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있는 대로 다 털어왔다
이내 얼음을 구해 온 안지호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얼음주머니 하나를 만들어 왔다.
“야, 팔에 대고 있어.”
그렇게 얼음주머니를 받아들였다.
얼음이 든 주머니가 꽤 무거웠다.
이거 얼음을 그냥 있는 대로 넣은 것 같은데.
“이거 얼마나 넣었어? 엄청 차가운데.”
“몰라. 그냥 있는 대로 다 털었어. 그리고 원래 차가운 게 맞잖아.”
그건 맞는데, 이건 진짜로 차가워서.
그렇지만 안지호가 직접 얼음주머니까지 만들어준 마당에 안 한다고 할 순 없어 그대로 찜질을 계속했다.
와중에 안지호가 마치 감시라도 하듯 뚫어지게 응시를 하고 있던 터라 대충 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냥 누워도 되는데.”
“머리 굴리지 마라. 여기 있을 생각이니까.”
아, 알고 있었냐.
그러더니 정말로 아예 자리를 잡을 기세로 자세를 바꾼다. 이거 얼마나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
“매니저 형한테는 뭐라고 말했어?”
“그냥 얼음 좀 필요하다고 했어.”
앞서 매니저 형한테는 굳이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별거 아닌데, 일일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애들한테도 굳이 말하지 말고.”
“뭐. 팔에 시퍼렇게 멍든 거?”
“···그래, 그거.”
그러자 안지호가 대답 없이 팔짱을 꼈다.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아예 숨긴다는 거 아니고, 좀 더 지나고 나면 그때 얘기할게.”
“퍽도 그때 말하겠다.”
안지호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그때 말한다니까 그러네. 지금 말하기엔 좀···아무튼 그렇다.
“지금이랑 나중이랑 다를 게 뭐가 있는데.”
“나중에 좀 더 호전되고 말하는 게 낫잖아.”
“그렇지. 니 눈에도 너무 퍼렇지.”
그 말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안지호가 말없이 팔 위에 있던 얼음주머니를 다시 가져가더니 이내 얼음을 더 털어와 넣었다.
그 덕에 묵직했던 주머니가 더욱 크기를 키웠다. 그와 동시에 다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숨기지 좀 마라. 더 열 받으니까.”
안지호가 그대로 팔 위의 얼음주머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꽤나 진지했다.
그리고 걱정이 묻어 있었다.
이에 그런 안지호를 향해 나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다음엔 그냥 이대로 눌러 버릴 거니까.”
그러더니 곧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로 팔을 조금 누른다. 순간 느껴지는 아픔에 놀라 나도 모르게 안지호를 쳐다봤다.
“야, 방금은 진짜 아팠어.”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라고.”
두 번 말 안 했다간 오히려 멍을 만들 기세였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찜질을 계속했다.
마냥 차갑기만 했던 얼음도 이제는 조금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 * *
다음날은 오전부터 무대 리허설이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그래도 비가 오진 않았다.
그 이후로도 안지호의 얼음찜질 눈총은 계속됐던 터라 자기 전까지도 얼음주머니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덕인지 어제보다 통증은 조금 덜했다. 불편한 감각이 미세하게 남아 있긴 했지만.
‘의상이 긴팔이라 다행이군.’
오늘 의상은 차분한 블랙 수트였다.
여기에 와인색 타이를 맸고.
그리고 그 덕에 멍은 잘 가려질 듯했다.
- ♩♪♫
그렇게 리허설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사자는 한 번도 못 봤군.’
이른 새벽부터 나와 준비를 한 것도 있지만, 호텔을 나올 때까지도 사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사자를 봤다는 걸, 따봉이한테도 말을 해야 하나.’
정말로 사자라고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한데, 이걸 따봉이에게도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일단 능력에 관련된 것도 아니니.’
만약 또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그냥 그랬구나 싶은 헤프닝 정도로 넘어가는 방향도 생각할 수 있었다.
“다음, 윈썸 리허설 준비해주세요~”
슬슬 무대에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쨌건 그건 무대를 하고 나서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휘잉!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바람이 훅하고 불어왔다.
그것도 꽤 강한 세기의 바람이.
‘···뭐야?’
그리고 그 바람은 아주 짧고도 강하게 공연장을 스쳐 지나갔다.
“뭐야, 뭐야?”
“방금 바람 뭐예요?”
“어디서 분 거야?”
짧은 바람이었지만, 상당히 큰 세기의 바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놀란 얼굴들이 보였다.
이에 한순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스텝들은 물론이고 출연자들 역시.
그리고 당황한 건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분 건가? 저기 저 뚫린 곳.”
“와, 근데 실내치고 엄청 분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동시에 위에 보이는 공연장의 지붕 부분을 바라봤다. 실내 공연장이긴 했으나 공연장 상단엔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차하면 열고 닫기가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부분이 뻥 뚫린 채로 열려 있던 상태였고. 그렇게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기분 나쁜 바람.’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건 일반적인 바람과 다르게 왠지 모를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우세현! 올라가자.”
백은찬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 모를 찜찜함은 여전히 남아 있는 채였지만, 일단 지금은 눈앞의 무대로 올라가야만 했다.
* * *
“네, 윈썸.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리허설 무대는 준비한 대로 탈 없이 잘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무대를 내려왔다.
‘바람은 다시 안 부는군.’
일전에 불었던 그 바람.
그 이상한 바람이 다시 부는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여 무대 도중 다시 부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이 돼서. 몸을 못 가눌 정도의 세기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달갑지 않았다.
“그럼 다음 그룹 리허설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무대에는 다음 그룹이 올라갔고, 그 길로 멤버들과 다시 대기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재생> 하니까 좋다. 이거 누구 스포한 사람 없지?”
“할까 하다가 안 했어요. 안 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렇지. 그래야 다들 놀라시지.”
오랜만에 <재생> 무대를 해서 그런지 다들 꽤 들떠 보였다. 확실히 오랜만이니까.
그리고 보니 이 노래, 정말로 토 나올 정도로 연습을 했었지. 데뷔곡이다 보니 유독 많은 연습을 했던 곡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곡을 할 땐, 아무래도 느낌이 좀 달랐다.
-툭!
그런데 그때, 순간적으로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이에 옆을 보니 스텝 한 명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그리고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급하게 어딘가로 이동했다. 꽤나 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정신없어하는 걸 보니.
“야, 팔 부딪혔냐?”
안지호가 날 향해 낮게 물어왔다.
이에 괜찮다고 말했으나 여전히 안지호의 표정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
정말로 괜찮은데.
그리고 그렇게 다시 대기실로 이동하려던 찰나,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사원증?’
사원증이었다.
그리고 그 사원증엔 조금 전 부딪혔던 스텝의 얼굴 사진 붙어 있었다.
이에 빠르게 스텝이 지나간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앞선 스텝의 뒷모습이 보였다.
“먼저 가 있어. 이거 얼른 돌려주고 올게.”
“어, 지금 가려고?”
“응. 앞에 있으니 빨리 전해주려고.”
그리고 그렇게 멤버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는 말을 한 뒤, 스텝이 있는 곳으로 조금 빠르게 향했다.
‘아까 분명 이 근처에서 봤었는데.’
그런데 조금 전까지 보였던 스텝의 모습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직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아, 젠장.”]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아까 그 스텝의 목소리 아닌가.
확실하진 않지만, 얼핏 듣기론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있는 건 맞군.
이어서 그대로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스텝이 보였다.
그리고 그 스텝이 있던 곳을 따라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조금 전 대기실로 향하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여긴 꽤 한산하네.’
더불어 스텝들이나 아티스트들로 북적이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주변이 상당히 한산했다.
아니, 한산을 넘어서 고요했다. 정말로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
그리고 그 순간, 발견했다.
그 스텝을. 파란 모자를 쓴 스텝을.
“안녕하세요.”
그렇게 먼저 말을 건넸다.
동시에 내 목소리를 들은 스텝이 그대로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아까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그러자 파란 모자의 스텝은 그대로 잠시 내가 내민 사원증을 보는 듯하더니 이내 이를 건네받았다.
“···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한번 보이며 건네받은 사원증을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생각.
[“빨리, 빨리 가야 하는데.”]
아, 바쁜 사람을 붙잡고 있었군.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용건은 끝났으니 그대로 스텝에게 인사를 건넨 뒤, 다시 돌아가려 했는데 그 순간 스텝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 * *
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
조금 전 스텝은 분명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망을 가야 한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봐도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굳이 상황을 끼워 맞춰 보자면, 이대로 일을 던지고 도망간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애초에 그것도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정말로 스텝은 무언가로부터 도망갈 생각인 건지 아까보다 더욱 다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튈 생각인 건가.
제대로 된 과정도 없이 이대로 퇴사를···.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그 자식?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감사했습니다, 세현 씨.”
그러더니 그대로 등을 돌리려 했다.
여전히 잔뜩 다급해 보이는 모습으로.
“승우 씨.”
“···예?”
“아, 죄송합니다. 아까 사원증에 이름이 보여서요.”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앞서 들은 생각이나 정황으로 봤을 때, 이건 단순히 퇴사 같은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은 지금, 누군가로부터 도망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뭔가를 잘못한 거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범주를 넘어선 잘못을.
그건 마치 도망치는 범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 사람, 뭔가가 있다. 동시에 그런 느낌이 왔다.
이대로 순순히 보내선 안 된다는 느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발을 잠시 묶어두는 것뿐.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그건 곧 스텝이 말한 그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 스텝을 찾아서.
“···그래서 뭔가 하실 말이 있으신 건가요?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아, 바쁘시군요. 죄송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제가 붙잡아뒀네요. 혹시 무대 쪽을 담당하시는 스텝이 아닐까 한 생각에.”
“저는 무대 쪽 담당이 아니라서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다른 분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슬쩍 돌린다.
다시 제 갈 길을 가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급해 죽겠는데···!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가야 한다고···!”]
하지만 침착한 대답과는 달리 속은 여전히 잔뜩 다급한 기색이었다. 이렇게 되니 확실히 좋지 않은 감이 들었다.
이에 다시 한번 남자를 향해 말을 꺼내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소리 하나가 들렸다.
뚜벅, 뚜벅.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정확히는 스텝의 등 뒤에서부터 들리는 소리.
뚜벅, 뚜벅.
발소리.
그렇게 발소리를 점차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점점 더 크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보였다.
사색이 된 스텝의 얼굴이.
‘그 자식.’
앞서 스텝이 말한 ‘그 자식’이었다.
지금 다가오는 이는 분명.
그리고 그 순간, 스텝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윽고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때, 눈앞으로 보이는 그 발소리의 주인에 나 역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아.”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였다.