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정말 곤란해
“···만년필 케이스요?”
“응. 만년필 케이스.”
신도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만년필 케이스.
그래, 분명 작년 신도하의 생일날 신도하에게 만년필을 선물한 전적이 있었다.
확실히 그랬긴 했는데.
“그럼 곤란한 일이라고 했던 게···.”
“응. 새로운 케이스 후보가 몇 개 있는데, 도저히 뭐가 좋을지 몰라서. 상당히 곤란해하던 참이었거든.”
그러더니 다시 한번 미소 짓는다.
아, 잠깐만.
그러니까 전에 말한 곤란한 일이라는 게 겨우 만년필 케이스를 정하는 거였다고!
“···정말입니까?”
“응? 뭐가?”
“정말 케이스요?”
“응. 케이스.”
아니, 진짜였냐···.
이에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신도하를 보고 있자 되려 신도하는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럽게.
“왜?”
와중에 뻔뻔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아.’
이 자식.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순간 그대로 힘이 쭉 빠졌다. 괜히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잖아!
지난 고민했던 시간들이 다시 어이가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셨죠?”
“뭘?”
뭐긴 뭐야!
만년필이지!
아, 구체적인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하겠다는 말에서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니 정말로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준 게 없었다.
“왜? 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조금 더 심각한 쪽일 거라 생각했어요.”
“심각한 쪽이라면···도현이?”
“네, 뭐···.”
이렇게 되니 차라리 아니라서 다행인가. 다시 생각해보면 또 정말로 예상처럼 형이나 루트 관련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쪽이었다면 굳이 너에게까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거야. 위험하니까.”
굳이 강조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말해준다는 사람이 없었다. 형이나 신도하나 왜들 그렇게 입을 다무는 건지.
“분명 아는 순간 바로 뛰어들 테니까. 아, 그래도 반대로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이용해도 돼. 언제든 함께 할 생각 있으니까.”
여전히 뻔뻔한 미소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같은 목소리였지만, 이전과 다르게 무게가 있었다.
정말로 선뜻 그럴 의향이 있다는 양.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신도하는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어느 방면이건. 그렇게 생각하면 솔직히 떠오르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네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야. 그동안 잘 보관해두고 있었는데, 그 새 조금 낡았더라고.”
“케이스 정도는 낡아도 괜찮지 않나요.”
“사실 케이스는 어디까지나 보호 용도니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은 그 용도를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이내 신도하가 고개를 슬쩍 돌려 뒤편에 있던 책상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가니 그대로 화려한 케이스 하나가 보였다.
만년필 케이스였다.
언제봐도 튀긴 튀었다.
“그리고 사실 단순히 보관 용도 외에도 케이스도 꽤 중요해. 내 소중한 만년필을 보관할 공간이니까.”
동시에 신도하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내가 저 만년필을 무척이나 아끼거든.”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신도하는 그 길로 만년필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걸 보니 괜히 좀 머쓱해졌다.
신도하가 이 정도로 만년필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이러나저러나 선물한 만년필을 잘 사용한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만년필로 줘서 다행이군.
“그런 의미에서 후보를 몇 개 추렸는데, 한 번 봐주겠어? 내가 볼 땐 다 괜찮은 것 같아서.”
그리고는 옆에 있던 태블릿 PC를 꺼내 든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디자인이길래 저렇게 고민하는지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이런 건 원래 취향을 타니 본인 취향에 맞는 걸 선택해야···.
- 똑똑!
그리고 그렇게 신도하로부터 태블릿 PC를 받아들려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작업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신도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올 사람이 없는데.”
그 말엔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표정이나 말투로 봐선 정말로 올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잠깐 앉아 있어.”
그리고 곧 신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얼굴엔 여전히 짜증이 섞인 채로.
‘어차피 스텝일 텐데.’
보완이 잘 된 건물이니 아마도 외부인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매니저나 스텝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마침내 신도하가 그 문을 열었을 때, 문 너머에 있던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아, 도하 씨. 미안해요.”
“···종건 씨군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도 봤던 매니저와 함께 있던 그 소속사 직원이었다.
“내일 있을 회의 시간 변경에 대해 말씀드리려고요. 전화해도 받지를 않으시길래 그냥 바로 알려주러 왔어요.”
“그렇군요. 전화는 치워두는 바람에 몰랐네요.”
신도하가 이내 덤덤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내일 회의 시간 변경에 관해 직접 알려주러 온 듯했다.
그리고 신도하는 그대로 잠시 그 직원을 조용히 응시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12시 전에 들어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었죠?”
“글쎄요.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어서요.”
“그렇군요. 아, 중요한 시간에 죄송합니다. 변경 사항은 전달했으니 전 이만 다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직원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로 향했던 직원의 시선이 뒤이어 나와 마주했다.
시선이 마주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직원은 주저 없이 나를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직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그러죠.”
그렇게 직원이 문을 닫고 떠났다.
동시에 다시 작업실 안이 조용해졌다.
“미안. 중요한 손님과의 시간이라고 사전에 말을 해뒀는데도 이런 불상사가 생기네.”
신도하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아뇨, 괜찮습니다.”
애초에 케이스를 정하는 것보단 저쪽에서 말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는 내 말에도 신도하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잠깐 쓴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이내 표정을 거두었다.
“그래, 그럼 일단 하던 거 계속할까.”
그와 동시에 옆에 두었던 태블릿 PC를 다시 집어 들었다. 분명 표정은 멀끔히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생각은 거두지 않은 채였다.
[“────”]
[“─역시.”]
여실히 들리는 그 생각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신도하를 향해 입을 뗐다.
“선배님.”
“응.”
“곤란한 일, 있으신가요.”
“응? 아, 응. 곤란하다고 했잖아. 케이스를 정하는 일이 꽤 곤란해.”
“그것 이외예요.”
“뭐?”
“다른 곤란한 일, 더 없으신가 해서요.”
그러자 신도하가 그대로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에 나 역시 마주 오는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하하.”
하지만 신도하는 곧 시선을 거두더니 이내 그대로 작게 한번 소리 내어 웃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긍정의 표현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신도하가 다시금 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눈치가 좋네. 너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와 동시에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정도면,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정도야.”
그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 *
신도하와는 이후로도 여전히 그대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채였다.
독심술.
순간적으로 나온 그 단어에 하마터면 그대로 반응할 뻔했다.
‘갑자기 웬 독심술 얘기냐···.’
언제나처럼 웃으며 얘기하고 있지만, 그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니라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갖고 있어? 독심술?”
그리고는 또다시 태연하게 묻는다.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동요해선 안 됐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럴 리가 없는 거겠지.”
그리고 다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신도하의 머리 구조에선 독심술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로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지는 건가.
“세현이, 넌 항상 눈치가 빠르니까. 혹시나 하고.”
···참 알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농담도 어느 정도 섞여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단 앞선 질문에 답하자면, 네가 느낀 대로가 맞아. 곤란한 일이 하지. 적당히 곤란한 일이.”
적당히 곤란한 일···.
내가 볼 땐 전혀 적당히 곤란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언제 눈치챈 거야? 역시 방금?”
“처음 작업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아, 그때. 그렇지. 어쩌면 그때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신도하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신도하가 말한 그 곤란한 일이란, 방금전 이곳을 방문했던 그 소속사 직원과 연관된 일이었다.
조금 전, 그 직원이 신도하의 작업실을 다시 방문한 건 내일 있을 회의 스케줄 때문이 아니었다.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직원은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하의 컴퓨터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도하의 작업물이다.
한마디로 절도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평소 신도하가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작업물 중 하나를.
처음 작업실에서 직원을 마주했을 때, 그대로 나를 스치는 그 순간 들리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신도하가 작업실 나가는 시간이 언제쯤 되더라.”]
작업실이 비는 시간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주인 없는 시간을 노린다.
아무런 의도 없이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상함은 조금 전, 다시 방문했을 때 확신을 갖게 되었고.
[“비밀번호를 알았으니 이제 몰래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평소 따로 보관하던 USB도 있었는데. 그건 어디 있지?”]
이처럼 머릿속으로 그 구린 속내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려짐 없이 명백하게.
그대로 훔친 작업물을 어디에 팔아먹으려 하는 건지 아니면 그대로 카피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가 됐건 불순한 의도인 건 마찬가지였다.
“구체적으로 눈치를 챈 계기는?”
“일단 선배님의 표정이요. 방금 전 직원을 마주하실 때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으니까요.”
“내 표정이 안 좋을 때도 알고 있네. 이건 좀 기분 좋은데.”
그리고는 다시 작게 미소 짓는다.
어디까지나 단순히 표정이 구렸다는 얘기였는데.
“그럼 왜 그랬는지도 알고 있어?”
“순전히 추측에 불과하지만, 저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난 뒤에 있던 신도하의 데스크탑을 가리켰다.
“유독 시선이 많이 향했거든요. 데스크탑 쪽으로요.”
“단순히 그것만으로?”
“한두 번이라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여겼겠지만, 그게 다섯 손가락을 넘을 만큼의 숫자라면 얘기는 달라지죠.”
그러자 곧 신도하가 ‘오-’하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티 나게 놀란 연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할 생각은 아니지만, 신도하가 연기를 안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관찰력도 좋네. 세현이는.”
신도하가 웃으며 말했다.
뭐냐, 저 부담스러운 말투는.
“···아마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겠죠.”
“그렇지만 무의식치고는 전혀 티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걸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는 게 놀라운걸.”
뭐, 어디까지나 생각을 읽고 의심을 가진 순간부터 주의 깊게 살핀 거니 관찰력이 좋다고 할 만한 건 아니었다.
그저 능력에 불과했다.
“그래, 그렇지. 확실히 네 말대로야.”
동시에 신도하가 다시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생각을 읽게 됨으로써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신도하는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생각한 그게 맞을 거야.”
앞선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