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말릴 준비해줘.
그렇게 형에게 와인바의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자 바로 출발한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오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그리고 그사이 신도하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났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형이 올 것 같아요.”
“어? 도현이?”
신도하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에 난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금 형한테 연락이 왔었거든요. 이미 출발한 것 같아요.”
“오늘 멱살 잡힐 수도 있겠는데?”
“그런 일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이왕이면 미리 말릴 준비해 줘.”
신도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도 그러네.
그리고 솔직히 말린다고 해서 말려지지도 않았다. 차선빈 정도는 돼야 말릴까 말까지.
“그럼 도현이가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짠을 해야겠네.”
동시에 신도하가 남은 와인병을 들어 그대로 내 잔에 조금 따랐다. 이에 다시 한번 붉은 와인이 잔에 담겼다.
“이것만 마셔. 여기서 더 마시는 건 좀 말리고 싶네.”
“선배님도 마지막 잔인가요?”
“나는 더 마시려고.”
신도하가 그렇게 잔을 들었다.
계속 마시겠다는 거군.
분위기를 보니 설령 내가 먼저 자리를 일어나더라도 혼자 남아 더 마시고 갈 생각인 듯했다.
동시에 신도하와 다시 한번 잔이 부딪쳤다. 어쩌면 내일까지 마시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 곧 12시니까.
이윽고 머금은 와인이 다시 한번 입안에서 달게 퍼졌다.
* * *
“확실히 그렇네.”
“네?”
“건후 형이 그랬거든. 세현이 넌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다고. 근데 확실히 그래.”
신도하가 뜬금없이 말했다.
그보다 주건후가 그런 말을 했다고?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이거 더 먹어봐.”
신도하가 내게 하몽을 하나 더 건네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와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지만, 와중에 다른 먹거리는 주체 없이 권하고 있었다.
특히 하몽.
아니, 하몽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데.
그래도 마냥 거절하긴 뭐해서 그대로 신도하가 말한 하몽을 한 입 하려는데, 그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크게 진동했다.
동시에 깜짝 놀라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먹긴 뭘 먹어.”
그렇게 머리 위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형이었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에.
“형.”
하지만 그런 내 부름에도 형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우리 테이블 위를 그대로 천천히 둘러봤다.
그 순간, 형의 미간이 구겨졌다.
“술을 먹여?”
“어쩌다 보니.”
“이 새X가···.”
“그래도 적당히 조절했어. 세현이 취하면 안 되니까. 괜찮다면 너도 합석해.”
그러자 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실소했다. 분위기를 보니 슬슬 적당히 빠져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형이 그대로 나를 향해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가자.”
이에 그대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더 싸움 나기 전에 일어나야지.
“세현아, 모자.”
“감사합니다.”
그때, 신도하가 내게 모자를 건넸다.
그리고 그렇게 모자를 건네받는 와중에 그 순간 신도하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신도하가 전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저도 오늘 감사했습니다. 말씀해주신 거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래. 다행이네.”
신도하가 그대로 살짝 미소 지었다.
“우세현.”
그 순간, 형이 내 팔을 붙잡은 채 말했다. 목소리 들으니 진짜로 가야겠군. 그렇게 신도하를 향해 마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신도하는 그런 나를 향해 웃으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멀끔한 얼굴이었다.
“방금 그 얘기, 뭐야?”
“무슨 얘기?”
“고마웠다 어쩌고하는 거. 저 새X가 왜 너한테 고마운데?”
그 말을 하는 형의 목소리엔 짜증이 한껏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 은근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혼술 얘기하는 거겠지.”
“혼술? 아, 근데 너 형이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심지어 저 새X랑.”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원래 그러려고 만난 건 아니고.”
“정 마시고 싶으면 나 불러. 안 보이는 곳에서 마시지 말고.”
“그보다, 형.”
“어.”
대답과 동시에 형이 심통 맞은 얼굴로 내 모자를 꾹 눌렀다. 이에 그런 형을 노려보며 모자를 다시 원래대로 썼다.
“와인 생각 없어?”
“뭐?”
“그냥 여기까지 왔는데 와인 마시고 싶지 않나 해서.”
동시에 시간을 확인했다.
59분.
“···와인?”
“응. 와인.”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흐르며 이윽고 날짜가 바뀌었다. 3월 20일이었다.
* * *
그런 내 물음에 형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갑자기 와인은 왜?”
“형, 와인도 잘 마시니까. 여기 와인이 꽤 괜찮더라고. 아, 하몽도 괜찮아.”
“와인 더 마시고 싶어? 그럼 집에 가서 나랑 같이···.”
“형, 마시고 와.”
그리고 형을 향해 한 번 더 말했다.
“마시고 와도 돼.”
앞서 신도하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와인을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물론 그건 형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박시겸이나 권해진. 그 두 사람도 포함이었다. 루트 멤버들.
오겠다는 형을 굳이 말리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형이 오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앞선 내 말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형은 반응했다. 와인이라는 그 말에.
그 생각이 내게도 들렸다.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에 맞게 사전에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이에 빠르게 택시로 다가가려는데, 그대로 형이 내 앞을 가로질러 먼저 택시로 다가가 섰다.
“다른 말 말고 타. 데려다줄 테니까.”
“안 데려줘도 돼. 나 멀쩡한데.”
“너 혼자 못 보내.”
완강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굳이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얼마 마시지도 않았고, 이대로 숙소 앞에 바로 내릴 텐데.
그런데 그때, 주머니에 있던 폰이 진동했다. 진동이 긴 걸 보니 전화인 듯했다.
[지호]
으악!
“형, 아니야. 어, 형은 역시 그냥 마시고 가는 게 좋겠어.”
“뭐?”
“나 지금 되게 급한 상황이거든. 그래, 되게 힘겨운 상황이야.”
“아니, 지금 뭐라는···.”
“내가 가자마자 바로 전화할게!”
그렇게 나는 빠르게 택시에 올라탄 뒤, 그대로 문을 닫았다.
앞에선 형이 꽤나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로 형을 향해 방긋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형, 맛있게 먹고 와!”
* * *
우세현이 탄 택시가 그렇게 우도현의 시야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택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도현은 그곳에 서 있었다.
‘무슨 전화길래 그렇게 서둘러 가는 건지.’
멤버 전화인가?
정황상 그것밖에 없을 듯했다.
이내 우도현은 그렇게 동생이 탄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천천히 걸었다.
‘역시 찜찜하네.’
그렇게 어영부영 우세현을 보낸 게 영 찜찜하기만 했다. 대충 도착했을 시간을 확인해서 다시 한번 연락을 넣어봐야겠군.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우도현이 향한 곳은 조금 전, 신도하와 우세현이 있던 그 와인바였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우도현은 그곳으로 다시 향했다.
‘한번 와봤던 곳이군.’
전에도 한번 와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아주 오래전, 흐릿할 만큼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그렇게 우도현이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한 인영이 보였다. 와인바 안엔 여전히 한 테이블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우도현은 눈앞에 보이는 그 테이블로 걸어갔고,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도하의 앞자리에.
“어?”
동시에 신도하가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제 앞에 앉은 우도현을 바라봤다. 전혀 예상지도 못 했다는 듯 조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마시려고?”
“어.”
그리고 새로운 잔 하나가 건네졌다. 동시에 우도현은 그렇게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잠시 조용히 응시했다.
“세현이는?”
“갔어. 그것보다 관심 꺼. 세현이한테.”
그러자 신도하가 이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이에 우도현은 곧바로 미간을 좁힘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을 들었다.
그렇게 붉은색 와인이 투명한 유리잔 안으로 느리게 쏟아졌다.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혹시 기억해?”
“뭘.”
“우리 와인 마셨던 거. 이날마다.”
이에 우도현은 침묵했다.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데뷔 초엔 미성년자였기에 콜라로, 멤버들이 하나둘씩 성인이 되고 나서는 와인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매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데뷔날이 되면 숙소에서 다 같이 모여 이와 같은 한잔을 했다.
무려 6년 동안이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5명이서만 모여 마셨다.
다른 사람 없이. 멤버만.
하지만 축하 자리인 것 치곤 다소 얌전하고도 조용한 자리였다.
그나마 시끌벅적했던 건 첫 데뷔일을 맞이했던 1년 차, 그리고 2년 차 때 정도. 그 이후로는 그저 잔을 기울이는 것에 불과했다.
그저 익숙하게 언제나 그날이 되면 잔을 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때 마셨던 와인이 쉽게 잊혀지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늘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 다른 멤버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 시간을 굉장히 좋아했거든.”
그리고 그 말에 우도현이 그대로 와인을 조금 들이켰다. 신도하가 그 시간을 좋아했다는 것 정도 우도현 역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청승맞게 먹고 있는 거냐? 그때처럼 축하하는 마냥?”
“그런 셈이지. 이젠 거의 연례행사가 되어버려서.”
신도하가 그렇게 웃어 보였다.
“도현이 넌? 마신 적 있어?”
“없어.”
“단호하네. 근데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우도현은 다시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루트를 나온 이후, 와인을 마신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기억을 아주 잊은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기억 정도는 하고 있었다.
기억 정도는.
“그래도 올해는 마시고 있네. 그것도 나랑.”
“혼술이야. 테이블만 공유하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대로 신도하가 살짝 미소 지었다.
우도현이 앉은 자리는 조금 전까지 우세현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와중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게 참 우도현다웠다. 굳이 그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이번엔 신도하가 자신의 술잔을 기울였다. 역시나 맛이 꽤 달았다. 사실 자신이 먹기엔 좀 과하게 달았지만, 지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건후 형, 얘기 들었어. 제대로 경고해줬다던데.”
“권해진이 그새 말했나 보네.”
“안 그래도 건후 형이 그것 때문에 더 길길이 날뛰었다 하더라고. 그 형 성격 생각하면 눈에 훤하지.”
신도하가 그대로 상상이 간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번 주건후와 관련된 일 이후, 우도현은 주건후를 향해 직접 경고했다. 제 동생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
직접적인 통화를 통해 확실하게 전했다. 이에 주건후는 길길이 날뛰는 반응을 보였지만, 오히려 행동은 더욱 얌전해졌다.
“본능적으로 사리는 거겠지. 그 형도. 도현이 네가 세현이를···가족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나온 동생의 이름에 우도현이 그대로 신도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그러자 이번엔 신도하가 그런 우도현의 잔에 직접 와인을 따랐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지금 그곳엔 오로지 잔잔한 멜로디의 재즈 음악만이 홀로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신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현아, 그때 일은 정말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