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기회는 놓치지 않는 주의라.
─ 이 새X, 이거 분명 알고 한 거야.
전화 너머로 형이 말했다.
“뭘 알고 하는데?”
─ 당연히 출연자 리스트 미리 다 스캔 하고 나서 한 거겠지. 순전히 PD 요청으로만 펑크를 메꿔 준다는 게 말이 안 돼.
어, 그건 그럴 수도 있는데 그것보다 출연하기 전에 출연자 리스트를 확인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무엇보다 멘토, 멘티 프로그램인데.
─ 아, 이 얍삽한 새X.
형은 그렇게 여전히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PD님이 급하게 연락이 오셨더라고.”
그와 동시에 신도하가 갓 사온 커피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그대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이를 받아들였다.
“출연자 하나가 펑크가 났는데, 혹시 출연 생각 없냐고. 그래서 선뜻 하겠다고 했지. 하 PD님이랑은 루트 때부터 인연이 있어서.”
대충 인맥으로 어떻게 어떻게 채웠다는 거군. 그보다도 신도하의 스케줄이 비어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래도 용케 시간이 되셨네요.”
“안 되도 내야지. 이게 어떤 기회인데.”
“기회요?”
“듀엣 무대. 너랑 같이 노래 부를 수 있잖아.”
그런 말을 선뜻 잘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듀엣 무대와 관련된 얘기를 하긴 했었지.
“기회는 원래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잖아?”
“······네. 그렇죠.”
“그래. 내가 원래 원하는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 주의라서.”
굳이 그렇게 힘주어 말할 필요까진 없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긴 하나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일단은 선곡을 뭘로 할지 그것부터 이야기해볼까?”
“네. 그러시죠.”
그리고 선곡 회의에 들어갔다.
사전 미팅을 끝낸 뒤, 신도하와 둘이서 따로 마련한 자리였다.
다만, 오늘은 어디까지나 간략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후보군을 정해두고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일단 음역대나 장르를 고려해야겠지.’
혼자 부르는 게 아니니 아무래도 상대 음역대 같은 걸 고려를 해봐야 하고, 둘 모두에게 어울리는 장르를 고르는 게 중요했다.
“음역대는 상관없어. 너 편할 대로 해.”
“그래도 보통 부르기 편하신 게 있지 않나요?”
“웬만하면 다 가능해서.”
다 가능한 거냐.
엄청난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동시에 부럽기도 하고.
“그래도 제게만 맞출 수는 없으니 선배님이 원하시는 선곡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조율해서 정하도록 하죠.”
“난 세현이 너한테 맞출 생각이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이쪽만 유리하게 나갈 생각 없다.
결국 듀엣 무대이니 같이 해결해야지.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신도하는 어떠한 곡이든 잘 소화해낼 것 같다만.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곡은 촬영날까지 각자 1~2개씩 정해서 가져오는 걸로.”
“네. 좋아요.”
그리고 그대로 슬슬 정리가 되는 분위기라 남아 있는 커피를 이내 마시려고 하는데, 그 순간 앞에 있던 신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참, 마음에 드네.”
“······뭐가요?”
“보통은 선배가 배려를 해준다고 하면 냉큼 먹지 않나. 어차피 여긴 카메라도 없는데.”
당연한 걸 가지고 별걸 다 마음에 든다고 한다.
“멘토 분과 상의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당연하지만 당연한 게 아니지. 받은 배려로 어떻게든 이득을 취하려는 이가 널린 판국에.”
그리고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럼 촬영날 보자, 세현아.”
“네. 선배님.”
“아, 그리고 맛있어?”
“? 뭐가요?”
“내가 사온 커피.”
아, 맛있긴 맛있었다.
내가 딱 좋아하는 맛이라.
그리고 그렇다고 말하니 이내 신도하가 만족스럽단 얼굴을 보였다.
“왠지 좋아할 것 같았어. 다음에도 같은 걸로 사줄게.”
다음에도···이 맛이면 좋긴 하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뒤, 선곡이 정해졌다.
그리고 이 선곡이 정해지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카메라가 함께였다.
“그럼 이 곡으로 하는 걸로 하죠.”
“네. 저도 좋습니다.”
그렇게 고르게 된 곡은 남자 솔로인 비운의 ‘겨울이 담아낸 봄’이라는 곡이었다. 이는 아련한 분위기의 R&B 팝 장르였다.
이는 생각해온 선곡 후보 중 유일하게 겹치는 곡이었다. 신도하도 이걸 후보로 생각해왔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부터 죽이 잘 맞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카메라가 바로 옆에서 돌아가고 있었기에.
“느낌이 좋은 게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하이파이브 한번 할까?”
갑분 하이파이브였다.
하지만 흐름상 나쁘지 않은 흐름이니 일단 그대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신도하와 자연스럽게 손이 마주쳐졌다.
이후에는 스튜디오 촬영이 한번 있었다. 이는 출연진들이 모두 모여 잠깐의 소개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세현 씨.”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화준과도 만났다. 멘티들은 전부 한 대기실이었기 때문에. 귀찮다.
“세현 씨는 당연히 노래시죠?”
“화준 씨는 당연히 춤이시겠네요.”
“아, 네. 전 당연히 춤이죠.”
[“먼저 답 안 하는 거 봐라.”]
그렇지, 묻기 전엔 먼저 까라고.
사실 숨겨도 나한텐 그닥 상관없긴 하지만, 어쨌건 이화준은 당연하게도 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도하 선배님이 멘토시죠?”
“네. 맞습니다.”
“부럽네요. 아, 제가 워낙 루트 팬이었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이화준이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지난번 <승부의 아이돌> 출연 당시, 루트로 인해 RA 엔터에 들어가게 되었다라고 직접 밝힌 바가 있었다.
그때 ‘루트’라는 단어를 언급할 당시 묘하게 나와 시선이 얽혔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저도 도하 선배님이랑 해보고 싶긴 했는데, 아무래도 춤이다보니 기회가 좀처럼 오지를 않네요.”
“다음엔 노래로 한번 해보시죠.”
“노래도 못하는 편이 아니긴 하죠, 제가.”
그렇게 이화준은 꽤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다. 그냥 춤이나 열심히 추라는 의미에서 별 생각 없이 말한 건데 이상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근데 도하 선배님과는···음, 아뇨.”
와중에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아무래도 주변 눈을 의식한 듯 했다.
‘신도하 관련인 것 같은데, 굳이 장소를 가리는 걸 보니 좋은 말은 아니겠군.’
그러니 나 역시 굳이 캐려하지 않았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그보다 지호는 잘 지내나요? 요즘 통 연락을 못 해봤네요.”
역시 이 자식은 사람 거슬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애초에 안지호의 연락처를 알 리가 없었다. 설령 알았어도 하지 않았을 테고.
아니, 안지호가 이미 차단했으려나.
“네.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요즘에 워낙 바쁘시잖아요. 그래서 안부가 궁금하고 그러네요. 지호한테 안부 한번 전해주시죠.”
“잘 전달해드릴 테니 굳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응. 안지호 예능 찍으러 갔어.
TV로 확인해.
“어쨌든 그럼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화준과 형식적인 악수를 나눴다. 당연히 서로 멀끔하게 웃는 얼굴로.
* * *
이어서 앞과 다른 또 다른 대기실.
그곳엔 멘토 역할을 맡은 출연자들이 수를 나누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신도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신도하는 오늘 꽤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재밌는 방송이 될 것 같아서.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러던 도중, 대기실 근처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이화준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혹시나 다른 얼굴이 아닐까 기대를 했던 바였다.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신도하 역시 인사를 건넸다.
이화준과는 지난 방송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고, 그렇기에 얼굴 정도는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편이었다.
“선배님, 말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천천히 할게요.”
“네.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존댓말은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에 좋았다. 그래서 되도록 후배들에게도 말을 놓지 않고 있었고.
“이번에도 같이 방송을 하게 돼서 엄청 기대를 했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래 루트의 굉장한 팬이었거든요.”
“최애는 누구였는데요?”
“당연히 도하 선배님이시죠.”
그 말에 신도하는 말없이 웃었다. 겉치레 섞인 말은 금방 구분할 수 있었던 터라.
그렇지만 사실 앞선 이화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별로 관심 없었다.
“그래서 선배님과 멘토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선배님도 좀 불편하시겠어요.”
불편?
이에 의문을 보이자 이화준이 곧 아까보다 목소리를 조금 낮춘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불편한 사람이···멘티니까요.”
아아. 그 말이었군.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좀 더 편한 사람이랑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갑자기 출연하게 되신 거라 들었는데, 그래서 배정이 좀 그랬나 봐요.”
이화준이 그대로 미간을 살짝 좁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에 신도하는 여전히 앞과 같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팔짱을 꼈다.
“편한 사람이라···지금도 상당히 편한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그냥 말을 했네요.”
“화준 씨가 보기엔, 안 친해 보이나요?”
“네? 아, 선배님이랑 우세현 씨요?”
이에 신도하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자 이화준은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불편한 사이 아닌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마치 당연한 말을 물은 듯한 말투.
오히려 이화준의 입장에선 신도하가 왜 이런 걸 묻나 싶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두 사람이 친하다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기에.
“그러니 선배님이 이기실 겁니다.”
“이긴다라.”
“예. 선배님이 훨씬 잘하시니까요. 우세현 씨는 솔직히 포장 빨이 좀 있죠.”
이화준이 확신에 찬 얼굴로 강조하며 말했다. 신도하 역시 이에 동조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이에 신도하는 조용히 침묵한 채로 여전히 그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입을 뗐다.
“아닌데.”
“네?”
뭐지?
뭐가 아니라는 거지?
예상 못한 대답에 이화준은 그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가 앞서 말한 것들 중 분명 아니라고 부정할 만한 사실은 없었기에.
그리고 그런 이화준을 향해 신도하는 다시 한번 빙긋 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제대로 못 알아 들었나 보네요. 안 친한 사이 아니라는 말이었어요.”
“······네?”
“안 친한 거 아니고, 내가 좀 아껴. 우세현 씨를.”
그 순간 들리는 딱딱한 표정과 말투에, 이화준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강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