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인생은 원래 쓴맛이란다
맥주를 내려놓은 하람이가 그대로 실망한 기색이 가득 담긴 얼굴을 보였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진짜 맛이 없긴 엄청 없네요. 무슨 맛으로 먹는 거예요?”
“인생은 원래 쓴맛이란다. 너도 이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면 이 형들을 이해할 날이···.”
“형이랑 나랑 한 살 차인데요.”
“이제야 처음 술을 마셔보는 애기랑은 다르지.”
그렇게 백은찬이 가소롭다는 듯 표정을 보였다. 그래도 어디로 봐도 하람이랑 한참 다르진 않아 보인다만.
“근데 설마 한 입 마시고 끝?”
“아뇨. 더 마실 건데요. 맛없긴 해도 먹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그렇게 하람이가 다시 한번 캔을 들었다.
“욕심은 내지 말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고작 몇 캔으로 취하겠어요?”
“고작 몇 캔으로 취하는 사람도 있다.”
“도운이 형?”
그러자 이번엔 누구랄 것도 없이 도운이 형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을 한 번에 받은 도운이 형이 이내 과자를 입에 문 채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였다.
“나? 왜?”
“형은 딱 한 캔만 마시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다시 한번 짠! 합시다!”
“얘 벌써 취한 거 아니냐?”
“에이, 지호 형! 나 한 입 마셨어요~아니, 두 입인가?”
“진짜 취한 거 아니냐?”
안지호가 이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람이를 쳐다봤다. 그렇지만 하람이는 절대 아니라며 다시금 캔을 들었다.
내가 볼 땐 세 입이긴 했는데, 설마 그거 마신 걸로 벌써 취하진 않았겠지.
“세현아, 왜 사이다를 들고 있어?”
“어, 아니.”
나도 모르게 또 사이다를 잡고 있던 모양이다.
“자, 자. 세현이 형도 얼른 마셔요~”
이내 넉살 좋게 웃는 하람이에 나 역시 들고 있던 맥주를 그대로 한번 들이켰다. 아직까지 맥주가 꽤 차가웠다.
“야, 우세현. 이제 슬슬 할 시간 아니냐?”
옆에 있던 안지호는 어느새 파란색 감자칩을 뜯고 있었다.
“뭐가?”
“아, 그거. 맞다. 그거 할 시간이잖아.”
“내가 틀까?”
동시에 차선빈이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리모컨을 찾았다.
뭐지, 뭐가 할 시간···아.
“<가면 아래의 가수>?”
“오늘 그거 왕중왕전 하잖냐.”
“시간 딱이네.”
오늘은 지난번에 촬영했던 <가면 아래의 가수>의 왕중왕전 방송날이었다. 찍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그렇게 차선빈의 손에 의해 티비가 켜졌다.
멤버들 역시 결과는 다 알고 있지만, 오늘 방송을 꽤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였다.
안 그래도 이제 슬슬 할 때가 아니냐면서 며칠 전부터 셀 수 없이 물어왔던 터라.
그리고 틀자마자 대진표가 나오며, 참가자 명단이 화면 속 자막을 통해 보여졌다. 저 토끼 가면도 꽤 오랜만이군.
“오, 저 토끼가 혹시 이 토끼냐?”
“아닌데.”
“아, 이제 보니 저 토끼가 더 멋있는 것 같기도 하네.”
“메이크업했으니까.”
아, 물론 가면에 가려서 안 보이긴 하지만.
“아냐, 이쪽도 멋있어.”
“고마워.”
고마운 마음에 그대로 차선빈에게 가지고 있던 과자를 하나 더 건네주었다. 근데 사실 이쪽보단 저쪽이 더 멋있는 게 맞을 거다.
지금은 좀···프리해서.
옷도 대충 흰 티고.
“아, 근데 누가 영상 틀어놨어요? 왜 이렇게 시끄럽지?”
그런데 그때, 티비를 등지고 있던 하람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상이 아니라 티비잖아.”
“네? 티비는 왜 틀어놨어요?”
“···뭐?”
그와 동시에 멤버들과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거실엔 정적이 흘렀다.
어, 잠깐만, 이거 설마···.
“마시자고요!”
···하람이가 취했다.
* * *
하람이가 취했다.
어느새 보니 얼굴이 조금 빨개진 채로 혼자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이에 옆에 있던 백은찬이 곧바로 하람이가 마시던 캔을 들어 그대로 흔들어 보았다.
“얼마나 마셨어?”
“거의 다?”
“그럼 한 캔에 취한 거야?”
“도운이 형보다 심한데.”
그러자 곧 이를 들은 도운이 형이 ‘큼-’하는 소리를 내었다.
“형들은 맥주 안 마셔요? 더 없어요?”
“맥주는 무슨 맥주야. 야, 그만 마시고···.”
“더 가져와!”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그대로 멤버들과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이거 시작된 건가, 주정이···.
“와, 제대로 취했는데?”
“야, 백은찬. 그냥 끌고 가.”
“나만 끌어? 같이 끌어. 쟤 딱 보니 지금 끌면 가만히 안 있을 상인데.”
“나는 저 정도 아니었지?”
“저렇게는 아니었어요.”
도운이 형이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건 지금은 하람이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하람아, 많이 마셨으니 이제···.”
“가위바위보.”
“뭐?”
“가위바위보 해요. 이기면 안 마신다.”
이 무슨 뜬금없는···가위바위보?
그리고 정말로 할 생각이었는지 그대로 주먹을 치켜든다.
“야, 너 진짜지? 진짜로 지면 군말 없이 들어가는 거지?”
“가위바위보.”
“좋아. 나 한다.”
이에 백은찬이 나를 등 뒤로 민 채로 호기롭게 앞으로 나섰다.
“가위바위보!”
“으악!”
그리고 호기롭게 졌다.
아무리 그래도 담판에 지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그리고 그런 백은찬을 가볍게 치운 하람이가 이내 다시 내 앞으로 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빤히 바라본다.
어, 이건 결국 도전의 의미···.
“잘생겼네.”
······?
“아, 이 형. 잘생겼어.”
“어, 고마워.”
“그러니까 가위바위보.”
결론은 가위바위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힘차게 주먹을 들었다.
“이겨! 이겨! 우세현!”
바로 옆에선 어느새 좌절을 이겨낸 백은찬의 열렬한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평소라면 그냥 져줬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이길 생각이다.
여기서 더 마시면 내일 속 쓰릴 테니까.
뭘 낼지는 대충 알 것 같으니.
그리고 나 역시 승부를 볼 준비를 했다.
“가위바위···”
담판에 끝내는 게 낫겠다.
“···잠깐!”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하람이가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어, 뭐···.
“이 형, 가위바위보 잘하는데.”
“취한 와중에 그건 또 기억하고 있네.”
뒤에 있던 안지호가 피식 웃었다.
“그럼 묵찌빠로 할까?”
“거짓부렁! 묵찌빠도 잘 아는 거 다 알아!”
아, 그것도 알고 있었구나.
“그냥 가위바위보!”
그런데 그 순간, 하람이가 빠르게 패를 내었다. 잠깐, 혹시 이거 시간차 공격이었냐!
그렇게 엉겁결에 대결이 시작됐다.
“으악!”
동시에 옆에서 지켜보던 멤버들의 눈이 그대로 휘둥그레졌다.
* * *
혼돈의 시간 차 가위바위보 승부.
예상치 못한 타이밍으로 인해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다행히 그 승부에선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굿나잇.”
그리고 패배를 한 하람이는 그대로 그 한마디만을 남겨둔 채 군말 없이 제 발로 방으로 돌아갔다.
승복이 빨랐다.
“쟤 진짜 취한 거 맞죠?”
“일단 안 쓰던 생떼를 쓰는 거 보면 취한 거 맞아.”
“그래도 기특하네.”
그러자 백은찬이 그게 뭔 이상한 소리냐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래도 알아서 잘 방으로 들어간 거 보면 기특하지 않나.
“하여간 우세현은 신하람한테 약하다니까.”
백은찬이 다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약하고 말 것도 없다. 그냥 기특해서 기특하다고 한 것뿐.
아, 내일 하람이 콩나물국 끓여줄까.
숙소에 콩나물이 있나?
“내심 나까지 오지 않을까 대기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시간차 공격 들어갔을 땐, 우세현이 지는 거 아닐까 했다니까요.”
“나도 준비하고 있었어.”
이윽고 차선빈 역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사실 이번엔 생각이고 뭐고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였다. 시간차 공격을 했을 땐, 나도 좀 당황을 했던 터라.
“내일 백퍼 신하람 이불킥한다.”
“하마터면 다 같이 줄 서서 가위바위보하고 있을 뻔하긴 했네.”
“마실 때마다 하자고 할 것 같은데.”
안지호의 그 말에 순간 침묵 아닌 침묵이 흘렀다. ···설마?
“어어, 세현아. 한다.”
“네?”
그때, 도운이 형이 티비를 가리켰다.
[이제 다음 순서는 ‘달리는 시계 토끼’의 무대입니다!]
아.
어느새 1 라운드 무대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가면 아래의 가수>를 시청했다.
“신하람, 이것도 못 봤다고 내일 울겠네. 아, <닫힌 시간>! 이거 노래 진짜 좋은데.”
“편곡도 잘했지. 세현이 보컬에도 잘 어울리고.”
“편곡은 수형이 형이 도와주신 거지?”
“응.”
이 곡의 편곡 방향에 관해서는 A&R 팀의 약간의 도움을 받은 바가 있었다.
[아무리 나아가려 해도]
[나는 결국 다시 돌아오게 돼]
[그 닫힌 시간 속으로]
그리고 그 이후로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거실은 그저 고요했다.
평소라면 뭐라도 한마디씩 했을 멤버들이었음에도 이상하게 유독 말이 없었다.
모니터링할 때도 이렇게 조용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와중에 제대로 집중하는 것 같은 모습에 그대로 맥주만 한번 들이켰다.
그리고 멤버들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앞선 내 무대가 끝을 맞이한 뒤였다.
“잘한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차선빈이었다. 이에 차선빈을 향해 한번 웃었다.
“야, 이거 몇 대 몇이냐?”
“어, 70···이었나?”
“70대 30? 그렇게 날 만한데?”
“이거 현장 반응 엄청 좋았을 것 같은데. 아, 역시 직접 갔어야 했는데.”
백은찬이 아쉬움 섞인 얼굴로 그대로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화면 속으로 낯익은 얼굴이 비춰졌다.
“아, 여기 저 선배도 있었지.”
“신도하.”
안지호가 그대로 미간을 좁혔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저렇게 웃는 거 보니 너 뽑은 모양인데.”
“신도하가 너 뽑았냐?”
“딱 봐도 우세현 뽑았잖아. 앞 무대랑 표정부터 다른데.”
“진짜 뽑았다고?”
나야 당연히 모르지···.
패널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으니.
“설마 결승까지 너 투표했으려나.”
“뭐?”
와중에 안지호가 사실이냐는 얼굴을 보였다. 아니, 나는 모른다고···.
아, 물론 결승 때는 날 뽑았다고 하긴 했다. 근데 사실 지금은 뽑아주면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할 상황인데.
“저렇게 잘하는데 안 뽑는 게 이상한 거긴 해.”
“엄청 마음에 든 모양이네.”
“세현이 노래잖아요.”
차선빈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괜히 좀 민망한 감이 있었다.
“근데 나름 목소리 잘 숨겼는데?”
“지난번에 너무 허무하게 들켜서. 그래서 이번엔 어때?”
“이번에도 바로 알겠는데.”
어, 잠깐.
바로 알겠다고?
“나름 열심히 숨긴 건데.”
“내 생각에도 이번엔 좀 잘 숨긴 것 같은데. 평소랑 발성도 조금 다르게 하고.”
“비슷하다고 느낀 건 우리가 우세현이란 걸 알아서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럴 땐, 역시나 이 방법이 제일이죠.”
그와 동시에 백은찬이 근처에 있던 폰을 집어 들었다.
“반응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