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선택의 이유
SBC 가요제전은 시작 이래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윈썸 멤버들은 대기실 한곳에 모여 앉아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세현 역시 잘하네.”
“세현이는 딕션이 좋아.”
“와중에 잘생겼어요.”
이에 답하듯 화면 속 우세현이 카메라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보는 이도 웃게 만드는 화사한 미소였다.
MC가 시작된 이래로 우세현은 차분한 모습으로 주어진 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박시겸과 한다연 역시 편안한 진행을 이어갔다. 앞선 두 사람에게는 다년간의 MC 경험이 존재했다. 그만큼 내공이 있었다.
그에 비해 우세현은 MC 경험은 적었지만, 놀랍게도 앞선 둘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자연스럽고 깔끔한 진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 세현이 MC 잘한당
- 우세현 진짜 딕션 좋다 또박또박하게 잘 들려오네
└ 세현이 노래 부를 때도 또박또박 잘 부르는 편임ㅋ
- 작년에 비하면 올해 MC는 제대로 선녀네 작년엔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는데
- 셋이서 호흡이 좋다 몇 번 맞춰본 것 같은 느낌
- 올해는 엠씨 잘 뽑은 듯 박시겸 한다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세현이 신의 한수다
- 박시겸 우세현 투샷을 보다니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음ㅋㅋㅋㅋㅋㅋ
- 박시겸 우세현 보니까 우도현 생각남
- 우세현 박시겸 투샷 존잘이네 훈훈해
그에 대한 반응 역시 좋았다.
특히나 올해의 MC 조합이 좋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었다.
여기에 박시겸과 우세현의 조합으로 인해 간간이 우도현이나 루트의 이름들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세현이 형, 근데 연습 엄청 했잖아요.”
“그렇지. 대본 끼고 살았으니까.”
“거의 외울 때까지 했을걸.”
“이따가 오면 칭찬 좀 해줘야겠다.”
화면을 보던 백은찬이 그렇게 입꼬리를 올린 채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멤버들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얘들아, 밥 왔다.”
도중에 매니저가 식사를 가져오기도 했다. 메뉴는 돈까스. 이에 안지호가 매니저로부터 건네받은 돈까스들을 테이블 위로 세팅했다.
더불어 돈까스 중 하나를 빼내어 젓가락, 소스 등을 챙겨 제 옆에 있던 빈자리에 잘 놔두었다.
“세현이 몫은 잘 놔뒀지?”
“네.”
안지호가 대답했다.
[네~ 앞서 정말 멋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는데요···]
그리고 밥을 먹던 도중, 화면이 MC석을 비추거나 하면 멤버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MC 멘트가 끝나고 나면 마치 짠 듯이 다시 돈까스에 집중했다. 이를 보던 매니저가 마치 미어캣들 같다며 웃었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다시금 들리는 MC의 목소리에 멤버들은 이에 집중했다.
비춰진 화면 속에는 MC인 한다연이 자신의 멘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네, 폭발적인 가창력과 함께 좋은 퍼포먼스를 뽐내는 무대였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잠시 고개를 돌려 봐야겠죠?]
그런데 이러한 한다연의 말과 동시에 MC석에는 찰나의 순간, 아주 짧은 정적이 돌았다.
동시에 한다연이 그때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아.’하는 얼굴을 보였다. 뭔가를 실수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박시겸이 곧바로 이를 받아치기에 나섰다.
[고개를 돌리시기 전에, 우선 이 뜨거운 열기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게 어떨까요?]
[아, 그렇죠. 역시 열기를 느껴야죠.]
이어서 한다연 역시 그러한 박시겸의 말을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 ???? 뭐야 방금 뭐임?
- 한다연 잠깐 실수한 듯?
- 정적이 정말 싸했다ㅋㅋㅋㅋㅋㅋ
- 박시겸이 역시 짬밥이 있네 스무스해
“어, 방금 뭔가 엉킨 모양인데?”
“그러게. 대본 잘못 읽으셨나보다.”
그렇게 박시겸의 의해 순간의 상황은 잘 넘어갔고 한다연 역시 차분히 미소 지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당황한 낯빛이 서려 있었다.
* * *
박시겸은 지금 상당히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서 대본을 보여주던 프롬프트가 제멋대로 날뛰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쳐야 하는 대사와는 전혀 다른,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엉망인 대본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번 MC 컷에 들어가면서였다.
큐카드에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대본에 순간 당황한 한다연이 그대로 말을 더듬었다.
처음엔 단순한 실수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프롬프트의 오류였다. 이에 박시겸은 그런 한다연을 빠르게 백업했다.
현재 SBC 연말가요제는 생방송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 정적이 몇 초 이상 날 시 그대로 방송 사고다.
하지만 박시겸의 빠른 백업 덕분에 정적은 얼마 못 가 깨졌고, 뒤이어 상황을 빠르게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프롬프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였다. 그러니 일단 지금은 프롬프트 없이 진행에 나서야만 했다.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군.’
그와 동시에 박시겸은 다음에 나오게 될 우세현의 말에 집중했다. 다음은 우세현이 멘트를 쳐야 할 때였다.
연차가 적고 MC 경험이 별로 없으니 분명 이러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 터였다. 그러다 보면 분명 실수가 나올 테고.
그러니 혹시 다시 정적이 일거나 막히거나 할 시엔 자신이 다시금 백업할 수 있도록 예의주시했다.
프롬프트는 역시나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여기서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을 잠시 가져볼까요? 마치 환상과도 같은 아름다운 순간을 여러분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놀랍도록 스무스했다.
심지어 그냥 큐카드를 읽은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큐카드는 보지 않은 채로 카메라만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대사를 쳤다.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게.
정말로 멘트를 통으로 외운 건가 싶을 정도로 스무스했다.
그리고 이러한 우세현의 침착한 모습에 박시겸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너무 얕봤나.’
연차가 낮다고, 경험이 없다고 무조건적으로 서투르다는 보장은 없었다.
앞선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세현은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와 모습으로. 차분하게 웃으며.
‘그때도 그랬었지.’
이전에 자신과 드라마 촬영을 했을 때도.
그 당시 무대 신(Scene)을 촬영하던 도중, 인이어가 고장이 났을 때도 우세현은 실수 없이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그때도 마찬가지로 우세현은 침착했었다. 침착하게 제 몫을 다했다. 그 모습이 나름 인상 깊었다.
‘번번이 놀라는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우세현을 MC로 선택한 건 옳은 선택이라 여겨졌다. 사실 이번 선택은 순전히 제 감에 의해 결정한 것이긴 하지만.
“시겸 선배님. 선배님께서 그럼 소개를 해주시죠.”
그렇게 여전히 정확한 딕션의 우세현이 박시겸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우세현이 그와 동시에 웃어 보였다. 아주 해사하게.
“예. 그렇다면 제가 바로 소개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박시겸은 그대로 차분하게 제 대사를 이어 나갔다. 마찬가지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채로.
* * *
프롬프트가 정신이 나갔다.
그것도 제대로.
다른 것보다 문제는 이게 단기간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 고장이 났을 때만 해도 다음 무대를 보고 오면 그땐 고쳐져 있겠지 싶었건만, 무대가 몇 개가 지날 동안 프롬프트는 고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프롬프트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장치였다. 손에는 이미 대본이 있었기에 진행상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한다연은 이전보다 대본 보는 횟수가 늘었다. 특히나 앞서 실수를 한 것 때문인지 이전보다 조금 경직된 모습이었다.
와중에 박시겸은 대본 한번 보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목소리 톤도, 딕션도, 표정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여유가 가득했다.
거기에 틈틈이 생방 시간이나 스텝의 요구를 신경 쓰면서도 중간에 한다연이나 나를 서포트하기도 했다.
‘확실히 짬밥이 다르긴 하네.’
모든 것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난 별로 한 게 없었다.
앞서 박시겸이 말한 대로 내 몫만 확실히 하고자 해서.
방송 진행 흐름이나 맡은 멘트 같은 건 당연히 사전에 전부 익혀둔지라 프롬프트가 제정신이 아닐지언정 그냥 연습한 대로 했다.
처음만 해도 박시겸이 나를 곁눈질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곁눈질도 어느새 사라졌다.
제 몫을 못 할까봐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 드디어 고쳐졌나 보네요.”
한다연이 프롬프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십분이 흐린 뒤에야 마침내 프롬프트가 제정신을 찾았다.
이런 건 좀 더 빨리빨리 대응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후에는 무대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있을 윈썸의 무대는 박시겸과 한다연이 소개를 할 예정이었다.
이에 한다연은 파이팅하라며 다소 형식적인 응원을 보냈고, 그에 비해 박시겸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걸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무대에 관한 박시겸의 반응이 궁금했다. 왜냐면, 우리 무대는 엄청 멋있을 테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 * *
“아쉽게도 오늘은 여기서 인사를 드려야겠는데요, 오늘 두 분 모두 어떠셨나요?”
“너무 재밌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준비되어 있던 모든 무대가 끝나자 마지막엔 전 출연진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나는 MC였기에 당연히 가장 앞에 나와 있었고, 그런 내 옆으로 멤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또 좋군.’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만큼 멤버들 얼굴이 한번이라도 더 잡힐 테니. 이왕이면 애들 얼굴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다음 컷으로 차선빈의 얼빡샷이 잡혔다. 그와 동시에 주변 출연자들이 놀랄 만큼의 큰 함성이 일었다.
그 옆에선 백은찬과 신하람이 그런 차선빈 주변으로 반짝반짝하다는 걸 표현하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함성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특히 멤버들이 잡힐 때마다 그 함성이 유독 컸다. 괜히 뿌듯했다.
“다 끝난 거냐?”
방송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던 도중 안지호가 물어왔다. 방송은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인사를 하러 가야만 했다.
“인사 좀 하고 오려고.”
“우세현 인사? 그럼 후딱 하고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그렇게 오늘 함께 MC를 했던 박시겸과 한다연에게 한번 더 인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이후 박시겸과 마주했다.
이어서 나를 발견한 박시겸은 그대로 보고 있던 대본에서 눈을 뗐다.
“수고 인사?”
“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그러더니 곧 다시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박시겸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건가.
“잘하던데. 오늘.”
“예?”
“오늘. MC. 침착하게 잘하더라고.”
아, 그 얘기였냐.
솔직히 무대를 말하는 줄 알았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 당연히 손이 많이 갈 줄 알았거든.”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 면은 형이랑 참 다르네. 우도현이었다면, 분명 그 상황에서 되도 않는 애드리브를 잔뜩 쳤을 거야.”
그 순간 형을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박시겸이 그대로 미간을 좁혔다. 이게 또 반박하기 그런 게 확실히 형이라면 그랬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방송사고 같은 건 없었겠지. 옆에 있는 입장으로선 짜증이 많이 났겠지만.”
박시겸이 그렇게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나 그 ‘짜증’에 상당히 무게가 많이 실려 있었다.
어쨌건 박시겸이나 형이나 서로 어지간히도 안 맞는다.
그렇지만, 앞서 말하는 방송 사고는 내지 않았을 거란 말에는 어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네.
“선배님, 혹시 이번에 나가시나요?”
“어딜?”
“TNC 시상식이요.”
그러자 박시겸이 잠시 침묵했다.
만약 출연한다면, 형이랑 만나게 될 테니.
“굳이 그걸 너에게 말할 의무가 있나?”
역시 순순히 대답해주지는 않는군.
뭐, 박시겸 말대로 말해줄 의무는 없긴 했다. 어차피 말 안 해줘도 알 방법은 있고.
[“우도현과 만나겠지.”]
나가는 거 확정이네.
괜한 다툼만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박시겸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일단은 모른 척이다.
“그럼 혹시 하나만 더 물어도 됩니까?”
“그러던지.”
“저를 추천하신 이유요.”
“뭐?”
“의견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저로. 그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러자 박시겸이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체이스와 윈썸 중 선택했다는 말은 생략하고. 그건 나오지 않은 정보였으니.
앞서는 제 몫을 다할 것 같아서라고 했지만, 그것 이외에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이유가.
“이유, 있지.”
그때, 박시겸이 입을 열었다.
의외로 대답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날 똑바로 응시한 채로 말했다.
“용모가 단정해서?”
그 순간, 다시금 대기실에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