 그런 의미였군.
대충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드림캐처 대신이라니, 드림캐처보다 더 귀여워서 이쪽이 더 마음에 들긴 했다.
“뭔가 효과를 의심하는 눈인데?”
“어떻게 알았어?”
“사실이었냐······.”
백은찬이 끙하는 얼굴을 보였다.
“고맙다. 효과가 어떤지는 내일 알려줄게.”
“당연히 효과 직빵이겠지.”
백은찬은 그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런 인형 하나로 잠이 잘 올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백은찬에게서 받은 행운의 토끼 인형을 든 채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근데 표정이 좀 웃기긴 하네.’
전에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묘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쯤이면 좋겠지.’
그래도 효과를 최고치로 볼 수 있도록 머리맡 근처에 두기로 했다.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잘 서는 토끼였다.
“······안 자냐?”
“어, 깼어? 미안.”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안지호가 깬 모양이었다. 그때 안지호가 내가 둔 토끼를 발견한 건지 이내 저게 뭐냐는 듯한 눈으로 보았다.
“행운의 토끼.”
“뭐?”
“그런 게 있어.”
이왕이면 두 사람 분으로 효과를 봤으면 좋겠군. 그만큼 효력이 좋기를 바라며, 나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 * *
그리고 잠은 정말로 잘 잤다.
그 이후로 깨는 것 하나 없이 꿈도 안 꾼 채로 푹 잤으니까. 효과가 아주 제대로였다.
아침은 계란 토스트였다.
토스트에 계란에 설탕까지 묻히니 그야말로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맛있다.”
그러자 안지호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더니 말없이 빵을 뜯어 먹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멤버들 모두 비몽 사몽한 얼굴들이었다.
앞서 창고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더 제작진에게 물어봤지만, 역시나 그런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듯 했다.
아침을 먹고 난 이후에는 그대로 클로징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1박 2일의 짧은 리얼리티 일정이 끝이 나는 것이었다.
“어때, 잠은 잤냐?”
클로징을 준비하던 중, 백은찬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효과 좋았어.”
“그렇지?”
그리고 다른 멤버들에게 뿌릴 인형도 좀 더 뽑아야겠다면서 백은찬은 그대로 다시 한번 인형 뽑기에 나설 준비를 했다.
클로징이 끝나면, 구경 좀 해야겠군.
괜찮으면 나도 몇 개 뽑아가고.
* * *
제주도에서 돌아온 그 이후에도 여전히 스케줄로 빡빡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리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내겐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돌아오자마자 곧장 회사로 출근했다.
“혹시 제주도에 있었어요?”
그건 바로 사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제주도?”
“간 적 없어요?”
그때 봤던 건 분명 사자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자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지. 최근에.”
역시.
그때 봤던 건 사자가 맞았다.
“왜 갔는데요?”
“왜 갔겠어. 당연히 일이지.”
그렇다면 정말 뭐 그런 일인가.
어느 정도 짐작은 한 바였지만···.
“그때 보지 않았어요?”
“그때?”
“테마파크에서요. 저요.”
“아, 그래. 봤었지.”
사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촬영은 잘하고 왔고?”
“네, 뭐.”
“그때 좀 성가신 놈이 있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무사히 잘하고 왔다니 다행이야.”
역시나 뭔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구체적인 것까진 알고 싶지 않았고.
“그거 처리하느라고 내가 어찌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던지. 정말 밤낮이 없다니까.”
“그쪽은 관할 구역 같은 것도 없어요?”
“이쪽 일에 그런 인간의 체계성을 바라지 말아줘. 있으면 이 고생 안 했지.”
사자를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한눈에 알아봤네? 하긴, 인간 중에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 얼굴, 인간 중에 많아요.”
“······.”
그 말에 사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대로 날 잠시 쏘아보았다. 한눈에 알아본 건 당연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니.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가려고?”
“네. 오늘 용건은 끝났거든요.”
없는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오래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대답은 들었으니 나갈 생각이긴 했지만.
그런데 그때, 사자가 다시 말했다.
“그건 안 궁금해? 네 능력 부작용 관련.”
“그거 알아냈어요?”
“대충?”
알아냈다고?
정말?
“근데 왜 연락이 없어요?”
“내가 오늘 하려고 했어. 오늘. 근데 네가 이렇게 먼저 찾아온 거지.”
“그래서요. 원인은요?”
그리고 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세한 원인은 어쩔 수 없는 불명이야. 결국 ‘오프’로 인한 또 하나의 부작용인 셈이지. 오프가 길어질수록 네 몸에 무리가 가는 것과 비슷한.”
“결국은 그냥 부작용이라는 거잖아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는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어. 선례가 없으니 이렇게 새로 명목을 만드는 수밖에.”
돌고 돌아 결국 이 답인가.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들으니 허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 원인 모를 부작용이 늘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앞선 부작용은 사자 또한 예측하지 못했던 부작용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거 한두 개쯤 더 생긴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이것도 결국 적응의 문제니까.”
사자는 그렇게 말했다.
적응, 적응이라.
“그럼 정말 가볼게요.”
“그래.”
그와 동시에 사자의 모습 역시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홀로그램이 사라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지는 말고.”
사자는 그대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곧 마치 연기처럼 흐릿하게 모습이 사라졌다.
여전히 믿음직한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항상 대화를 하고 나면 찝찝한 구석만 남는 것 같았다.
‘결국 감수밖에 답이 없는 건가.’
하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면 결국 받아들이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래도 오프가 길어질 때처럼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괜찮았다.
지난번처럼 그런 일이 있다간 오해 받기 십상이었다. 그럼 팀에 민폐고.
‘역시 익숙해져야겠지.’
그 정도 인내는 가지고 있었다.
* * *
그리고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리팩과 관련한 걸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그 사이 우리의 리패키지 앨범 컴백 기사가 떴다.
[공식] IN 엔터테인먼트, “WINSOME, 오는 여름 첫 리패키지 앨범 발매 준비중.”
- 윈썸 리팩 앨범 준비중 기사뜸ㅠㅠ
- 제발 언능와줘 공백기 너무 힘들다
- 이번엔 좀 청량한 거 일려나?
- 이제 여름이니까 밝은 거 무조건 밝은 거 답답한 거 싫다ㅠ
- 윈썸 얘네 또 나와?
얼마 안 가, 이내 리팩 앨범의 컨셉 포토와 티저가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티저가 발표되는 날에는 그 날도 역시 거실에 있는 TV 앞에 모였다. 앞으로 5분 뒤에 나올 티저를 감상하기 위해.
“오늘은 이거 어때?”
“신상 팝콘?”
“엉. 새로 나왔더라.”
백은찬이 곧 새로 나왔다던 팝콘을 하나 꺼내 들었다. 단짠단짠으로 짠맛 팝콘과 단맛 팝콘이 섞여 들어있다고 한다.
“형,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얼른 뜯어요.”
“얼마나 남았는데?”
“앞으로 30초.”
안지호가 소파에 누워 시간을 확인했다.
[00 : 00]
그리고 정각이 되었을 때, 화면은 곧 암전이 되었다. 그 순간 멤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조금씩 밝아지는 화면.
쨍하니 비치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밝은 민트색 컬러의 트럭 한 대.
그렇게 이어지는 화면에는 멤버들의 모습이 한 명씩 빠르게 지나갔다.
[WINSOME (윈썸) - The 1st Album Repackage : ‘Blue Travel’ MV Teaser]
“오, 잘 나왔네.”
그대로 백은찬이 팝콘을 하나 집어 먹었다. 내가 보기에도 잘 나온 듯 싶었다. 분위기도 계절에 딱 맞는 것 같고.
“청량청량한 게 좋네요.”
“아무래도 이제 여름이니까.”
앞선 정규 앨범에서 조금 쎄고 강렬한 컨셉을 했으니 반대로 리팩엔 밝고 청량한 컨셉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에 따라 노래도 자연스럽게 이지리스닝곡. 경쾌한 신스 사운드가 가미된 팝 댄스곡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뮤직비디오 티저에 대한 반응은 곧바로 올라왔다.
- 윈썸 마린룩 개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