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주건후의 메시지에 따라 도착한 화장실 옆 비상구.
사실 메시지에는 구체적인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내용만으로도 발신인이 누구인지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파악하고 있었군.’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 시점에서 알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주건후 역시 내가 이 촬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다음 상대가 나라는 것도.
사실 주건후가 그런 메시지가 보냈다고 해서 굳이 그 대화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주건후의 예상이 맞다는 걸 되려 인정해주는 꼴이기도 하니까.
저쪽은 이미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마 이미 확신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시 응할 필요는 없었다.
뻔뻔하게 모른 척 응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니가 나온 걸 보고 도현이에게도 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면 어떨까 생각중인데.]
그걸 보는 순간 열이 받아 버려서.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쓸데없는 도발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알면 또 화내겠네.’
어째 그 모습이 상상이 가지만, 그걸 생각하면서도 걸음은 이미 비상구로 향해 있었다.
이어서 비상구의 문을 열자 곧바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주건후였다.
“안녕.”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도착한 나를 향해 주건후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빨리 왔네. 급하게 왔나 봐.”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주건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가면은 안 벗을 거야? 이거 꽤 불편하던데.”
주건후가 내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잖아. 니가 우세현이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아니까 말이야.”
그 사실을 굳이 상기시키듯 다시 한번 콕 집어서 말하는 모양새였다.
‘할 수 없지.’
어차피 이미 다 아는 마당에.
굳이 얼굴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가면을 벗었다.
“그래, 이제야 좀 한결 낫네.”
“용건 말씀하시죠.”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으니.
그런데 그때, 주건후가 갑작스럽게 나를 향해 훅 다가왔다. 그로 인해 마주하고 있던 거리가 순간적으로 좁아졌다.
그렇게 눈앞으로 주건후의 얼굴이 보였다.
“근데 너 형이랑 좀 닮았네.”
그리고는 갑자기 또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이에 그대로 미간을 좁히자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그래서 더 짜증나.”
히죽거리는 얼굴에 비해 목소리엔 상당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여전히 형에 대한 반감이 느껴졌다.
“까놓고 말하자면, 난 우도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 말에 다시 한번 눈살이 찌푸려졌다.
“노래 못하잖아.”
이 새X가.
“흔히 가수라고 말하면서 노래도 제대로 못 하는 거 한심하잖아. 그래 놓고 애써 스타성이라는 말로 대충 포장하고. 그게 되게 웃기더라고. 없어 보이기도 하고.”
주건후가 그대로 피식거리며 웃었다.
굳이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새X가 형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정도는.
“거창한 대화 하자고 부른 건 아니고. 그냥 이왕 얼굴 아는 거 가볍게 대화 한번 할 겸 부른 거야. 알다시피 다음 상대잖아.”
동시에 주건후가 주머니에서부터 담뱃갑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담배 하나를 꺼내 그대로 입에 물었다.
“둘 중 하나는 가면을 벗게 된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너.”
그 순간, 주건후가 나를 다시 한번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입꼬리를 올린 채 묻는다.
“질 생각, 없어?”
* * *
주건후는 그렇게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질 생각 없느냐고. 분명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은근한 협박이 섞인 말이었다.
정성스럽게 개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이없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도중, 주건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농담이야.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러더니 곧 뒤에 있던 벽에 몸을 기댔다. 동시에 한껏 여유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넌 나 절대 못 이겨.”
상당한 자신감이었다.
나름 근거있는 자신감일 테고.
그 말을 하는 주건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확신만 가득했다.
“보아하니 주변에서 그간 잘한다, 잘한다 해줬을 것 같은데, 이 기회에 현실 한번 파악하는 것도 좋을걸. 난 절대 져주지 않을 거라서.”
지금 말은 철저하게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 말이었다. 져준다라. 그런 일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해둬. 어떻게 가면을 잘 벗을지 그런 거.”
동시에 주건후와 다시 시선이 맞닿았다.
“그래도 안면 있는 얼굴이니 염려해서 한 말이야. 그래, 방금처럼 벗으면 좋을 것 같은데. 멋있게 벗더라고.”
그렇게 한 번 더 웃는다.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정성스럽게도 하고 있었다.
‘결국 할 말이란 게 이거였나.’
대충 겁을 줘서 무대 전에 멘탈을 흔들려는 의도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미소를 한번 지어주었다.
적당히 수용하는 태도로.
불필요한 대화를 여기서 더 할 생각은 없었다.
무대 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건후는 그런 나를 잠시 말없이 응시더니 이내 피식 한번 웃었다.
“아, 이 자식도 또라이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아, 적당히 맞춰주려는 게 보였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다시 한번 웃었다.
주건후의 앞선 그 말에 오히려 전투력이 꽤나 올랐으니까 말이다.
이 새X는 무조건 이기고 올라간다.
다시는 노래 어쩌고 하는 말, 못 하게.
* * *
“나중에 질질 짜지 말고.”
주건후가 그대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주건후의 행동에 나는 그대로 먼저 그 자리를 나섰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주건후의 생각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이길 거라는 자신감.
그게 확고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 멘탈을 부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굳이 이런 대화 자리를 요청한 거였고.
하지만 그건 무대에 대한 확신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쫄려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그냥 내가 눈앞에 있는 게 거슬리는 거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반감이 상당하다.
형에게나 나에게나.
‘어쨌건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만하고 있다면, 나로서는 좋은 거지.’
앞선 주건후의 자신감은 자신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자만이기도 했다. 절대 질 리 없다는 그러한 자만.
그게 곧 방심을 낳기 마련이고.
“세현아, 이제 2 라운드 들어간대.”
1 라운드 남은 조들의 대결이 끝난 이후에, 그대로 다음 라운드를 위한 촬영에 들어갔다. 이에 나는 다시 한번 쓰고 있던 가면을 고쳐 썼다.
‘되도록 오래 보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쳤으니.’
그에 대한 약속도 지켜야만 했다.
멤버들에게.
분명 이번에도 다 같이 볼 테니까.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더 힘이 났다.
더 잘하고 싶었다. 많이 올라가고 싶어졌다. 그럼 분명 좋아할 테니까.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면에 가려 보이지는 않겠지만.
“이제 촬영 들어갈게요.”
그 순간, 촬영이 재개되었다.
* * *
곧 있을 2 Round의 시작, 이를 앞두고 패널인 김덕형은 여전히 기대감 넘치는 마음으로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옆에 비어 있던 좌석의 자리의 주인이 돌아왔다.
“어, 도하 씨. 어디 다녀와요?”
“잠깐, 화장실이요. 이제 곧 시작이죠?”
“그렇죠. 아, 내가 다 떨리네.”
김덕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남은 출연자는 모두 4명.
여기서의 승자가 최후의 라운드인 결승전 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이번 무대가···‘탐험가’ 대 ‘시계 토끼’네요.”
이번 라운드의 시작 무대는 바로 ‘탐험가’와 ‘시계 토끼’의 대결이었다.
“둘 다 1라운드 때 막강하긴 했었는데. 특히 탐험가 쪽은 리듬감도 좋고, 그 음색이 좋았어요.”
“덕형 씨는 탐험가 쪽이 더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렇죠. 도하 씨는요?”
그러자 신도하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말을 골랐다. 하지만 금세 다시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전 개인적으로 멋있는 쪽을 선호해서요.”
“예?”
다소 뜬금없는 그 대답에 김덕형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신도하를 봤다.
그렇지만, 신도하는 여전히 그런 김덕형을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뭐가 멋있다는 거지?
목소리? 창법? 아니면 가면인가?
하지만 김덕형이 이와 같은 고민을 함과 동시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에 김덕형은 앞선 고민은 그대로 금방 잊은 채로 다시 무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어서 이번 라운드의 출연자가 올라왔다. ‘길 위의 탐험가’였다.
가장 먼저 무대를 하게 된 ‘탐험가’는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 객석의 고요한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지체없이 시작되는 곡의 전주.
흥을 돋우는 베이스 연주를 시작으로 가볍고도 리듬감 있는 비트가 그대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신나는 비트에 이를 보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들썩였다. 상당히 익숙한 멜로디였다.
‘봄!’
봄은 90년대 초에 발매된 발라드곡으로 신나고 경쾌하면서도 펑키한 리듬을 특징으로 했다.
[소복이 쌓인 저 눈을 보며]
[그대로 남겨진 발자국을 봐]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다다르는 하나의 봄]
여유로운 그루브에 리듬을 제대로 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박자는 하나하나 절대 놓치지 않았다.
“잘하는데? 너무 좋은데?”
“와, 리듬감이 진짜 좋아. 기가 막힌다.”
주변에 있던 패널들 역시 무대를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이 봄에, 이 봄에, 이 봄에]
[그대로 이 봄을 따라간다면]
[네게 그대로 다다를 수 있겠지]
여기에 간드러진 고음까지.
그대로 막힘 없이 뻗어나가는 고음에 패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치트키네. 치트키야.’
이 곡은 그야말로 경연에 딱 맞는 곡이었다.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기 좋은 곡.
여기에 ‘탐험가’만의 쨍하고 하이톤인 음색이 해당 곡과 잘 어우러졌다.
[당장 그 봄으로 달려가]
[그대로 그 봄에 안겨]
이어서 클라이맥스가 되자 다시금 연달아 터져 나오는 고음. 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박자를 가지고 노는 듯한 모습에 노련미가 돋보였다.
‘가수다! 이건 백프로 가수야!’
그렇게 김덕형은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무대를 향해 있는 채였다.
[당장 이 봄으로 와]
[이 봄으로.]
마지막 그 소절을 끝으로 다시 베이스가 경쾌하게 연주되며 무대는 이윽고 엔딩을 맞이했다.
화려하면서도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무대였다.
“이야, 이거 너무 잘한다.”
“진짜 잘하네. 잘해. 이건 바로 다음 라운드 진출감인데?”
무대가 끝나자 곧바로 다시금 패널들이 모여 앞선 무대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탐험가’의 무대에 열기를 전달받은 건 김덕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쪽이 이길 것 같은데. 탐험가씨가 너무 잘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패널들 사이에서도 신도하는 별다른 말을 얹지 않은 채로 그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바로 다음 무대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MC의 그 말에 가장 먼저 고개가 돌아간 것 또한 신도하였다. 그런 신도하의 눈빛이 이전과 다르게 묘하게 바뀌었다.
[앞선 ‘길 위의 탐험가’에 맞서는 다음 출연자, 바로 ‘달리는 시계 토끼’입니다!]
이어지는 소개에 패널들 역시 차분하게 다시 제자리에 착석해 다음에 펼쳐질 무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앞선 무대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런 상황에서 올라온 토끼 가면의 출연자. 그리고 마침내 전주가 시작되었다.
‘어, 이 곡은?’
그리고 그 순간, 김덕형은 알았다.
이 곡의 제목이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