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오늘의 MC입니다.
“그래서, SBC 연말 가요제 MC를 맡게 됐다고?”
“응.”
앞선 형의 물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창 바쁜 스케줄이지만, 오늘은 잠깐 짬을 내어 형의 집에 들렀다.
“그래서, 박시겸이랑 같은 MC고?”
“응.”
그러자 형이 다시 한번 인상을 구겼다. 이미 전화를 통해 전달한 바가 있긴 한데, 그때랑 다를 것 없는 반응이었다.
SBC 연말 가요제의 MC는 모두 3명이었다. 나와 박시겸, 여기에 걸그룹 출신이자 현재는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한다연. 이렇게 3명이었다.
이중 연차가 가장 높은 건 박시겸이었고, 그 다음은 한다연였다. 마지막은 나였고.
“그 자식하곤 되도록 말 안 섞는 게 좋아. 괜히 피곤해지니까.”
“애초에 박시겸 선배 쪽에서 불필요한 말은 안 할 것 같은데.”
“하는 말이라곤 재수 없는 딱딱한 말뿐이긴 하지.”
형이 그렇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혹시 X랄 해도 한 귀로 흘리고.”
“걱정할 거 없어. 알아서 필터링할 테니.”
박시겸이랑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전을 생각해보면, 적당히 할 일만 하면 그렇게 크게 부딪힐 일도 없을 것 같다.
“아, 그리고 보니 형. 예전에 박시겸 선배랑 나 관련해서 얘기한 적 있었어?”
“무슨 소리야?”
“처음 만났을 때 그러던데. 형한테 나 연기시키라고 했다고.”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형이 곧 다시 한번 인상을 구겼다.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응.”
그렇게 대답을 듣자 형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반응을 보니 정말로 있었던 일인가.
“뭘 그렇게 심각해? 그냥 별말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됐어. 별말 아닌 거 맞으니까 굳이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하면 더 신경 쓰이는데.
뭐, 지금으로써는 별말 아닌 게 맞으니 형의 말대로 그냥 그러려니했다.
“그것보다 형도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딜.”
“시상식.”
형도 마찬가지로 연기 관련해서 올해 연말 시상식에 나가게 됐다. <시간 감지자>로.
사실 <시간 감지자>의 방송국인 TNC는 공중파가 아니기에 시상식을 진행하지 않지만, 올해는 몇 주년 기념으로 자체적으로 특별 시상식을 열게 되었다.
“그거 날짜가 28일이었던가?”
“응. 너 어차피 못 봐. 겹쳐.”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네.
이왕이면 상 받는 거 보고 싶었는데.
화제성도 있고 시청률도 잘 나온 만큼 일단 상은 확실했다.
‘근데 거기 박시겸도 나가지 않나.’
박시겸 역시 올해 TNC 드라마를 찍었다. 우리가 특별 출연하기도 했던 <목소리를 찾아가세요.>
물론 화제성이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젊은 층에서 소소하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니 TNC 쪽에서도 뭐라도 줄 것 같고.
‘···가면 형이랑 만나려나.’
물론 아직 박시겸의 참석 여부는 모르지만, 굳이 빠질 이유는 없었기에 아무래도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순간, 형이 무릎을 쳤다.
“아, 맞아. 그리고 봤다.”
“뭘?”
“수상 소감.”
아, 그거 본 건가.
앞서 Y-NET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 한 걸 말하는 거였다. 사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거긴 한데, 막상 봤다고 하니 좀···그랬다.
“왜? 쑥스러?”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상 탔다고 엄청 자랑하던데. 트로피를 이렇게 들고-”
“그 얘기는 그만하자.”
“형, 나 상···.”
그만하라고, 형님아!
그대로 조잘대는 형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웅얼대는 건 여전했다. 이놈의 입!
다음엔 좀 더 신중하도록 하자.
···물론 언급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그리고 그 뒤로도 형이 계속해서 나불대는 바람에 끊임없이 나불대는 형의 입을 계속해서 몇 번 더 틀어막아야만 했다.
* * *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흘러 SBC 연말 가요제 당일이 되었다. MC이다 보니 평소와 달리 사용할 수 있는 대기실이 하나 더 늘었다.
그룹 대기실과 더불어 MC만이 쓸 수 있는 대기실이 따로 하나 더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무대도 준비를 해야 했기에 MC 대기실의 경우, 시작 전이나 중간에 MC 관련으로 올라가기 전 잠깐 들리는 용도로 사용됐다.
‘어색하네.’
그리고 그 대기실엔 지금 박시겸과 나, 이렇게 둘 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작 전에 한번 모이기로 했는데, 같이 MC를 맡은 한다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박시겸에게는 들어오면서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는 건 당연히 짧은 한마디뿐이었지만.
“그래.”
단답식 대답은 여전했다.
그렇게 박시겸은 한동안 말없이 대본만을 응시했다. 어색하긴 했지만 차라리 그게 편하기도 했다. 괜히 기운 뺄 일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박시겸을 딱히 방해할 생각도 없어서 나 역시 대본 점검을 하고자 했는데, 그와 동시에 대기실 문이 열렸다.
“두 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PD님.”
오늘 SBC 가요제전 담당 조연출이었다.
올라가기 전, 사전 점검 차 나온 듯 했다.
“한다연 씨는 아직 인 거죠?”
“네. 아직 안 오셨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이제 곧 오실 것 같고, 근데 오늘 두 분 다 멋지시네요.”
조연출이 그대로 나와 박시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박시겸이 웃으며 감사하다 전했다.
“시겸 씨가 세현 씨를 추천한 이유가 있었네요. 아주 반짝반짝해요.”
···박시겸이 MC에 나를 추천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추천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의견을 말한 것뿐이니까요.”
“그 의견, 아주 좋은 의견이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조연출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정말로 박시겸의 의견이 작게라도 반영된 건 맞나본데.
[“처음에 체이스랑 윈썸 이야기를 나왔을 때 당연히 체이스를 선택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니 확실히 윈썸 쪽이 좋네.”]
‘우리와 체이스를 두고 저울질을 했군.’
아무래도 MC 후보군으로 우리와 함께 체이스가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시겸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돼 결과적으로 내게 자리가 온 거고.
그렇다면, 박시겸이 만약 체이스 쪽에 손을 들었다면 그쪽이 MC가 됐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굳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앞서 조연출의 생각처럼 체이스를 선택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나를 고른 거 보면 이유가 있을 텐데 문제는 짚이는 게 없었다.
어차피 체이스나 나나 친분이 없는 건 매한가지고. 그나마 안면이 있는 인물을 선택했다고 하기엔 박시겸은 그런 걸 따질 성격이 아니다.
“그럼 오늘 두 분 다 잘 부탁드려요.”
조연출이 그대로 바쁘게 대기실을 나섰다. 조연출이 나가자 대기실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 박시겸이 또 다시 대본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에 대기실 안엔 오직 대본 넘기는 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MC 자리 추천 건에 관해 신경이 쓰이긴 했다만, 선뜻 묻기 쉽지 않았다. 애초에 솔직하게 답해줄지도 의문이고.
“권해진.”
그런데 그때, 내내 조용하던 박시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런 박시겸을 바라봤다.
갑자기 권해진?
“그 형이 뭘 하든 반응할 필요 없어. 그 인간은 단지 오는 반응이 재밌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대본을 향한 채였다. 이건 예상 못한 말인데. ···그러니까 이게 지금 조언인가?
“전에 우연히 들어서 말이야. 라디오.”
“아, 그렇군요.”
권해진의 빛나는 라디오.
그 라디오를 얘기하는 거였군.
이전 활동 때 나갔던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렇다면 중간에 형이 난입을 한 것도 알고 있겠네. 아니, 생각해보니 그럼 다른 것보다 그 애교를 본···아니. 괜한 생각 말자.
“일일이 신경 써봤자 좋을 게 없어.”
“네. 감사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해주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차피 권해진이 그렇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딱히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권해진은, 정말 답이 없다.
“그런데 신도하랑은 아직도 자주 연락을 하는 건가?”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이 권해진에서 신도하로 튀었다. 와중에 왜인지 모르게 신도하와 내가 연락을 자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빈번한 편은 아닙니다만···.”
“원래 예전부터 신도하가 그쪽으론 미쳐있어서 말이야.”
“네?”
“흔히 노래에 미쳤다고들 하지.”
아. 그 말이었군.
얼핏 봐도 그래 보이긴 했다.
“노래에 관련된 거면 다 좋아해. 특히 노래 잘하는 사람은 더 좋아하고. 그래서 너한테 더 호의적인 걸 테지.”
그간 좀 과하게 호의적이긴 했다.
다만, 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볼 때마다 이어지는 무대 칭찬에, 듀엣이니 뭐니 노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항상 하는데 모를 수도 있나. 그래서 얼추 그럴 거라 짐작했던 바였다.
···그래도 신도하에게 듣는 무대 칭찬이 나쁘지는 않아서. 하지만 말을 듣고 보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노래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근데 앞선 말은 박시겸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의미 같은데.
“사실 신도하는 권해진보다 더 답이 없어. 한번 좋아하기 시작한 건 쉽게 놓치지 않거든. 네가 음치라도 되지 않는 이상.”
[“아니, 꼴을 보면 사실 음치가 되도 좋아할 것 같지만.”]
그건 좀 무서운 말인데.
와중에 친절하게도 뒷말은 생략하는군.
근데 앞뒤가 좀 안 맞지 않나.
노래를 잘하니까 호의적인 거라며.
음치가 되어도 그럴 거란 말은 다소 모순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건 왜죠?”
사실 앞선 이야기들은 굳이 내게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는 말들이었다. 박시겸 답지 않은 과한 친절.
그리고 그런 내 물음에 박시겸은 그대로 잠시 침묵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한때 같은 멤버로서 안타까워하는 말이야. 흔한 선배의 아량 정도로 생각해둬.”
선배의 아량인가.
어떠한 측면에서는 박시겸도 신도하와 비슷했다. 굳이 나를 MC로 선택한 거 하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 하며.
‘한때 같은 멤버.’
어쩌면 정말로 같은 멤버였기에 이런 말을 해주는 걸지도 몰랐다. 단순히 아는 선배나 후배에 불과했다면, 입을 다물었을지도.
“어쨌건 오늘 각자 맡은 바는 알아서 확실하게 하자. 내가 MC에 너에 대한 의견을 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니까.”
한 마디로 신경 거슬리지 않고 알아서 할 것 같아서 추천했다는 얘기군.
하지만 무슨 이유던 결국 MC를 하게 된 건 이득이니 상관없었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박시겸 역시 맡은 바는 확실하게 할 테니 오히려 편했다.
결국 나만 알아서 잘하면 된다는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때, 문이 한번 더 열리며 오늘 MC를 함께 맡을 한다연이 들어왔다. 슬슬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해야만 했다.
* * *
오프닝 무대가 시작되었다.
이에 준비되어 있던 MC석에서 앞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가 끝난 후, 그대로 중앙에 있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그대로 스탠바이였다.
떨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단 MC 경험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연말 가요제라는 큰 무대였다.
그러자 문득 떠올랐다.
MC석으로 가기 전 멤버들이 했던 말이.
‘럭키가 단체로 왔다고 생각해!’
‘니가 준 건 행운이라니까.’
‘아니면 형 요즘 좋아하는 노래 뭐 있어요? 노래 흥얼거리면 좀 낫지 않아요?’
‘그러다가 우세현 대사 까먹는다.’
‘아니면 그냥 연습실이다 생각하고···.’
자기들이 더 긴장했다.
아마도 지금도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겠지. 특히 백은찬은 떨면서. 안 봐도 그려졌다.
그런 걸 떠올리니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행운이 여러 마리는 좀 귀엽네.
그러던 사이, 오프닝 무대가 끝났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함성 소리.
앞에 있던 스텝들 역시 분주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들어온 빨간불에 나는 그대로 앞에 보이는 카메라를 응시한 채로 진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