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정체를 들키지 말도록.
<가면 아래 가수>에는 연예인 판정단으로 구성된 몇몇 고정 패널들이 있었다.
판정단은 일부는 고정으로, 일부는 비고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고정 패널 중 한 명이 바로 신도하였다.
‘선곡 생각에 잠시 잊고 있었네.’
신도하의 고정 프로 중 하나였는데.
순간이지만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렇긴 해도 개인적으로 부딪힐 일은 크게 없지 않을까.’
일단 같이 방송을 한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참가자와 판정단의 입장이고, 프로그램 포맷상 딱히 마주할 기회도 없을 터였다.
이쪽은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이니까.
‘정체는···오래 숨기진 못할 것 같지만.’
그 부분이 좀 걸리긴 했다.
일단 안면이 있는 사이인 만큼 더 빨리 발각되긴 할 테니까.
그렇지만 어차피 최종 우승자가 결정될 때까지는 가면을 벗지 않을 테니 설령 빠르게 눈치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것이었다.
애초에 신도하 말고도 눈치를 채는 사람이 더 나올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 딱히 부딪힐 일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럭저럭 만족이었다.
‘높이 올라가는 것만 집중하면 되겠군.’
이왕 출연하게 된 거 꽤 높이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왕좌’를 목표로.
<가면 아래 가수>에서는 그 회 1등을 차지하게 된 출연자에게 ‘왕좌’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니 그룹 홍보를 위해서는 1등을 할 의무가 있었다. 이 프로는 나름 주말 황금 시간대 프로그램이었으니까.
홍보 측면에서 어느 정도 그 효과가 보장되어 있었다.
‘어서 선곡부터 생각해 봐야겠네.’
그리고 나는 선곡과 프로그램의 포인트이기도 한 가면의 선택을 위해 조금 더 서둘러 움직였다.
* * *
그리고 어느새 <가면 아래 가수>의 녹화날이 되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만큼 출연자들은 모두 개인 대기실을 사용했다.
개인 대기실은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적응이 안 됐다.
조용한 것도 그렇고.
‘이것도 생각보다 답답하네.’
가면.
여기에 가면도 되도록 착용하고 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좀 불편한 면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가면의 컨셉은 스노우맨.
흰색 눈사람 가면 위에 화려한 눈꽃들이 마치 왕관처럼 장식되어 있는 가면이었다.
가면의 이름은 ‘한 여름의 스노우맨’.
여기에 의상도 루즈한 아이보리색 니트. 마찬가지로 손에도 흰색 장갑을 꼈다.
“되도록 돌아다니지 말고 대기실에 있으라네. 이제 곧 스탠바이 들어간다고.”
“네.”
그래도 이제 곧 스탠바이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이어서 매니저 형이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을 그대로 조금 더 유심히 쳐다봤다.
“근데 가면 잘 어울리네. 반짝반짝해.”
“그래요?”
“응. 은찬이가 그렇게 화려한 걸 해야 한다고 하더니, 진짜 화려하네.”
이름이 스노우맨이긴 했으나, 정작 눈사람 얼굴보다는 얼굴 위로 반짝이는 눈꽃들이 더 눈에 띄었다. 사실 화려한 걸 하려던 게 아니긴 했는데 어쩌다보니 화려해졌다.
근데 백은찬의 말 대로 나쁠 건 없으니까.
지이이잉-
그때 테이블 위의 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여러 개의 메신저들이 연달아 띄워지고 있었다.
멤버들이었다.
[은차닝]
: 가면가수 잘 찍고 와랑
[은차닝]
: 이왕이면 1등 먹고 오길 바람
[하람]
: 형 부담 ㄴㄴ 그래도 세현이 형이 1등 할 것 같긴 하지만 (이모티콘)
[도운이 형]
: 편하게 하고 와 편하게 무리 말고
[선빈이]
: 끝나면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게.
[지호]
: 정체 들키지 마라
그걸 보니 조용했던 대기실이 조금은 시끌벅적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역시 개인 대기실보다는 단체 대기실이 낫다.
근데 정체는···아무래도 걸리는 게 있었다.
어쨌든 나는 빠르게 앞선 응원들에 대한 답을 보냈다. 내가 생각한 답은 결국 하나였다.
[우세현]
: 1등 하고 올게
그러자 앞서 ‘1’이 생기기도 전에 사라졌다. 모두 답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마침,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스텝의 안내가 있었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폰을 잠시 넣어둔 채, 반짝이는 눈사람 가면을 조금 더 고쳐 썼다.
* * *
김덕형은 지금 <가면 아래 가수> 녹화에 나와 있었다. 김덕형, 그는 요즘 한창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개그맨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는 이 <가면 아래 가수>의 연예인 판정단 중에서도 고정 패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출연자들이 나오려나.’
출연자들이 가면을 쓰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 포맷. 이러한 포맷 덕에 김덕형은 항상 기대감을 가지고 프로그램에 임했다.
평소 그는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기에.
여기에 가면 속 인물이 누군지 제 나름대로 추리하는 맛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안녕하세요. 도하 씨.”
그때 같은 패널인 신도하가 김덕형의 옆자리로 들어섰다. 고정 패널인 두 사람은 나란히 판정단의 중앙석에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근데 도하 씨. 오늘 안색이 평소보다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어제 늦게까지 뮤지컬 연습이 있었거든요.”
“아아. 어쩐지.”
그 말을 들은 김덕형이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그렇게 크게 티가 나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그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눈썰미가 좋을 뿐.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도하는 왠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미션곡 리스트나 다시 확인해볼까.’
그리고 김덕형은 제작진에게서 받은 1 round 미션곡 선곡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가면 아래 가수>는 총 2 Round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1 Round는 제작진이 선곡한 미션곡 경연,
2 Round는 본인의 개인 선곡 경연.
이렇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개인 선곡의 경우 자신에게 맞는 곡을 자유롭게 선곡하면 되지만, 미션곡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 미션곡이라고 하는 것은 제작진이 사전에 선곡해두었던 곡 8가지 중 한 가지를 출연자가 사전에 준비하는 것.
하지만 준비된 8가지 곡 중 어떤 곡을 할지에 대한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선택은 오직 ‘랜덤 뽑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해당 랜덤 뽑기는 제작진이 준비한 종이 중 하나를 선택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일단 미션곡이 겹치는 일은 없다는 거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곡 자체에 있었다.
잘못 골랐다가는 음역대가 전혀 맞지 않다거나, 자신의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곡을 고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거였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도 좋은 노래를 보여준다라는 게 이 미션곡의 취지이기는 했다. 단지 출연자들 입장에선 죽어날 뿐이지.
‘뭐, 그래서 다들 편곡을 하는 편이니까.’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편곡을 꽤 하는 편이긴 했다. 물론 많은 편곡 없이 원곡 분위기를 살리는 경우도 많았고.
그렇기에 이번엔 어떠한 미션곡들이 있는가 잠시 그 리스트를 살피고 있는데, 순간 그는 어떠한 곡 하나에 시선이 멈추었다.
‘해밀.’
그건 바로 ‘해밀’이라는 곡이었다.
“해밀. 이거 어렵겠네요.”
옆에 있던 신도하가 문득 중얼거렸다.
신도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앞서 선곡 리스트를 확인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밀’.
이 곡은 느린 템포의 감성적인 발라드곡으로 인연의 헤어짐을 비가 오는 하늘의 빗댄 내용이었다.
이 곡은 약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름 최신곡이었다.
‘이 노래, 일단 굉장히 좋긴 하지.’
음원 차트 일간 1위까지도 찍었던 곡이니까. 그렇기에 꽤나 인지도가 있었다. 아마 반주만으로도 여기 있는 모두가 알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렵지.’
이 곡은 결정적으로 남녀의 듀엣곡이었다.그 탓에 아마 혼자서 이 곡을 수월하기는 여간 쉽지 않을 터였다.
“이거 걸린 사람은 꽤 고생했겠는데요. 제작진도 참. 꼭 이런 어려운 걸 하나씩 넣어둔다니까.”
“그러게요.”
가끔씩 후보곡 중 저건 좀 힘들 것 같다고 생각되는 곡들을 제작진은 이렇게 넣어두곤 했다.
하지만 이는 철저한 랜덤 뽑기이니 결국 그게 걸린다고 해도 뽑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거다. 안타깝게도.
“원곡을 살리는 건 힘들 테니 아마 다른 방향으로 편곡을 했을 지도요.”
“그래도 이건 크게 편곡하는 것도 꽤 위험할 것 같긴 한데······.”
김덕형이 그대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원곡 느낌 대신 새로운 방향을 살린답시고 새롭게 편곡하기에는 원곡 자체가 워낙 강렬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잘못된 편곡 방향은 그대로 제 발목을 잡는 수가 있었다.
“그래도 잘 살린다면 아마 좋은 점수를 받을 것 같은데요. 워낙 곡이 좋잖아요.”
“그렇겠죠. 그런 의미에서 기대가 되네요.”
그리고 신도하는 그대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찬가지로 김덕형 역시 이에 대해선 꽤나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니 좀 실력자가 했으면 싶은데.’
실력이 애매하다면, 아마 애매한 무대로 끝이 날 테니까. 사실 이건 어느 곡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아, 이제 시작하려나 보네요.”
그 말에 김덕형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무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무대 위로는 이내 휘황찬란한 가면들을 쓴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알쏭달쏭 음악쇼! <가면 아래의 가수>! 어느새 벌써 5번째 참가자 차례인데요~]
그렇게 시작된 촬영.
원활하게 진행된 촬영은 어느새 5번째 참가자를 맞이할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번엔 다들 꽤 괜찮네.’
앞서 있던 네 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실력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랜덤으로 뽑은 선곡들도 모두 꽤 편곡했고.
‘근데 첫 번째는 아이돌 같았는데······.’
뭔가 느낌이 아이돌 그룹의 보컬을 하는 친구 같았다. 물론 정확히 감이 잡히는 인물은 없었지만.
“도하 씨, 아까 첫 친구는 왠지 아이돌 같지 않았어요?”
“그런 느낌이 있었죠.”
“그렇죠? 역시?”
“네.”
신도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통 한 회 촬영마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은 꼭 한 명씩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그럴 것이라 김덕형은 확신했다.
[그럼 지금 바로 5번째 출연자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5번째 출연자, 바로 ‘한 여름의 스노우맨’입니다!]
그리고 나온 5번째 출연자.
그렇게 무대 위로 등장한 5번째 출연자는 화려한 눈꽃이 새겨진 반짝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이 꽤 화려하네.’
거기에 가면도 가면이지만, 슬렌더한 체형에 키도 좀 있었다. 풍겨오는 분위기가 왠지 가려진 가면 뒤에 잘생긴 미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또 아이돌인가?’
아니면 배우?
그렇게 김덕형이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추측을 할 사이, 어느새 무대 위로는 출연자의 미션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익숙한 피아노 반주.
‘어? 이거?’
반주를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곡이 ‘해밀’이라는 것을.
동시에 김덕형은 곧바로 앞서 보이는 무대에 집중했다.
[회색빛 하늘 안에서는]
[당신이 보이지 않아요]
[겹겹이 쌓인 구름은]
[마치 단단한 벽과 같죠]
속삭이듯이 조용히 울리는 그 음색은 그야말로 소름끼치도록 좋았다.
마치 가사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읊으며, 그 안에 작은 숨소리마저도 가사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감성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인 이 곡을 ‘한 여름의 스노우맨’은 첫 소절부터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고요한 이 하늘 속에는]
[누구도 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비가 또 내리네요.]
경연에 맞는 마땅한 고음도 없이, 잔잔하게만 흘러가는 이 곡을 앞선 ‘한 여름의 스노우맨’은 매력적인 음색과 감정, 그리고 집중되는 성량으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덕형 역시 그러한 무대에 숨을 죽인 채로 한껏 집중했다.
‘이거 완전 미쳤잖아······.’
동시에 그는 그렇게 앞서 ‘한 여름의 스노우맨’이 보여 주고 있는 노래에 끊임없이 감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