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쉽게 가는 게 제일이지.
체이스 측에서도 이번 커버곡으로 우리와 같은 온스(ONS)의 ‘Kingdom’을 선곡했다.
같은 그룹, 와중에 같은 곡.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체이스의 선곡 소식이 전해진 뒤로 다시 한번 이와 관련해 회의에 들어갔다. 커버곡을 같은 곡으로 한 전례는 없으니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왜 하필 같은 곡이야? 아무리 봐도 이거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가 막히지 않냐?”
“우리 쪽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했단 거예요?”
“누가 먼저 선곡했는지 모르는 이상,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긴 해.”
도운이 형 말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땐 그렇다. 누가 더 먼저라는 걸 알 수 없는 이상, 뭐든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체이스가 먼저 알았다는 걸 가정했을 때도 모순되는 부분은 생긴다.
‘이쪽이 킹덤을 선곡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도 똑같이 킹덤을 선곡한다?’
이건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기에.
이러한 점은 오히려 우리 쪽 정보가 새어 나간 게 아닐까라는 의문만 들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저쪽으로서도 손해고. 어떻게 봐도 선곡을 겹치게 함으로써 저쪽이 얻을 만한 이득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곡을 선택한 것이 단순히 우연일까 생각하면, 확실히 미심쩍다.
‘정보가 새어나가는 루트가 있는 걸지도.’
결국 그러한 방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찌됐건 지금 중요한 건 굳이 왜 같은 곡을 선택 했는가였다.
“그래서 일단 조율하는 거예요?”
“회사 입장에선 그렇지. 같은 곡을 커버하기엔 좀 그러니까.”
“그럼 누가 이 곡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자 도운이 형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체이스가 선배니까······.”
“체이스가 선배니까 체이스가 하는 방향으로 간다고요?”
“아, 잠깐만요.”
와중에 연차라는 산이 있었다.
겨우 1년 차이긴 하지만, 이 1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1년이었다.
‘분명 이런 점도 염두에 둔 거겠지. 이럴 경우 위치상 후배인 우리 쪽이 포기할 수밖에 없으니까.’
확실히 보기엔 그게 가장 낫긴 했다.
서바이벌 프로도 아니고 이 곡을 두고 대결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이 X끼들 분명 백퍼 노린 게 확실한데.’
막상 곡을 포기하려니 짜증이 일었다.
사실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양쪽 다 이 곡을 포기하는 것.
그러한 측면도 제안을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결론은 동일했다. 결국 우리는 이 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후보군을 빠르게 찾는 게 더 나은 방법 일지도.’
어떻게 되든 결론이 같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시간 낭비 없이 더 이로운 방법일지도 몰랐다.
“X나 열받게 하는 X끼들.”
방금 한 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안지호가 한 말이었다.
근데 오늘따라 절실하게 공감이 가네.
물론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이 곡은 이대로 마냥 포기하기 아쉬우니 회사를 통해 최대한 조율을 해보기로 했다.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았다만.
“안녕하세요.”
그러던 도중, 우연히 방송국 로비에서 마주치게 됐다. 체이스의 명우진과 이화준을.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와중에 차분히 인사를 걸고 있었다.
그럴수록 환하게 웃어주었다.
오늘따라 먹이고 싶은 면짝이다.
“커버 무대는 잘 준비하고 계신가요?”
“네.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체이스 분들은 잘 준비하고 계신가요?”
“네. 저희도 잘하고 있습니다.”
이화준이 웃으며 답했다.
다짜고짜 커버 무대 진행 사항부터 묻는 게 멕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킹덤, 노래 좋죠. 그래서 처음에 같은 곡을 골랐다고 했을 때 놀랐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고요.”
고민 안 한 거 다 안다.
“아직 조율 중이라고 들었는데, 솔직히 저희는 양보 생각도 있습니다.”
“양보요?”
“네. 아무래도 후배님들한테 양보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니까요.”
이건 또 뭔 X 수작이지.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같은 곡을 고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근데 저희는 또 마지막 커버 무대일 지도 모르니까요. 그걸 생각하면, 역시 포기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일반적으로 연말 공연 커버 무대의 경우, 1~2년 차의 신인들이 주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3년 차인 체이스는 아마도 내년엔 커버 공연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마지막이니 넘기라 이거냐.’
하지만 저쪽은 이미 자신들에게 넘길 결 아는 마냥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귀찮군.’
말로 이러쿵저러쿵.
양보니 뭐니 어쭙잖은 말로 의도를 파악하고 저울질해대는 것을 보는 것도 이 시점에선 이제 다 귀찮아졌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쉽게 가는 길이 제일이다. 의도가 뭐든,
‘들으면 그만이지.’
귀찮게 대가리 굴리는 것 없이.
[현재 상태 : ON]
* * *
연말 시상식이 얼마 안 남은 시점.
체이스 역시 연말 시상식의 준비 과정에 있었다.
이번 시상식에서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방송국으로부터 커버 무대를 하나 준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커버곡 TEM1의 ‘Soldier(솔져)’ 어때. 이 곡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솔져 괜찮죠. 춤 보여주기도 좋고. 컨셉도 확실하잖아요.”
“아, 근데 그거 보컬 분량 적죠?”
“노래가 좀 적긴 하지. 그래도 뒤에 가면 확실하게 지르는 파트 있어.”
“그럼 됐어요.”
메인 보컬 하민제가 그제서야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는 보컬에 특화된 그룹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컬이 약한 건 아니었으나 보컬보단 확실히 춤에 강했다.
커버곡 이야기로 나온 TEM1의 ‘Soldier’ 역시 보컬보다는 퍼포먼스적으로 보여주기 좋은 곡이었다.
애초에 커버곡이란 것이 보컬보단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중점이었기에 적절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던 도중, 얘기가 들려왔다. 윈썸이 온스(ONS)의 ‘Kingdom’을 커버할 거란 이야기가.
“온스의 킹덤? 와, 이건 몰랐네.”
“킹덤을 어떻게 생각했지? 이거 노래 엄청 좋은데.”
온스의 킹덤이라는 선택지는 생각해본 적 없던 것이었다.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명곡이라 칭해질 정도로 유명 곡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선곡 회의 당시엔 떠오르지 않았었다.
“무대, 멋있겠는데.”
명우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컨셉 확실하고, 노래 좋고, 안무 좋고.
커버를 하기에도 적절했다.
아마 완벽하게 무대를 해낸다면, 두고두고 회자될 만했다.
“쟤네는 맨날 이런 선곡은 어떻게 하는 거야? 작년에도 뜬금없는 곡 선곡해오더니 그걸로 조회수 제대로 폭발했잖아요.”
“회사에서 정해주는 거겠지. IN 엔터 쪽에서 무대 쪽에 하나하나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인데.”
작년부터 이상하게 선곡이 기발했다.
자신들의 선곡 또한 결코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윈썸의 선곡에 비하면 확실히 어딘가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아, 짜증 나네.”
이화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대로 머리를 쓸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선곡’ 하나가 주는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선곡’은 그만큼 중요했다.
또한, 지금 이곳에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짜증이 났다.
“···이거, 태클 좀 거는 건 어때요.”
“태클?”
이화준이 뜬금없이 제안을 해왔다.
자신들 역시 같은 곡으로 하게 됐다 전하고 이로 인해 조율을 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조율이요? 형, 이 곡 하고 싶어요?”
“곡이야 탐이 나지. 하지만 이 곡을 할 생각은 없어.”
곡이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 곡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앞서 정한 ‘Soldier’가 자신들에게 더 맞기도 했고.
그에 비해 ‘Kingdom’은 은근 보컬이 많이 가미된 곡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Soldier’ 쪽으로 가는 게 맞았다.
“근데 조율을 하게 되면 무조건 저쪽이 한 발 빼게 되어 있잖아.”
“아. 그렇군.”
그 말에 명우진은 곧바로 이화준의 말의 의도를 파악했다. 반면, 하민제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요? 뭔데요?”
“못 하게 만들자는 거지. 이 곡을.”
“못 하게요? 어떻게요?”
“같은 곡을 골랐다는 걸 명분으로 조율을 하면, 어디까지나 후배 입장인 저쪽이 양보를 할 가능성이 높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윈썸은 이 곡을 포기하게 된다, 이거죠?”
“맞아.”
앞선 손태하의 말에 명우진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그대로였다.
“그럼 결국 저쪽에선 어쩔 수 없이 다른 곡을 고를 수밖에 없단 거지.”
“근데 그럼 결국 우리가 ‘Kingdom’을 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지. 저쪽에서 발을 빼면, 나중에 가서 이쪽도 말을 바꾸는 거지. 적절한 명분을 대면서.”
한 마디로 터뜨리기 작전이었다.
‘Kingdom’이란 곡을.
“괜찮은 것 같긴 한데, 귀찮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겨우 커버곡 무대인데.”
“겨우 커버곡이 아니지. 연말에 화제성 큰 무대 중 하나가 바로 커버곡 무대인데.”
게다가 한번 흥한다면, 그대로 조회수를 먹고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일단 원곡 자체가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흥한 곡이었기에.
“분명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이런 건 확실히 위아래가 있는 법이잖아요.”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기에 체이스는 확신했다. 분명 윈썸 측은 결국 이 곡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러니 곧 포기하겠지.’
그렇게 이화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화준을 우세현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곡이 너무 좋잖아요. 이렇게 겹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포기하는 것도 당연히 쉽지 않고요.”
겹치는 것도, 포기한다는 것도 전부 거짓에 불과했지만 어차피 그런 사실 따위 알 리가 없었다.
너 새X가 무슨 수로 알아.
생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이화준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대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죠.”
“네. 그렇죠.”
이제 남은 건 먼저 포기하겠다는,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이것 외의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예?”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우세현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류의 대답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지금 시점에선 절대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뜬금없는 그 말은 이화준을 순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 뭘···.”
“같은 곡 할래요?”
“예?”
···같은 곡?
지금 같은 곡으로 커버 무대를 하자고?
황당한 그 말에 이화준은 그저 앞선 우세현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그룹이 같은 곡으로 선보이는 것도 충분히 할 만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런 경우가 워낙 흔치 않으니까요.”
“어, 재밌···기야 하겠죠. 근데 당연히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일단 방송국에도 이야기를 해야 하고, 또 쉽게 허락할지도···.”
“그건 해봐야 아는 거죠. 혹시 또 모르잖아요. 의외로 쉽게 오케이 해주실지.”
그 말과 동시에 우세현은 이화준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티 한 점 없이 정말로 환하게. 정말로 말끔한 미소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게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우세현을 본 이화준은 그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X끼 이거···또라이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